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마음의 부자된듯 했던 때

bsk5865 2021. 10. 5. 16:57

마음의 부자된듯 했던 때

 

일생을 통해 가장 형편이 좋아져서 동내 사람들의 치하를 받으시면서 아버지가

흐뭇해 하시는 것을 한번 봤다. 원래 큰 욕심이 없으신 어른이셨다.

 

해방되기전 부터 철도공사는 하고 있었다. 개통도 가지가지....영주 봉화간만 다닐때는

영봉선, 춘양까지 개통하고 영춘선, 철암까지 개통하고는 영암선,  강릉까지 연결되고

영동선으로 고착

 

공사도 일제 당시에는 작곡재를 중심으로 "하사마 구미" (間組)라는 일본 토목회사가

했다.  우리 앞집 사랑채를 이 회사 일본인 간부 내외가 빌러 쓰고 있었다. 그때 호기심

으로 그집에 찾아가 봤고 설탕이 섞인 양대 같은 것을 대접 받으면서 "옥상" (부인)과

대화해 봤다. 그 음식의 단맛에 홀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해방후에는 5공구로 (6,25때는 중단) 회사이름은 모르겠으나 온 동내사람들이 일을

했다. 농한기에  좋은 철도 공사가 있어 신바람이 났던 시절이었다.

 

그때 운반 수단의 으뜸은 소구루마였다.  이제가지 모은 돈으로 황소와 구루마를 거금

100원(圓)에 샀다. 구루마는 늘 당집 근처까지만 끌고 와 두고 소만 집으로 몰고 왔다.

--그 이상은 길이  좁아서 구루마를 몰수 없기에--

이것이 눈에 보이는 큰 동산(動産)이고 집안 식구가 대견스럽게 여긴 자랑거리었다.

 

인력외앤 운반수단이 별로 없었던 시절에 매일 공사판에 출역하여 수입을 올렸었다.

또 장날이면 구루마가 수송비를 벌어 오고 고등어 한손이라도 꼭 사가지고 오니 흐뭇

했었다. 공사가 끝난후라도 농한기 수입이 없었던 때에 돈을 벌어 오는 기회가 장마다

있으니 든든하고 마음의 부자가 된듯 했었다.

동내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을 산 이런 행복한 일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랐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오래 가지를 못했었다. 잦은 고장의 수리와 오르는 물가, 불경기, 해방

후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 주민의 생활고 등이 겹쳐 날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더니 이 사

업도 빛을 못보고 안타까운 긴 여운만 남기고 그늘 속으로 살아젔었다. 세월도 야속

했던 서운한 가정사였다.

 

철도 공사에서 돈을 벌어왔고 농한기에도 구루마로 일용잡비라도 넉넉하게 쓸 돈을

벌어 보려는 계획은 세월 탓으로 좌절됐지만 손해 본 것은 없었다. 값이 엄청 많이

오른 힘 좋은 그 황소가 버티고 있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