一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내 심사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내 청춘
二 좋다 할 땐 뿌리치고 싫다 할 때 달려드는 모를 것 이내 마음 봉오리 꺽어서 울려놓고 본체만체 왜 했던가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내 청춘
李穡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활동분야; 학문,정치
생애와 업적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홀레라. 반가운 매회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이색이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옮은 시이다.
공민왕을 도와 개혁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성균관(成均館)의 총책임자인 대사성(大司成)을 맡아 유학의 종장(宗匠)으로 고려 말의 학문을 이끌었으며,고려 말과 조선 초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문장가였던 이색은 새 왕조에 침여하기를 권하는 이성계를 거절하고 절의를 지킨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권문세족에 맞서며 신진사대부들을 이끌던 인물이 왜 신진사대부들이 세운 나라인 조선에 합류하지 않고 저물어가는 고려와 운명을 같이했을까.
고려 말,당시의 지배 세력인 권문세족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을 신진사대부라 하는데,이들은 대부분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리가 되었다. 이미 중앙정계에 진출해 권력을 누리고 있던 권문세족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색은 향리 집안 출신이다. 이색의 집안은 대대로 한산에서 호장(戶長) 직을 이어왔다. 그러나 아버지 이독이 원나라 과거에 2등 으로 합격한 뒤‘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검열관)’ 이라는 벼슬까지 하며 이름을 떨쳐 이색의 집안은 중앙정계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된다. 더구나 이색이 열네 살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소년진사가된 신동이다보니, 딸을 가진 부모들은 모두 이색을 사윗감으로 탐냈고,이색은 그 가운데 명문가인 권중달의 딸과 혼인했다.
다른 신진사대부들과 달리 이색은 아버지와 처가,양쪽에 든든한 기반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그가 다른 신진사대부들보다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스무 살 되던 해 이색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원나라 베이징에 갔다. 천하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원나라 수도에서 씨로운 문물과 사상을 접한 그는 국자감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이곳에서 이색은 유교의 도를 해외에 전해줄 인물로 극찬을 받았다. 이후 원나라 과거에 2등으로 합격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의 벼슬길에 나섰다. 이러한 원나라와의 인연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는 다른 사대부들과 엇갈린 선택을 하는 배경이 된다.
스물여닮 살이 되던 해 원나라에서 돌아온 이색은 공민왕이 이끄는 개혁의 실무관료로 활약한다. 정방 혁파(革罷) 등을 요구한 상소를 계기로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문무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그 무렵 실시된 과거시험의 시험관을 모두 맡아 교육과 과거제도의 개혁을 이끌었다.
이색은 개혁적 입장에 섰지만, 그가 말하는 토지개혁은 토지제도의 운영에 있어 불법과 비리를 척결하자는 것이고, 불교개혁도 불교자체는 존중하면서 불교에서 파생되는폐단을 시정하자고 주장했다. 고려 왕조의 법과제도를유지한채 운영상의 부정을 없애자는 주장이었다.
우왕 대에 이색은 유학을 이끄는 대표적인 학자로 성장했다. 정도전•권근•길재 등 수많은 사대부들을 길러냈다.
이 무렵 신진사대부들은 체제 내의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파와 좀 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급진파로 나뉘기 시작한다. 공민왕과 함께 개혁을 이끌다가 좌절한 뒤,우왕 대에 다시 등장한 보수적인 정치 세력 앞에서 서로 다른 선택 들을 한 것이다.
위화도회군 당시 이색은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회군에 반대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사대는 변환 없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었다. 위화도회군에 성공한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폐하고 자신들이 마음 대로 할 수 있는 왕을 세우려 할 때 이색은 조민수의 의견을 따라 전왕의 아들인 창왕을 세우는 것에 찬성했다. 우왕과 창왕이 공민 왕의 소생이 아니라 신돈의 소생이라는 말을 꾸며 퍼뜨리던 이성계 일파들과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이들의 갈등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토지개혁을 둘러싼 이견부터이다. 창왕 원년, 조준은 사전(私田)의 혁파를 주장했다. 현존하는 사전 제도를 전면 혁파하고 새로이 분배하지는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반면 이색은 옛 법을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사전 혁파에 반대했다. 전면적인 개혁 대신 운영상의 폐단을 시정하자고 주장했다.
사전 혁파에 대한 문제가 처음 조정에서 논의될 때는 반대하는 세력이 더 컸다. 반대자들은 모두 권세가 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정국을 장악한 이성계의 뜻대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1388년(우왕 14) 사전 혁파 안이 의결되었다. 이는 구세력의 정치적 몰락인 동시에 신흥 세력에게는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경제적인 배경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색이 이성계 일파의 음모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무렵,1368년 건국된 명나라에서 창왕의 책봉문제로 대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직접 명나라에 와서 설명하라고 요구해왔다. 모두들 명나라에 가기를 꺼려했지만,이색이 나섰다. 이미 회갑을 넘긴 나이라 모두들 말렸는데도 이색이 나선 것은 명나라 황제의 힘을 빌려 고려 왕조를 보호하려는 마음에서였다 창왕을 직접 명나라에 친조 케 하여 명나라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이성계 일파도 쉽게 어쩌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이마저 성사되지 못했다.
김저 사건을 계기로 창왕도 폐위되고,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이성계는 국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공양왕은 이색을 다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들은 이색이 왕씨가 아닌 창왕을 옹립했고,유학자로서 불교에 미혹되었다는 이유로 탄핵해 귀양 보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예순둘,이후 심문을 받고 투옥된 일도 여러 번이고, 청주•함창•금주•장흥 등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녀야 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귀양살이를 하던 이색은 상복을 입고 지냈다. 나라가 망했으니 신하로서 상복을 입고 애통해한 것이다.
조선의 태조가 된 이성계가 1395년 이색을 불러 도와달라고 청했으나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해 경기도 여주를 여행하다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예순여넓이었다. 아들 둘을 먼저 보내고, 아내도그보다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
평 가
이색은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삼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지만,보수파이며 사대주의자라는 비난 또한 함께 받고 있다.
《고려사》는 그에 대해 “천품이 명민하고 여러 가지 서적을 널리 읽어서 시와 글을 지을 때에는 붓을 들면 조금도 거침없이 즉석에서 쓰곤 하였다. 후배를 추켜세우기에 노력하였으며 유학을 발전시키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겼다. 학자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모하였으며 나라의 문교 사업을 수십 년간 주관하였고 누차 중국에서도 칭찬을 받았다. .... 그러나 의지와 절개가 확고하지 못하여 큰 문제를 제의한 것이 없으며 학문이 순정 하지 못하여 불교를 숭상함으로써 세상의 비난을 밸았다”라고 적고 있다. 불교를 숭상하여 세상의 비난을 받았다고 적혀 있는데,사실 고려 때 불교는 국교였다.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의 입장에서 한 비난이지 고려시대에는 누구나 불교를 믿었다. 불교를 숭상한 일이 결코 세상의 비난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
한편,조선시대 유학자 김종직은 이색을 회고하며 시를 한 수 남겼다.
푸른 바다 동쪽의 신비를 몰랐더니 천 년 동안 정기 어린 땅에서 낳은 분일세. 선생이 한번 나시어 사람의 상서가 되니 이때에 단양 천지 초목이 말랐다네. 스승의 깊이가 선생을 당할 이 없으니 우리나라 인물이 도견에 들었네. 이제 부질없이 그 사시던 곳을 지나니 한때에 태어나 선생님으로 모셔보지 못했음이 한이로다.
삼은
고려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冶隱),길재(吉再)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들 세 사람의 호에 모두‘은(隱)자가 들어 있는 데서 유래했다.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지조를 지킨 인물들이다. 야은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넣기도 한다.
성균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성균’ 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지감의 명칭을 ‘성균’ 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공민왕 때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 했다. 최고 책임지는 정3품 대사성이었다.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싹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했으며,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如牌)등을 제공받았다. 성균관은 조선 시대 학문의 전당이었으며,그전통을 이어받아 1946년 성균관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조민수
?~1390(공양왕 2). 고려 말의 무신. 홍건적•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문하시중,판문하부사까지 올랐다.1388년 요동 정별군의 좌군도통사로 출정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공신이 되었다.1389년(창왕 1)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다가 조준 등의 탄핵으로 창녕에 유배되었다. 이 해에 창왕의 생일 특사로 풀려나왔으나,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다음해에 다시 창녕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조준
1346(충목왕 2)~1405(태종 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우왕 때 과거에 급제했으며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이루었다. 과전법 개혁을 주도했으며,개국공신 1등에 문히우시중(門下右待中)에 올랐다.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영의정부사가 되었으며,아들이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와 결혼했다.《경국대전》의 토대가 된《경제육전》을 간행했고,문집《송당집》을 남겼다.
김저
?~1389(공양왕 1) 고려 말의 무관. 최영 누이의 아들이다 1389년에 최영의 측근인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폐위된 우왕을 만나,이성계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와서 곽충보(郭忠輔)와 거사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밀고했다. 이 사건으로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창왕도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다. 김저는 그 해 11월 감옥에서 죽고,모의에 가담한 27인은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