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田渡의 屈辱 [李朝 仁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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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L코리아, 삼전욕도의 굴욕 (정축하성) Entertainment
2014/03/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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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SNL 코리아>의 한 코너인 '카스2 : 병자호란'에서 잠깐 나온 삼전도의 굴욕에 대해 잠깐 정리해 본다. '삼전도의 굴욕'은 정축하성이라고 하는데, 인조가 정축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도망가 숨어 있다 성에서 나왔다는 의미다.
정축하성이란? (삼전도의 굴욕)
정축하성(丁丑下城)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1637년(정축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을 말한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표현된다.
다만 당시 인조는 절대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성에서 나온다는 뜻인 하성이라고 표현했고,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
처음, 청군은 항복 의식으로서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이는 마치 장례를 치르듯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항복'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타협에는 성공했지만, 이 또한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의식이었다.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의 어가는 한강을 건너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했고, 공식적으로 청에 항복했다.
임금이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것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다고 자부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기념해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했다.
[출처] SNL코리아, 삼전도의 굴욕 (정축하성)|작성자 블루문
석촌서호와 삼전도의 굴욕 조영희의 한강이야기
http://cafe.daum.net/noljacokr/QeNW/62?q=%BB%EF%C0%FC%B5%B5%C0%C7%20%B1%BC%BF%E5 그 옛날 삼전도(三田渡)자리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이다.삼전도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나루터다. 한강의 본류는 구의동 앞으로 바뀌면서 송파진과 삼전도에는 석촌호가 들어섰다.왕은 이웃 헌릉과 선정릉으로 갈 때는 이 나루를 이용했다. 1637년 1월 30일 한강 상류 삼전도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그해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 5∼7시) 무렵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서문을 빠져나와 청 태종의 지휘본부가 있던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국왕의 의례복인 면복도 입지 못하고 남색 융복(戎服)을 차려입은 초라한 행색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은 통곡하였다. 드디어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受降檀·)에 나아갔다. 인조가 청태종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세 차례 큰 절을 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항례(항복의 의식)는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다. 단상 아래 도착한 인조는 태종이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 의식은 여진족이 그들의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 절차였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재위 때 여진족 추장 누루하치가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후금의 태조(누루하치)는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 명나라를 공격했다. 광해군은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쫓겨났다.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친명배금(명나라와 친하고, (후)금나라를 배척한다.)정책을 썼다. 할아버지 선조가 일본에게 무방비로 전국을 유린당한지 40년만이다.그 인조는 그 임진란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하고 후금에게 가장 치욕적인 참배를 당한다.오랑케 후금과의 전쟁을 두 번이나 치러야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병자호란 때 오랑캐 청나라 황타이지는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굴욕적인 사건이 바로 삼전도에서 일어난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을 인질로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돌계단을 쌓아 올렸다. 비문을 찬술하는 일만이 남았다. 조선에서는 당연히 청에서 문장을 받아다가 새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이경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 자연스럽게 빠졌고, 그 밖에 세 사람은 11월 27~29일 사이에 모두 글을 지어 올렸다. 인조는 이경석이 쓰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조용히 불러 중국 춘추시대의 월나라 제2대 왕인 句踐이 吳나라에서 치욕을 참고 신첩 노릇을 하면서 와신상담하다가 끝내 夫差에게 당한 치욕을 갚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나라의 存亡이 달려 있는 일이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면서 간곡하게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비문을 짖게 되었다. 이경석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준 형 이경직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고 말한다.
다시 고쳐 쓴 비문은 이듬 해인 인조 16년(1368) 2월에 사신으로 파견된 유림(柳琳)에 의해 심양으로 보내졌다. 이것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간섭과 요구로 한문과 만주어 그리고 몽고어로 나뉘어 각자(刻字) 작업에 들어가 이듬해에 완성되어 인조 17년(1639) 12월 8일에 비가 세워졌다.
청일전쟁 후 고종 32년에 굴욕적인 역사를 잊어버리기를 위하여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