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황금심 작사 이서구 작곡 전오승
一 구중 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 아 님 고이 든 그 날 밤이 차마 그려 치마폭에 목메는가.
. 二 대전 마마 뫼시든 날에 칠보 단장 화사하든 장희빈 아 버림받는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李舜臣 생몰년도: 1545년(인종 1)-1598년(선조 31)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忠武) 활동분야: 군사 다른 이름: 충무공
생애와 업적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발대 1만7,000여 명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에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거쳐 함경도로 올라왔다. 왕이 랴오둥으로 피신할 생각을 할 만큼 전황은 어두웠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이 같은 참패와 달리 바다에서는 조선의 수군이 연전연승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전라좌수사로 특진된 이순신의 활약 덕분이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순신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활약을 보이지 않았다. 1545년(인종 1)에 태어난 그는 1576년 서른두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비로소 식년시 무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결벽에 가까운 강직성,타협 없는 원칙적인 자세 때문에 승진도 늦고 주위의 모함과 견제도 많이 받았다.
한번은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이이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지만,“이 판서께서는 나와 동성동본의 웃어른이므로 내가 먼저 찾아 뵈어야 도리이지만,그분께서 최고 인사권자로 있는 지금,굳이 만나는 것은 서로 누가될 뿐이다”며 만나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여진족의 침입에 대한 책임을 덮어써 삭탈관직 당하고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하는등 모함과 시련을 받으며 10여 년의 고단한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성실하고 반듯한 자세가 차츰 인정을 받았고, 또 죽마고우였던 유성룡의 강력한 추천으로 복직되어 정읍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일약 전라좌수사로 천거되었다. 이렇게 운명처럼 임진왜란 1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이순신은 부임한 뒤 군대의 기강을 세우고 군비를 강화해 1년 뒤에는 40척의 크고 작은 전선을 보유한 강력한 수군을 양성했다.
부산 앞바다에 왜군이 들이닥치자 이순신은 경상우수군과 연합해 옥포•합포 등지에서 40여 척의 적선을 대파했고,이후 군비를 재정비하여 사천•당포•당항포•율포 등의 해전에서 적선 70여 척을 격파했으며,전라좌•우수군,경상우수군이 연합전선을 구축한 뒤에는 7월 8일 한산도대첩.9월 1일 부산포대첩을 거두는 등 일본 수군을 거의 전멸 상태에 빠뜨렸다.
이러한 이순신의 승리에 물론 거북선이 기여한 바 크지만, 당시 조선 수군의 배가 모두 거북선이었던 것도 아니고 또 거북선을 처음 만든 것이 이순신이라는 우리의 상식도 잘못된 것이다. 입에서 불을 뿜는 철갑의 거북선에 이순신 장군이 타고서 적을 무찌르는 장면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일 뿐이다. 우선 거북선은 철갑이 아닌 판자로 덮인 돌격선으로 입에서는 유황의 불이 아니라 포를 쏘았다. 또한 본진이 아니라 맨 앞에 나서야 하는 돌격선이다 보니 대장인 이순신이 탈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고,임진왜란 당시 세 척에서 많아야 다섯 척 정도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또한 거북선을 새로 정비하고 개발한 공은 분명 이순신과 부하들에게 있지만,거북선이라는 배가 있었다는 사실은《태종실록》에 이미 나온다.
어쨌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위를 판자로 덮고 그곳에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십자형 길을 제외하고는 칼과 송곳을 꽂아 적들이 발붙일 수 없도록 했으며,앞의 용머리와 뒤의 꼬리에 총 구멍을 내고 좌우에도 각각 6개의 총 구멍을 낸 모양으로,적을 만나 싸울 때는 맨 앞에서 적선을 들이받는 충돌 작전에 사용됐다. 좌우 전후에서 총을 쏘고 또한 적이 배에 오를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으니 크고 작은 해전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이 승전을 거듭하며 해상을 장악하자.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여 조선을 점령하려던 일본의 전략은 무력화되었다. 또 이 무렵에는 조선군이 육전에 있어서도 수세에서 공세로 전세를 전환시키고 있었고,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까지 도착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왜군은 강화협상을 제의해왔다. 조선의 완강한 반대에도 명군은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측의 조건이 너무 달라 시간만 끌던 회담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고 다시 일본의 수군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순간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였던 이순신은 감옥에 갇히고 만다. 도대체 그때 조정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적장 고니시유기나가(小西行長)가 보낸 밀서였다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 올 것이라며 이를 막으라고 알려주었다. 주전논자인 가토가 조선 땅에 상륙하기 전에 이순신의 수군으로 무찌른다면 또 다른 전쟁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정보가 가짜가 아닐까 조정은 긴장했지만 선조는 이 정보를 믿고 이순신에게 가토를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고니시의 정보가 ‘간사한 속임수”라고 의심한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가토는 조선에 무사히 상륙했다. 이것이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결국 왕의 명령을 거역한 이순신은 감옥에 갇히고 원균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원균은 부산포의 적 본영을 공격하러 출진했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적에게 대패하고,당황한 선조는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이순신이 돌아와 보니 그 동안 피땀으로 육성해온 군사와 배는 간 곳이 없었다. 원균의 패전으로 수군은 거의 전멸했고 열두 척의 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정에서도 실상을 파악한 뒤 수군이 너무나 미약하니 육군으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할 정도였다. 이에 이순신은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아직도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배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비장한 장계를 올린다.
먼저 이순신은 한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라도 내륙지방을 순회하며 병사를 모으고 무기와 군량을 확보했다 그 해 9월 왜군 수백 척이 또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열두 척의 배와 수리 중이던 한 척을 합쳐 열세 척의 배를 이끌고 출전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 선택한 장소는 명랑해협이었다.‘울돌목’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은 조류가 빠른데다 지형이 좁아130여 척이 넘는 적선은행동이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130여 척의 대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조선의 장수나 군사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도망갈 궁리만 했다. 이순신은 겹겹이 포위한 적선 사이를 뚫고 손수 활을 쏘고 기를 흔들며 이들을 독려했다.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대장 선을 비롯한 왜선 31척을 격파하고 나머지는 먼 바다로 격퇴시킬 수 있었다. 열세 척의 배가 130여 척의 배를 물리친,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승리이다. 이 승리로 정유재란은 또 다른 전기를 맞는다. 수륙양공 이라는 왜군의 전략이 또다시 좌절된 것이다.
명량대첩 이후 목포 근처 고하도로 옮겼다가 이듬해인 1597년 고금도로 진을 옮길 무렵에는 군사도 8,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전선도 여러 척 마련해 군세를 거윈 회복해가고 있었다. 그 무렵 명 나라에서 구원군으로 온 수군제독 진린이 욕심도 많고 포악하여 골칫거리였으나 이순신은 그를 감복시켜 명나라 수군의 지휘권도 장악했다.
그러다 그 해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철병하기 시작했다. 왜군에게 뇌물을 받은 진린은 퇴각하는 왜군의 길을 터주자 했으나 단 한 놈의 왜적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 이순신의 굳은 결의였다. 결국 진린이 몰래 터준 틈을 타 적선 한 척이 빠져나갔다. 이 구원 요청으로 왜선 300여 척이 노량 앞바다에 몰려들었다. 이순신이 봉쇄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러 온 것이다.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대 결전이 벌어졌다. 이날 조선 수군은 불 붙은 나무나 화기를 상대 전함에 던져 불을 지르는 전투 방법을 썼고,왜의 대 선단은 차츰 균열되어갔다. 도망치는 적선의 뒤를 이순신이 맹렬히 추격하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이때 이순신의 왼쪽 겨드랑이로 적의 탄환이 날아들었다. 심장 근처의 치명상이었다. 이순신은 급히 방패로 자기 앞을 가리게 했다 적이 행여 자신의 상태를 볼까 걱정해서였다. 선실 안으로 들어간 이순신은‘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의 나이 쉰넷,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왜군을 섬멸하는 마지막 전투에서 눈을 감고만 것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왜선 200여 척을 격침해,전쟁이 벌어진 이후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싸움을 끝으로 7년간의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렸다.
평 가 《선조실록》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일도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폼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 제사하고 우의정을 증직했다가 6년 뒤 좌의정을 추증하면서 덕풍부원군(德風府院君)에 봉했고,같은 해 선무 1등 공신에 책정했다. 이후 인조 21년 충무공의 시호를 내렸고,정조 17년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이처럼 이순신은 당시에도 최고의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순신의 묘에는 보물로 지정된 김육이 지은 신도비와 함께 21대 왕 정조가 직접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다. 우리 역사상 왕이 신하의 묘에 비문을지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비석은 오직 여기 한군데뿐이다.
또한 숙종은 현충사 제문에“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라는 글을 남기며 이순선을 추모했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이웃 나라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명나라의 진린은 선조에게 이순신을 평하며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요,하늘과 해를 다시 손본 공이로다”며 극찬했고,일본 최고의 명장이요 군신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가 러일전쟁에서의 승전을 축하하는 피로연 석상에서 자기를 영국의 넬슨과 이순신에 비겨서 칭송하는 축사를 듣고 “나를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국난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한 상징이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더욱더 확고히 자리 잡았지만,최근에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와 전공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인간적인 결점에 대해 논의하며 지나친 신격화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