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사방사업의 십장(什長)

bsk5865 2021. 10. 9. 14:37

사방사업의 십장(什長)

 

사방사업(砂防事業)이란 글자 그대로 민둥산이 많았던 시절, 우선 산사태를

막고 조림(造林)하는 사업을 말한다.

내가 학교 다닐때 일본인 선생이 자기나라의 푸른 산과 우리의 민둥산을  비

교하면서 은근히 자기들의 우월성을 내비취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 원인은 난방

문제가 서로 다른데 기인하며 우리는 온돌이기에.......

 

작은 형님은 훨씬 젊었던 시절, 한 때 사방사업에 나가기도 했었다.

이 사업은 경사진 민둥산에 계단을 만들어 사태를 막고 나무나 잔디를 심었고

계단이 필요 없는 곳에는  직접 나무를 심었었다. 수종도 여러가지로 오리나무,

아카시아, 소나무, 참나무........아카시아는 번식력도 강하고 꽃도 향기롭고 꿀벌의

밀원이 되기도 하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다른 수종이 살 수 없는 아카시아 천지가

되는 결점도 있다.  싸리나무는 직접 씨를 뿌리기도 했다.

 

이런 일을 부역(夫役__의무적으로 무상으로 일 하는것)으로도 하고 임금을 주고도

했었다. 그때 사방사업 부역고지서가 나오면 꼬박꼬박 그 부역일수 대로 무급출역

(無給出役)을 의무적으로 이행하는 충직한 백성이었다.

 

출역(出役)한 인부들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은 사람을 "십장(什長)"이라고 불렀었다.

어느 때 부터인지 이 일을 형님이 맡아 보게 됐다.

이것도 사방사업에 오랜 경험으로 체득(體得)한 능력을 인정 받아야 가능했던 일이고

인간관계도 무시못할 만큼 작용했으리라....믿고 맡길 수 있는 인품이 있어야 하니까...

 

관리(官吏)도 없고 관변단체의 지도원 하나 없던 고적한 마을....사방사업 현장 감독도

그 시대 배경으로 봐서 괜찮은 자리였을까.......

 

지까다비(地下足袋)라고 하는 발등 까지 싸는 천으로 된 신을 신었고 종아리엔 "게도루"

라고 불렀던 각반(脚絆)이란 천을 두르고, 도시락 허리에 차고 새벽밥 먹고 집 떠나던

모습을 아직 기억한다...돈 벌로 가는 장한 모습으로..

 

그 십장의 위세도 만만치 않았다. 일하러 나온 인부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었지만 그렇

다고 누구나 넘볼 수 는 없었다.

일거리가 귀했던 시절이기에 또 사업의 질과 양에 따라 인원의 수급 조절도 해야 하니까..

이는 농한기  농가의 일용 돈을 버는 유일한 소득원이 돼기도 했었고 타처 사람들이 와도

희망 인부가 많아 수용 못하느 경우가 많았었다. 농번기에 들어서면 품을 팔 수도 있고

품아시도 하니까....

그 시대 우리들의 주업은 농사였고 바라는 건 풍년!   이 사방사업은 늦은 봄까지는 농삿

일과 중복되는 면도 있지만 그 이후는 사업시기도 아니었다.

 

우리 주거생활에 필요한 땔감은 산에 의존했으니 일정때 부터 해마다 나무심기는 이어

왔으나 그 성과는 미미했었다. 도람벌(盜濫伐)을 막기 위한 대책(법적 조치)도 엄하게

집행했으나 온돌외에 월동방법이 없었으니 당할 재주가 없었다.

 

5,16이후에야 새마을 운동과 함께 전개된 조림사업으로 산림록화도 성공했다.

원인이야 땔감이 석탄으로 까스로 기름으로 바뀐것이 주인(主因)이지만.....

 

공중에서 촬영한 한반도의 모습은 낮에는 욱어진 녹색이 비교되고 밤에는 전기불이

대조(對照)를 이루는 것으로 남북분단의 현실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