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손(祖孫)의 정(情)을 체험(體驗)
조손(祖孫)의 정(情)을 체험(體驗)
핵가족화(核家族化)로 한집에 3대(代)가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옛날에나 있었던 일이
됐다. 그런 까닭으로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공간에서 산다는 것도 희귀한 일로
치부하는 세상이 된지도 오래 되었다.
내게는 이런 희귀한 일을 체험해 본 행운이 있었다.
대구에 와서 고위직 손님을 상대로 하숙업을 하며 생활 할 때였다.
맏딸은 그때 부산으로 서울로 직장 때문에 옮겨 다니며 살때 였고......
두째 아이가 태어나니 손도 모자라고 때마침 건강도 안좋아 잠시 손녀 "혜정"이가 대구
서 같이 지내게 됐었다.
처음엔 어린것이 떨어져 있을까?....하고 걱정했으나 원래 착한 아이였기에 적응이 빨라
마음을 놓았었다.
어린 것을 업고 밥짓는 안사람의 수고로움이야 컸지만 말을 배우고 재롱이 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손자와의 정과 사랑을 경험 했었다.
한가한 시간엔 "혜정"이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하나씩 배와가는 서투른 말의 흉내와
그 몸짓에 웃음의 꽃을 피우게 해주었고, 시장 가는 할머니를 꼭 따라 가겠다고 어린
아이답게 고집도 부렸었다.
제 생각을 서툰 말과 동작을 통해 "우__ㅅ차"하고 손으로 위를 가르키면 업고 옥상
(屋上)에 올라가 보자는 뜻이었고, "앙꽁" 하면 걸어 가기가 싫으니 업든지 안고 가자는
뜻이었다. 그러한 행동이 귀엽기만 했고 그대로 따라 주면 좋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좋았었다.
좀더 커서는 퇴근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할아버지"하고 동동 걸음으로 달려와
안기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귀엽고 즐거운 추억이다.
그 때 나도 한가한 시간이 많아 같이 놀아 주고 업어 주었고 천성이 착했던 혜정이의 어린
체온은 아직 잊을 수 없다.
한 집에 살면서 조손(祖孫)의 정이란 이런 것이라고 소중한 인생의 즐거음을 겪어 보게 해
주었었다. 고마운 일이다.
내 환갑 잔치땐 한복 입고 날엽한 춤솜씨를 보여 주위를 즐겁게 했었던 그 춤사위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커가는 과정에서는 외부 환경 변화에 적응이 빠르고 외향적(外向的), 활동적(活動的), 사교적
(社交的) 측면이 돋보였었다.
외국에 나가서는 현지에서 영어를 익혀 바른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
됐다.
이는 직장생활이나 국제무대에서의 활동에 장점이 될수도 있고 나의 자산이기도 하다.
세계 어느 곳에 갖다 놓아도 제 할일 다 할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와 주었으면 좋겠다.
출가해서 예쁜 딸을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나는 증손녀 까지 본 상할아버지가 됐다.
비록 노환(老患)에 시달리는 뒷방 늙은이로 추락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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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後記)
고향으로 돌아 갈 꿈이 깨지고 다시 대구로 영영 돌아와 우울했던 2008년에 날아갈 듯이
기뻤던 날도 있었다.
그것은 첫 손녀 혜정이가 착한 사람 만나 그해 10월11일 좋은 날에 국제공항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날이다. 화려했던 그날의 그 모습! 지금 생각해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외손서(外孫婿)가 된 허서방은 이날 이후로 우리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삶의 고락을 함께하는
귀한 존재가 됐다.
가족 모임에 꼭 참석하는 것은 물론 예의 범절이 몸에 베어 손색이 없어 반가왔다.
친인척 관계도 잘 알고 그 처신도 반듯했다.
착실하고 때로는 낮출줄도 알며 친화력이 돋보이는 자상한 젊은이를 우리 집 사위로 맞았으니
가족의 복이요, 혜정이를 아꼈던 나에겐 더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송비와 셋이 단란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자랑하고 칭찬하고 싶은 것은 일찍 서울에 내집을 마련했고 안정된 직장이 있으니
선택받은 서울 시민이 된것이다. 각박한 서울에서 이것은 누구나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는 곧 내 삶에 영광된 일이요 큰 축복이다.
앞으로 그 축복은 길이 이어질 것이다. 대견하다..........2019,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