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장(日葬),3년상(年喪),4대봉사(代奉祀)
9일장(日葬),3년상(年喪),4대봉사(代奉祀)
아버지 돌아가실때 장례와 제례에 대한 유언도 하셨다.
우리는 얼굴도 모르지만 큰아버지가 맞집이고 아랫대(代)인 종형(從兄)도 일찍 여의
었으니 [군량골 시운(時雲)생원(生員)부터의 계대(系代)---아버지의 고조(高祖)] 제례
(祭禮)를 존중하던 시대....어떻게 하랴?'''''아버지가 맡아 지내오던 맞집 제사를 큰형
이 맡도록 했다. 그러나 제례를 위한 형식적인 것일 뿐, 실지는 큰형이 아버지를 모시
고 있는터.....그래서 "내 3년상은 큰 아들이 치루고 기제(忌祭)는 두째가 지내라"고
하셨다.
1950년1월, 우리 형제는 큰형을 중심으로 엄동설한 음력 섣달 , 그 추위속에 온 동내
가 모여서 9일장(日葬)을 지냈으니 물심양면으로 많이 어려웠다. 3일장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그때 지사(地師)가 후에 전국에 이름이 알려진 "지창룡"씨였다. 우리집 아랫채에 같이
살았던 연고(緣故)로 오랜 답산(踏山)끝에 길지(吉地)라 하여 찾아준 곳이 전자리의
산소다. 그 터를 칭하는 글귀를 큰형이 늘 외우고 계셨는데 "만마강이 자천지 (萬馬降
而 刺天地)" 뒷 귀절은 아쉽게도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 장례가 끝난후 모두 "가정과 문중에 큰 대들보가 무너진듯한 비통속에 상을
치루었다"고 입을 모았다. 아버지 친구분들은 "부랭이 삽작--사립문--이 무너졌다.
고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초상(初喪)을 치룬것이고 내년엔 소상(小喪), 그후년엔 대상(大喪)이
남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대상을 치룰 다음해가 환갑년이 되고 환갑전에 돌아
가신 안타깝고 비통한 자식들의 정성과 눈물을 담아 생신일(生辰日)인 음력 8월24일
갑사도 지냈다.
초상을 치룬후에는 사랑방에 빈소(殯所)를 차리고 조석(朝夕)으로 보통 식사처럼 상식
을 올렸으며 또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朔望)이라고 제수를 장만하여 제(祭)를 올렸다.
또 생시처럼 출입을 아뢰고 다녔었다.
농가에서 바쁠때는 상주가 모두 건사할 수 없어 안동 장조카가 상식을 많이 올렸었다.
대상까지 2년을 생시와 같이 집에서 모신것이니 지금 삼우(三虞)제를 끝으로 탈상하는
새상과는 비교도 안되는 세상을 우리 세대는 살아왔다.
그리고 아버지 유언대로 큰아들이 3년상을 정성껏 치루셨고 큰형수님은 아버지 생시
와 같이 조석으로 진지상을 차려 빈소에 올렸었다. 3년상 까지.........
아버지를 여읜 그 황망한 와중에서 터진 6,25의 난리도 함께 묶여 세월은 흘러갔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사(家族史)로 볼때 개척조(開拓祖)같은 대전환의 새로운 출발점이
었고 변혁을 이룰 큰 획(劃)을 그으셨지만 그 공덕을 기리는 영모비(永慕碑)는 50년후인
2001년에 세웠다. 비 후면에 각석한 자손록에는 친 외손까지 160여명의 이름이 올라있다.
이제 자손에 대한 소망은 이루어졌으니 지하에서도 만족하실 것이라고 믿어 본다.
#참고 ---시운(時雲, 成均生員-군량곡) 上下系代(상하계대)와 내력(來歷)
선조로 부터 8세 (판관공-判官公-4형제중 두째-)에 이르러 판관공파(判官公派)로 분파
했고, 9세 승지공(承旨公)-영남으로 안동(安東)에 정착--아들 3형제중 우리는 막내 인
10세 계파(季派)-참판공(參判公)의 종손으로 내려 오다가 13세에서 두째집 자손으로
이 고을에 정착
*13세 지무(枝茂)이하 5대(代)가 모두 독자(獨子)였고 문중산소(入鄕祖墓域)에 같이
모셨다. 13세--18세까지 6위(位)
19세에 와서 시도(時道), 시우(時雨), 시운(時雲) 3형제중 우리는 시운(時雲)--군량골.
成均生員--할아버지의 직계손이다.
*직계손으로 23세까지 내려 왔으나 그 이하는 후사(後嗣)를 잇지 못했다.
*직계인 백부가계(伯父家系)가 끊어지자 아버지는 종형 경양(敬陽)을 대신해 고조
(高祖)-시운(時雲) 성균생원 까지 4대(代) 봉사(奉祀)와 종형의 제사까지 모실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아버지의 부모까지 합치면 기제(忌祭)는 11회, ......명절때는 술잔을 올릴 자리
가 모자랐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명절 제사외에 기제사가 11회.....집에서 제사가 끝나면 제사 음
식을 (신짓밥이라고 했다) 집안 어른에게 야밤에 배달해 드리고나야 며느리들의 일이
마무리 되었으니 그 고생이 이만지만이 아니었다.
*모진 고생의 세월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모두 고인이 되셨고 그 얼굴들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