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철길 예비 조사 (測量측량)

bsk5865 2021. 10. 2. 17:20

철길 예비 조사 (測量측량)

 

석탄 목재 수송을 위해 태백까지의 철로 부설은 일제말기의 서두른 정책이었다.

이의 시발역이 될 영주와 봉화간, 그리고 봉화를 거쳐 거촌, 이어서 춘양까지 일

정때 먼저  공사를 했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때 (일정때) 봉화까지 걸어가는 도중 거촌 조금 지나서 그때 청

년훈련생이 공사에 동원되어 그 감독을 위해 다까야마(高山)선생이 현장에 와 있

어 만났고 한바(飯場)..(인부들이 식사 하는 식당)로 안내받아 밥을 얻어 먹은 기

억이 있다.

 

그 연장으로 춘양까지의 노선 확정전 예비 측양을 할때의 이야기다. 물론 해방전의

일이고 그후 공사도 해방전에 시작 됐었다.

그때 소문은 우리 마을 앞으로 철길이 난다는 것이어서 모두가 술렁거렸다. 거촌에서

장그래미 앞을 지나 한질로 와서 똥그란봉을 향해 와서는 굴을 뚫고 지나간다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하나? 아버지의 걱정은 태산같았다. 이유는 똥그란봉에

굴울 뚫는다는 것이 제일 싫었고 그 다음은 마을의 토지가 많이 없어진다는 것도 충격

이었다. 그 산에는 아버지의 증조부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묘와, 아버지의 백부,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영주서 이 고을에 모신 우리 문중의 직계조인 13세(世) 지무(枝茂)할

아버지도 계신다.....(지금은 입향조묘역으로 옮겨 모셨다.)

 

조상이 잠들고 계시는 곳에 굴을 뚫고 밤낮으로 기차가 검은 연기를 품으며 지축을 울리는

것이 싫은 것이고 조상을 모시는 자손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다.

또 그 자손에 액운(厄運)이 돌아 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를 저지 시켜 보려고 궁리 끝에 우선 측량사(測量士)들에게 손을 써 봐야겠다

고 생각하셨는지 점심준비를 해 놓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몹씨 추웠던 겨울 어느날 그 측량사들이 부랭이 까지 왔다. 장그래미를 거쳐 점심때쯤

우리 집앞까지 왔을때  "추운 날 고생이 많다"고 점심은 우리집에서 하라고 초대했다.

날씨가 추워 따뜻한 물 한잔이 아쉬운터에 횡재를 만난듯 사랑방에 10여명이 들어가

추위를 녹였다.

점심준비는 쌀이 귀했던 시절 칼국수에 막걸리, 술안주는 배추적, 메밀묵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들은 허리에 찻던 도시락을 풀고 뜨거운 칼국수에 막걸리....그시대에

이쯤 되면 푸짐한 대접이었다.

 

아버지는 조장인듯한 사람과 구구한 사정을 설명한듯 하다.

점심이 끝나고 측량을 계속됬기에 따라가 봤다. 큰집 큰밭 가는 도랑을 못가서 "IP"

라고 표시된 말목을 밖았다. 그 뜻을 물어 보니 "이것은 in the point"라는 약자(略

字)라"고 알려주던 일을 거억하고 있다.

 

그러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노선은 마을을 건드리지 않고 지금의 철길이 됐다.

뒤에 큰 형수님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그 측량사중 한사람이 "오늘 어르신

큰 덕을 봤다."고 하드란다.

그렇지만 국가의 정책이 그렇게 호락한 것은 아니다. 공사의 난이도, 공기, 예산, 자

연의 보호 등 여러면에서 검토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기?

우리 마을 통과는 부담이 커 배제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겠지......

 

아버지의 이러한 로비활동은 마을과 문중의 피해도 막고 조상의 묘도 보존할 수

있는 방책을 찾으려고 샐행한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길때 마다 먼저 고민하고 앞장 서서 집안과 문중의 힘을 한데 모으고

대처하는등 집안과 문중을 이끌고 나가는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