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지방유지, 작은 사고, 전화(電化)사업

bsk5865 2021. 10. 9. 21:06

지방유지, 작은 사고, 전화(電化)사업

 

작은 형님은 그 동안 인간관계가 좋았고 교류의 폭도 넓어져 봉성면을

움직이는 인물군(人物群)에 합류 지방의 유지로서 그 자리가 굳혀졌다.

 

 반면 그만큼 인사 치례를 해야할 곳이 많아 졌고 처신에도 신중을 기하게 됐다.

대중의 지도급 인사가 된다는 것은 비례해서 사회적 도덕적 책임도 다해야 된다

는 뜻이다. 그리고 좋든 나쁘든 사회적 감투도 받아 써야 했다.

 

동(洞) 산림계를 위시하여 여러 직함이 따랐고 그때 봉성중학교 설립 기성회 임

원도 맡았다. 봉성면을 막라한 지도급 인사의 친목 모임에도 들어 갔다.

이러한 계층과의 교분을 쌓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도 있어야 하기에 일용잡비의

조달에도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시운(時運)도 좋아 맞아 떨어져 그런지 그 때 나도 힘을 조금 보탤 수 있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친구의 도음을 받아서 조그만한 이권(利權)이 딸린 일거리를

얻어 드렸다.

아직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기 전이기에 정부에서는 보리와 쌀을 아예 혼합해서

공급 했다. 이것을 "정부미"라고 불렀고 이를 판메 하는곳을 지정해 주었었다.

이 정부미 취급 대행업을 맡아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그만한 건설공사도 했었다. 그때 노임은 밀가루를 주기도...

그  다음으로 또 발이 넓어져 농산물 보관창고도 맡아 관리 했었다. 당연히 창고장

이란 직함도 붙었고....

 

이제 매일 수입도 조금식 생기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생활에도 좀 여유가 생겨

느긋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비록 고향에 계시는 시간 보다 일이 있어 나가 있

는 시간이 길었지만...

 

사람이 살아 가는데 고정 수입이 있다는 것은 믿음직 스러운 일이 아닌가! 든든

하고 일상이 즐거워지는 것이 물질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다.

이렇게 조금 편해진 세월이 얼마나 계속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한 시기에 어느 봉성장날   큰형님, 작은 형님, 세째 형님  이렇게 위로 4형제

가 만나  불고기집 뒷방에서 점심을 같이 한 일이 있었다.

돼지고기가 보편적인 식단(食單)이었으나 큰형님의 혈압 관리상  소고기로 바꿨다.

아마 그때 형제들 끼리 오붓한 자리에서 편하게 양것 불고기를 즐긴 행복한 시간이

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작은 형님이 점심값을 낸다고 주인하고 이야기가 된듯 했으나 내가 현금으로

지불하고 봉화로 돌아왔었다.

이 날 만족해 하시던 형들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작은 사고(事故)]

 

그런 흐뭇한 일이 있었던 며칠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작은 형님이 찾아 오셨

다. 들고 오신 보자기를 풀어  신문지에 싼 지폐뭉치 (그땐 고액권이 없었다)를 내놓으

면서 용건을 말씀하셨다.

 

관리하던 창고(倉庫)에 불시 재고조사가  있었는데 일이 터졌으니 경찰서로 사건이 넘

어가기 전에 빨리 수습해 달라는 요지를 다급을 강조하면서 말씀 하셨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짐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때 시중의 금리(金利)는 비싸고 급전(急錢)이 필요하면 보관중인 물건을 내다 팔고 후

에 채워 놓는다는 식으로 이용한것 같다.

 

형이 그런 급전이 필요한건 아닐 터이고 필시 남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편의를 봐 주시

다가 또 당한것  같다.

 

강직하셨던 아버지 그늘에서 자란 형들은 세상을 기만하면서 살지는 않으셨기에 형에게

물어 봤다.  누가 개입된 일이냐고?

그건 설명하기 거북하신지 대답해 주시지 않고  전사(前事)에도 이런 일이 있어 왔다고

잘못된 관행(慣行)인것 처럼 말씀하시면서 뒷일을 감당 못해 초조한 빛을 보이면서 한숨

만 쉬고 계셨다.

 

어둡고 어리섞었던 그 시대에 장기간  보관만 하고 있을 물건을 잠시만 이용 한다는

그릇된 사고 방식이 오히려 힘을 얻었던 시대상(時代相)이었다고나 할까!...

 

관계기관에 전화부터 해 봤다. 전화로 이야기 한다고 불쾌하게 여길 사이는 아니기에

.... 그런 일 있다고 말하면서 서류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그 사람들도 좁은 바닥에 그 사건 피의자의 배경쯤이야 기본으로  알아 보는것, 내 전

화가 올것 까지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건화 됐을 때의 뒷일 까지도.....

 

사건의 내용과 관계기관의 진행상황까지 파악한 뒤 형님을 안심시키고 빨리 재고량

채워 놓으라는 부탁과 함께 돈뭉치도 돌려보냈다.

사고 수습을 돈으로 해결할 수 도 있었던 시대였지만  그렇다고 돈을 내놓을 수도

없는 처지에 있었으니까''''

 

시간이 조금 흐른뒤 그 책임자를 만난 자리에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예기 했다.

본인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 그렇지만 선량한 창고 관리자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는 것, 겯들여 그 분이 내 친형이라는 것, 이미 재고량은 원상 회복 했다는 것, 경찰

문제 까지 확대 되면 내 체면은 또 뭐가 되느냐? 고 해명 겸해서 간청을 했다.

 

또 이 문제가 경찰 정보로  들어가 문제가 될 수 도 있어 그 쪽에도 신경을 썼다.

알고도 모른체 해 주었는지는 모르나 잠잠했었다. 고마운 일이였다.

 

이렇게 그 사건은 수습이 됐다.

그 기관의 책임자와는 전근이 될때 까지 자주 만나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 하다가 헤어졌다.

지금쯤은 뭘 하고 있을까? 세상에 아직 남아 있을까....

떠나고 한두번 전화는 있었으나 새임지에 정 붙히느라고 전임지의 정은 점차로

빛을 잃어 갔다.

이것이 전근이 있는 공무원들의 인지상정인지는 모른다.

 

[전화 (電化)사업]

 

내가 자란 농촌은 옛부터 호롱불 시대를 살아 왔다

밤이 되면 호롱 심지에 불을 붙히는 일도 고역이었다. 불이 붙어 있는 숯을 호롱

심지에 대고 입으로 불어서 불을 붙혔다.

태우는 연료는 석유이고 등유(燈油)라고도 했다 .집집 마다 맥주병이 석유병으로

쓰였고 장터에서 사서 지게에 메달아 가져 왔었다. 이러한 호롱불도 아껴야 했기에

마음껏 못 써 본 추억들이 쌓인 세월을 살아 왔다.

 

우리 나라 전기는 해방후에도 얼마동안은 압록강 수전(水電)을 썼는데 북한이 단전

해 버렸고 우리의 요청도 들어 주지 않았다.

 

5,16 이후 산업화 정책의 필수적인 전력(電力)생산에 힘 써 왔었고 전력의 여유가 생

겨 역사적인 농어촌 저화(電化)사업도 시작 했었다.

70년대에 와서는 획기적인 원전(原電)도 가동 되어 전력생산에 장족의 발전을 가져

왔다.

 

제3공화국 시절 봉성 전기 점등식에 참석했는데 그리던 전기를 주야로 밝힐 수 있는

감격을 같이 나눈 일이 있다. 이제는 농업용 전기는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고 있고

이 전기가 우리 생활의 질을 급상승 시켜 농촌의 문화가 평준화된 세상에서 살고있다.

 

사족(蛇足)이 너무 길었으나 우리 고향에도 차례는 조금 늦었지만 형님의 주동으로

한전과 제휴하여 이 사업이 시작됐었다.

마을 입구 부터 전주(電柱)가 세워지고 집집 마다 전기 가설공사가 시작 됐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뭣으로 표현하랴!

마을의 모습도 일신 했고 첫 점등에 호롱불에 익숙했던 어른들인 만큼 조금은 어색

했으리라...........

이렇게 형이 주도한 전화사업의 결과는 길고 길었던 농촌의 호롱불 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적 새시대가 열리게 했다.

 

이어서 추진한 보편화된 저렴한 가격의 전화(電話)가설 사업도 활기를 띄고 집집마다

신청을 했기에 비록 산촌이지만 전화 없는 집이 없어졌다.

이로써 시외전화 때문에 시내 우체국까지 가는 번거로움도 덜었다.

 

살아 생전에 고향을 위하는 일이나 문중일이나 항상 앞장 서 힘을 쏟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라도 살아 있는 동안 마을 일에 앞장 서셨던 형들을 기억 해 주지 않으면 형들은

얼마나 서운 해 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