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석(哀惜)했던 영별(永別)
애석(哀惜)했던 영별(永別)
아버지는 58세에 아까운 연세로 돌아가셨다. 늘 속이 아프다고 하셨고 자리애 누운
후로는 날로 병세가 악화되어 갔었다.
그때 나는 1949년 6월에 취업을 했고 행사가 있어 직원 여럿이 야근을 하고 있었던
어느날 밤에 작은 형 두분이 찾아 오셨다.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 얼굴 한번 더 보고
싶으면 집으로 가자"라고........힘이 빠지고 가슴이 철렁하더니 눈물이 핑 돌았었다.
그 후로는 모두 아버지 곁을 지켰고 슬픔과 근심걱정속에서도 운명(殞命)의 시간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후 1950년 1월 20일 (음력 기축-己丑-1949, 12, 11,)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젠 아픈곳도 없다"고 하시면서 편안한 얼굴로 남길 이야기도 모두 하시고
번갈아 드린 물 하숟가락식 받으신후 조용히 운명하셨다. 슬픔속에서도 심장의 박동이
멈추는 순간도 목격했다.
지금 생각하면 병명은 위암(胃癌)이 아니였을까?...생각된다. 발병후 긴 세월이 흘렀고
진통(鎭痛)도 할 줄 몰랐던 시절에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
프다. 그때 한촌에서 의료행위란 한약에만 의존했으며 지금과 비교한다면 원시적인 수
준...생사란 운명에 맡기고 오직 기도하는 마음뿐...이렇게 속수무책의 답답한 세월을
살았었다.
아버지와의 영별은 자식뿐만 아니라 온 동내의 슬픔이 됐었다.
그때 우리 집안 (문중)을 이끌고 있던 어른이셨다. 앞뒷집에 오랜 세월 같이 사시면서
늘 오셨던 성곡할배 (아버지의 재종숙)가 "나를 두고 먼저 가면 어떻개 하나" 하시며
통곡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며 모두 같이 통곡의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아버지를 추모하면 나는 아버지의 걱정
만 끼쳣고 받기만 했던 불효자식임에 틀림 없다.
기쁘게 해 드린것은 취업을 했다는것! 우리집 첫번째 공무원이 됐고 그것이 보기 좋아
나도 모르게 교단에 선 나를 지켜 보고 계셨다.
인사 드리고 장터 국밥집으로 모셨다. 국밥 한그릇, 막걸리 한잔, 그리고 "장수연"이란
담배 두어봉....그것이 전부인데도 행복해 하시던 모습......
나도 죽음이 가까와 온 지금 그 모습 그리며 추모의 정은 더 애틋하다.
10년만 더 살아 계셔도 자식들 효도의 기회가 됐을텐데.....철 들고 변해 가는 형제들의
모습을 봤을 텐데.....그리고 어렵게 공부했고 우리집의 자랑이된 두 숙질이 나란히 교육
공무원으로 교단에 선 영광을 같이 누렸을텐데......자욕양이 친부대(子欲養而 親不待)란
글귀를 실감했었다.
인간 수명이 길어져 지금이야 환갑잔치 하는이 별로 없지만 그때 환갑잔치에 초대받으
면 환갑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먼저 떠올라 많이 망서리기도 했었다.
어느 날 상중(喪中. 그때는 3년상)에 봉성장(市日)에 다녀오신 두루막에 패랭이를 쓴
모습의 작은 형님이 아버지와 절친했던 분을 만나 아버지 생전의 이야기를 듣고 오셔서
그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는 모습을 봤다. 그때 나도 성년이었으나 나보다 형들이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더 절실했음을 알고 몹씨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었다. 함께한 고락
의 세월이 더 길어서였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 정월28일은 어머니 회갑날이었다. 농촌에서 술 빚고 손쉬운 술
안주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 친구 몇분만 모시고 이 날을 보냈었다. 5형제가 있는데
제대로된 축하연을 준비코자 했으나 아버지가 극구 못하도록 만류하셨기에 못했었다.
아마도 그해 섣달에 세상 떠나실 예감같은 것이 있어서 그랬을까?...
죽음을 앞둔 늙은이는 언제쯤 떠날것을 예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버지만은 예감하셨을것 같다.
평생 못해 본 말 여기서 해봅니다. "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