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영모비 발의와 경신보(庚申譜)

bsk5865 2021. 10. 8. 22:16

영모비 발의와 경신보(庚申譜)

 

우리 남매의 이야기에 앞서 너무나 애석하게 떠나신 아버지를 추모하는 마음을

새겨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우리 형제는 세상 인심이 각박하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각기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위한 노력에 파묻혀 주위를 돌아 볼 여유도 없는 힘 드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한 삶 가운데서도 아버지를 직접 모신 형들이 갖고 계셨던 아버지 생각은 그

때 철부지로 컸던 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공부하고 싶은 만큼의 뒷바라지가 못되는

현실을 원망했고 자력으로 입지(立志)해 보려는 용기는 없었다. 수동적 소극적이고

시야도 좁은 못난 성장기를 보냈다.

그후 남과 같이 평범하게 살다가 수렁을 만나 객지로 나갔고....겨우 그 수렁을 벗고

평범한 길로 나와 보니 내 인생은 벌써 황혼....... 

이런 인생 역정을 밟느라고 형님과 같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못 가졌음이

부끄러운 고백이다.  고향 일은 형에게 의지한 면도 있었지만.......

 

큰형님은 아버지를 평생 뫼시고 사셨고 형제중 맏이로서 생각의 폭도 넓으셨다.

살다 가신 그 자취를 남겨 후손들이 본 받을 거울로 삼겠다는 깊은 사려의 발로로

"영모비(永慕碑)"를 세우자고 결심하시고 이를 발의 하셨다.

간접적인 영향은 상운 사돈(찬주 외조부)의 묘지에 세운 비문을 보시고 받은신것

같기도 하다.

 

지난 어느날 나와  만나 그 비문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도 자손들이 넉넉하게

산재해 있으니 십시일반으로 모금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다.

그때 본 사돈의 비문 사본의 행방은 모르겠으나 그로  부터 나는 우선 비문 부터

만들어 보자고 고민하기 시작했었다.

 

그 후 무심한 세월은 많이  흘러 우리 가족의 변고가 일어났었다.

큰형님이 2000년 6월에 돌아가시고 그 해 9월(음력)에 이를 공론화 했으니 .......

인생사란 이렇게 매정한 것이다.  좀 일찍 서둘러서 생전에 이 대역사(大役事)의

기쁨을 함게 나누셨다면 얼마나 기뻐 하셨을까?

서두르지 못한 내 잘못이 크기에 더욱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다.

 

큰형님은 평소에 돌아가신 아버지 처럼 온 집안의 길흉사를 집례지도 하시고

예법을 깨우치며 소홀함이 없도록 하셨다. 일이 생기면 으레이 형님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그것이 내력인것 처럼 여겼다. 문중에 이런 구심점이 있다는 것은

질서 화합 나아가 우리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었다.

 

우리 족보인 제7차 경신보(庚申譜)__1980刊 大同譜__간행때는 우리 문중 수단요원

(修單要員)으로 영주 보소(譜所)에 내왕 하시면서  어려운 일을 하셨다.

그 때 영천집이 누보(漏譜)되었다가 다시 수보(修譜)하는데 형님의 공이 크셨다.

 

우리 집 내력사에 대해 많이 연구하시고 자료도 모으시고 같이 의견도 나누고 했

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는 아무도 없다.

나눈 이야기들은 우리 집 내력사(來歷史)에 많이 반영됐지만 지금 세대는 별 관심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 자손중에 우리 소종중(小宗中)일이나  입향이후(入鄕以後)의

내력을 탐문소명코자 한다면 남겨둔 문헌(文獻)이나 자료가 거의 없어 그것이 미안

하고 또 두렵기도 하다.

 

온 집안의 기둥이셨던 형 두분을 여읜 후 어려운 일에 부딛칠때 마다 형이 그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