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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Symphonic poem "Korea"

bsk5865 2009. 9. 21. 20:03
   
  안익태 (安益泰ㆍ1905년~1965년)





[백과사전] - 안익태 [安益泰, 1906.12.5~1965.9.16]  
한국의 작곡가·지휘자.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평양
주요수상  문화포상(1957), 문화훈장 대통령장(1965)
주요작품  《강천성악(降天聖樂)》 《한국환상곡》 《애국선열추도곡》

평양(平壤) 출생.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퇴학당한 뒤 일본에 건너가 중학을 마치고 구니타치[國立]음악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배웠다.1932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는 한편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제1첼로 주자로 활약하였다. 그 무렵 스토코프스키와 교분을 맺었으며 필라델피아의 카네기리사이틀홀 등에서 독주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1934년 헝가리로 건너가 도야니에게 작곡을 배우며 민족주의정신과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빈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주로 지휘법을 사사하고 1936년에는 몇년 전 미국에서부터 착상해 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

1940년까지 슈트라우스의 보조지휘자로 있다가 그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독자적 지휘활동을 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에스파냐 여인과 결혼, 에스파냐 국적을 얻고 마드리드 마욜카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영국·이탈리아·미국 등의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하였다.1957년 귀국하여 자작곡 《강천성악(降天聖樂)》 《한국환상곡》 등을 지휘하고 61년 다시 귀국하여 국제음악제를 개최토록 하였으며 1963년까지 3회에 걸쳐 주관하였다. 후기낭만파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자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작품을 즐겨 지휘했다.1965년 에스파냐에서 병사. 1957년 문화포상을 받았으며 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에 《애국선열추도곡》 등 다수가 있다.




걸어오신 길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선생은 1906년 12월 5일 여관을 경영하는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안선생은 6세 때에 동네의 예배당에서 흘러 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리어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특히 교회에서 풍금(올겐)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안선생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 중요한 동기중의 하나였다.또 하나의 동기는 이듬해에 큰형이 동경에서 사다준 바이올린 이었는데, 이 바이올린은 그로 하여금 더욱 음악에 매혹되게 했을 뿐 아니라 6개월을 연습한 후에는 찬송가를 연주할 수 있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취주악대에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매료되어 아버지를 졸라 트럼펫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후부터는 학예회때 마다 으례히 한손에는 바이올린을 또 한손에는 트럼펫을 들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1918년 숭실중학에 입학하자 교장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곧 바로 관현악단에 입단 시켰고 2학년이 되어서는 음악부장이 되어 매주 한번씩은 집에 있는 축음기를 학교로 가져가 음악감상회를 여는 등 그의 음악활동은 열도를 더해갔다. 이러한 안선생의 음악적 재능을 본 형님은 이번에는 '첼로'를 사다주어 여름방학때에는 서울로 올라와 카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의 주법을 익혀 첼로까지 연주하게 되자 그의 인기는 솟을 대로 솟아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가를 연주하는 등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안선생은 어릴때부터 자존심과 정의감이 강해 이러한 그의 의지는 숭실학교에서 당시 친일교사를 배척하는 주동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학처분을 받게되자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선생은 왜경의 쫓김을 받게되었고 결국 당시 숭실학교 교장이었던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일단 위기를 넘긴 후 다시 박사의 주선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안선생이 영국의 민요 "올드랭사인"의 곡조에 부쳐 노래한 애국가를 처음 접한 것이 바로 3.1운동 때였고, 안선생은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이때의 감동은 후일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에 도착한 안선생은 형님과 함께 기거하면서 중학교에 편입하고자 했으나 요주의 인물이란 딱지가 붙은 안선생을 받아주는 곳이 없어 결국 사설강습소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1년에야 동경 세이소꾸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이 되었다.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동경에서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작크 . 티보'의 연주회가 열렸으나 돈이 없는 안선생은 연주회가 끝나기까지 극장 밖에서 서성거리다 연주회가 끝난 후 나오는 사람들에게 연주광경을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 「파리」에서는 안선생의 지휘로 '티보'와 협연무대를 가졌으니 안선생은 그 당시 동경 연주를 회상하면서'티보'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중학교5학년을 마친 안선생은 동경 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음악공부에 전념케 되었는데 동창생으로는 김원복, 홍성유 등이 있었다.음악학교 재학중에는 지도교수의 주선으로 일본 가지에서 첼로 독주회를 가졌고, 이 독주회는 그로 하여금 첼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훌륭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갖게 했다.음악학교 예과1학년 여름방학에는 고국에 돌아와 평양을 비롯한 전국 가지에서 독주회를 개최했고, 이 독주회를 통해 그는 당시 서울과 평양에서 Y.M.C.A 총무로 활약하던 이상재, 조만식 선생과 알게 되어 이들의 뜨거운 애국심은 일생을 두고 안선생의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었다.1928년 본과 2학년이 될 무렵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학비를 염출할 길이 없게 되자 밤이면 동경회관이라는 양식집에 나가 '첼로'를 연주하여 돈을 버는 생활을 1년 동안 계속했다.


안선생은 그후 30년이 지나 귀빈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동경회관의 만찬회에 참석했을 때 만감에 사로 잡혔고 더욱이 30년전 같이 연주하던 바이올리니스트가 백발이 성성한 채 아직도 연주하는 것을 보자 말없이 300불을 손에 쥐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인간적 모습을 느끼게 하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그가 국립음악학교 본과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도 수업료가 밀려 졸업이 보류되었으나 뒤늦게 선교사의 도움으로 수업료를 납부하여 1인 후기 졸업식을 거행했고, 졸업후 가지 독주회는 악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당시 안선생이 연주한 곡은 '하이든'의 협주곡과 'R.시트라우스'의 소나타였는데 장래가 촉망되는 첼로의 귀재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안선생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리던 조국은 일제의 학정이 점점 심해져 숨쉴 곳도 없었고 평양에서 가지려던 독주회마저도 왜경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가자 1930년 조국이 독립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미국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이로부터 안선생은 조국을 잃은 보헤미안이 되었고 실제로 1961년 국제음악제를 주도한 후 자신에 관한 모함을 듣고는 "세계는 나를 환영하는데 왜 내 조국에는 내가 설땅이 없단 말인가 애국가를 잘못 작곡해서인가?"하고 한탄하기도 했다.안선생은 미국으로의 유학길에 오르면서 동경음악학교 재학생들과 송별연을 가지면서 나는 반드시 런던교향악단을 지휘하고야 말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때 일본인 친우들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기도 했으나 실로 안선생은 런던교향악단을 비롯해서 세계적인 교향악단들을 모두 정복했으니 그의 음악적 의지는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안선생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를 먼저 찾았고 일제의 억압속에 신음하고 있는 조국을 멀리하고 이역땅에 와 국기 게양대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처음 보았을 때 실로 벅차오르는 감격은 말을 잊게 했다.태극에의 감격은 애국가를 생각케 했고 언젠가는 애국가를 작곡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다시 한번 가져보는 것이었다.
특히 한인교회에서 예배가 끝난 후에 부르는 애국가를 듣고 나서 애국가의 가사를 잘 베껴서 소중히 보관한 후 「신시내티」로 향했다.

「신시내티」에 도착한 안선생은 음악대학에 입학해서 더욱 깊이있는 음악예술에 몰입하게 되었고 2학년이 되어서는 신시내티 시립관현악단의 첼로 주자로 입단하는 한편, 미국에서 처음으로 순회 독주회를 개최, 큰 성공을 걷우기도 했다.당시 '워싱턴 포스트지'의 평을 보면 "안씨가 연주한 '첼로'의 'D단조협주곡'은 놀랄만한 가교와 세련된 소리를 가지고 청중을 도취시켰다"라고 썼다. 그러나 성공적인 순회연주를 마치면서도 안선생은 아무래도 '첼로'로 대성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던지 선배인 박윤정씨와 의논 끝에 그의 도움으로 이번에는 템플대학교의 단과대학인 필라델피아음악대학으로 편입해서 작곡과 지휘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가 신시내티를 떠나던 1932년 신시내티교향악단은 고별 야외연주회를 열었고 이 연주회에서 안선생은 '랄로'의 첼로협주곡을 협연했다. 필라델피아 음대재학중에는 특히 저 유명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연주를 통해 교향악의 진미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레오포드스토코브스키'의 지도하에 연습단원으로 입단하기도 했다. 이처럼 지휘공부에 박차를 가하면서 또 다시 작곡 공부를 위해 「커티스」음악 학교에 적을 두게 되었고 시카고 교향악단을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끌어올린 불멸의 지휘자 '프리곤 라이어'로부터 작곡을 사사받게 되었다.
이 두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를 완전한 음악적 토대위에 올려 놓았고 훗날 그의 음악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1935년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한 안선생은 계속해서 창작에 힘을 썼다. 하숙비가 없어 하숙집에서 쫓겨나면서도 뉴욕교향악단이 주최하는 작곡 콩쿠르에 응모하기 위한 '한국환상곡'의 작곡에 착수 했다. 한국환상곡'은 후에 애국가의 선율에 합창을 붙여 마지막 악장에 삽입했고 동양적인 신비와 우리 고유의 가락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세계 도처에서 연주되었고 한국의 얼을 심어준 명곡이 되었다.


어쨌든 콩쿠르에 참가해서 이 곡이 카네기홀에서 연주되던 날 그는 설레이는 마음과 부픈 가슴을 안고 지휘대에 서서 힘껏 손을 흔들었으나 한국인이라고 업신여겼던지 혹은 미국인을 콩쿠르에 입상시키고 싶었던지 단원들은 불성실한 연주를 했고 참다 못한 안선생은 연주도중에 퇴장하고 말았다.비록 정식 연주회가 아닌 콩쿠르이긴 하나 안선생의 예술적 양심은 참을 수가 없었고 이러한 그의 투철한 예술적 사고는 오히려 그로 하여금 위대한 음악인이 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한국환상곡'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성장했고 1939년부터 48년 사이에만도 15회 이상의 연주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곡에 대한 그의 애착을 짐작할 만 하다. 미국의 악단에 실망한 안선생은 고전음악의 본 고장인 구라파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 결국은 1936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안선생은 당시 히틀러치하의 독일에서 일본의 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자 불현듯 조국에 대한 애착심과 애국가를 작곡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6년전 미국에서 적어둔 가사를 펴놓고 감격속에서 애국가의 선율을 완성하니 1936년 6월은 우리의 '애국가'가 이역만리 독일에서 그것도 히틀러의 독재하에서 탄생한 역사적인 해가 되었다.

애국가를 작곡한 그해 8월 1일 베를린에서는 올림픽이 열렸다. 바로 이 올림픽에는 비록 일장기를 달기는 했지만 마라톤의 송기정 선수를 비롯한 7명의 한국선수가 참가하고 있었다.안선생은 입장식이 끝나자 이들을 찾아가 애국가의 악보를 내놓고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응원가라고 하며 함께 부르니 우리의 애국가가 불리워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애국가를 완성한 안선생은 사본을 만들어 미국에 있는 교민회에 보냈고 '한국환상곡' 의 종악장에 합창으로 애국가의 선율을 삽입해 드디어 '한국환상곡'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이후부터 그의 활동은 유럽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는데 당시의 스승으로는 지휘자 '바인가르트너'와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코다이'와 '도흐나니'등이 있다. 민족의 혼이 담긴 '한국환상곡'을 미국에서 연주하다 실패한 안선생은 드디어 1830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감격적인 초연을 하게 되었고, 더욱이 합창 부분의 가사를 한국말 그대로 부르게 했으니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후에도 계속되어 어디를 가나 합창은 반드시 한국말로 하도록 했던 것이다.


초연을 성공리에 끝낸 안선생은 당시 세계 최대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에게 사사 받기 위해 다시 독일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쉬트라우스'의 수제자가 되었다.이때부터 그는 '쉬트라우스'의 뒷받침으로 지휘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반드시 한국환상곡을 연주해 조국은 일제의 압제하에 있었으나 애국가는 계속해서 세계 도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안선생은 독일을 떠나 친지의 소개로 스페인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스페인에서 그곳 귀족의 딸인 롤리타양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안선생의 나이 41세였다.

가정을 꾸민 안선생은 안식처를 찾아 지중해의 연안에 있는 피서지 '마요르카'에 안착했고 '마요르카'에서는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선생을 맞아 마요르카 교향악단이 창단되니 1941년 창단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상임지휘자로 있었다.





1955년 조국을 떠난 지 25년만에 귀국해서 이박사 탄신 80주년 기념연주를 지휘했으나 그를 시기하는 일부 인사들의 모함으로 슬픈 가슴을 안고 한국을 떠났고 5.16 후인 1961년 다시 귀국 국제음악제를 창설 2회까지 지휘봉을 들기도 했다.그러나 말버릇처럼 조국에서 살겠다는 그의 염원도 아랑곳없이 조국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고 그가 설 땅은 도무지 이곳에 없었다.

1965년 안선생은 영국의 뉴필하모니아 교향악단을 지휘하기 위해 부인과 두딸을 데리고 영국에 건너가 자신의 작품인 「논개」와 「비창」교향곡을 성공리에 지휘했으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급히 마요르카로 돌아왔으나 병세는 끝내 호전되지 않아 1965년 9월 16일 3시 15분 쓸쓸히 눈을 감으니 그의 나이 59세였다.(이 글은 1991년8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인물로 지정하고 작성한 것으로 한상우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것임)



삶과 사상  

지휘자로서의 안익태

안익태 선생의 음악수업은 동경국립음악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함으로서 시작되었고 첼로 수업은 미국의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도 계속 되었다. 그러나 1932년 신시내티에서 가진 첼로 연주회를 끝으로 안선생은 아무래도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는데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나머지 지휘와 작곡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결국 1932년 필라델피아 음대로 옮긴 안선생은 관현악 전반에 걸쳐 연구하게 되었고 특히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공연은 그에게 있어서 산 교육이 되었다.

1935년 커디스음악원으로 옮긴 안선생은 이곳에서 세계적인 지휘자이며 작곡가이기도한 '프리츠ㆍ라이너'로부터 작곡과 지휘를 본격적으로 사사받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스토코브스키'의 권유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연습단원으로 입단 지휘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후 유럽으로 건너간 안선생은 1936년 뷔엔나에서 역시 세계적인 지휘자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문하에 들어가 베토벤의 교향곡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바인가르트너'를 떠난 안익태 선생은 다시 이번에는 헝가리로 건너가 리스트 음악원에 특별연구생으로 입교 '졸탄 코다이'로부터 작곡을, 그리고 '에르네스트 도나니' 교수로부터는 지휘법을 배우기에 이르렀다. 특히 '코다이'의 민족음악에 대한 열정은 안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후 안선생의 작품 속에서 풍겨 나오는 한국적 분위기도 바로 '코다이'의 민족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선생이 세계 유명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세상 떠나기까지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거나 또는 후원자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선은 그 자신이 결단을 내린 것과 같이 역시 그는 연주가보다는 지휘자로서의 능력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잠재 능력을 그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이며 스승들인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를 비롯해서 '프리츠 라이너', '바인가르트너', '코다이', '도나니' 그리고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를 통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안선생은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러한 기회는 1937년 3월에 찾아왔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미국에서 교분을 두텁게 했던 아일랜드의 작곡가 '오코넬'이 그를 초청함으로써「더블린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하게 되었고 이 지휘는 안선생이 지휘자로써 정식으로 '데뷔'하는 첫 무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휘자로서의 첫 무대에서 자신이 작곡한 '한국환상곡'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작곡가로서의 데뷔를 함께 이룬 셈인데 특히 후반부에 붙어있는 애국가의 합창 부분을 한국어 가사로 부르게 함으로써 당시 일제의 침략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피력할 수 있었다.비록 유럽 언저리에 붙어있는 작은 나라 아일랜드에서 데뷔 지휘를 하긴 했지만 이를 성공으로 이끈 안선생은 독일로 돌아와 다시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문하에 들어가 수제자가 되었고, '쉬트라우스'는 자신이 해야 할 객원 지휘를 안선생에게 맡기기 시작 그 첫 번 지휘가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지휘였다.

1938년 비창교향곡과 '쉬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정화를 레퍼토리로 한 부다페스트 국립교향악단 지휘는 또 다시 성공을 거두었고 '쉬트라우스'는 몸이 쇠잔해지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안선생을 대신 보내게 됨에 따라 안선생은 드디어 구라파에서 유명한 지휘자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로부터 1944년 스페인으로 피난하기까지 안선생이 지휘한 중요 교향악단을 살펴보면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을 비롯해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교향악단, 불가리아 국립교향악단, 로마교향악단, 벨그라드 라디오교향악단, 베르린필하모니교향악단, 바르셀로나교향악단, 마드리드 필하모니, 파리 프랑스라디오교향악단 등이 망라되어 있으며 1944년 이후부터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을 창단 그 상임지휘자로 있었다. 어쨌든 1959년 5월까지 안선생이 지휘한 횟수가 232회에 달하고 있어 그가 얼마나 바쁜 지휘자의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지휘자였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처럼 세계의 유명 교향악단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초청한 것을 보면 그가 확실히 불세출의 지휘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작곡가로서의 안익태

(한국환상곡을 중심으로)


한국환상곡 작품목록에도 있지만 작곡가로서의 안익태선생은 지휘자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에 비하면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우선 작품수로 보더라도 10곡이 채 안될 뿐 아니라 「애국가」를 제외하면 '한국환상곡'이 국내에서 연주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작곡가로서의 안익태를 논할 때는 역시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안선생은 역시 지휘자이지 전문 작곡가는 아니며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접근도 지휘자의 입장에서 시작되어야 하겠다.

다만 그가 남긴 몇 개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은 우리나라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남을 것이며 한국인이라면 이 두 작품에 대해 특별한 감동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특히 한국환상곡에 대한 안익태 선생의 열정은 대단하여 그가 지휘 할 때마다 가능한 한 이 곡을 무대에 올렸고 후반부에 애국가 부분을 꼭 한국어로 부르게 함으로써 이 곡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더욱이 1945년 해방되기전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과 울분은 한국환상곡을 통해 승화되었고, 그 자신도 이 곡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계속해서 수정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한국환상곡은 크게 나누어 네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처음 부분은 한국의 민족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이며, 두 번째는 일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담한 모습이고, 세 번째는 드디어 광복의 기쁨을 맛보는 애국가의 합창 부분,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6.25 동란으로 인한 처절한 동족간의 싸움을 묘사한 부문이라고 하겠다.작곡기법상의 문제에서 본다면 달리 할말이 있겠으나 안선생이 이 곡을 통해 나타내려고 정신적 의미에서 볼 때 한국환상곡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음으로 표현해 낸 장대한 민족 서사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음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울림은 우리나라의 탄생을 알리는 팡파르이며 이어서 '호른'의 평화로운 가락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모습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민족의 얼을 표출하고 있다.이를 받아 다시 '플륫'이 한국적 가락을 노래하면 이를 금관악기가받아 타령조로 변하며, 이는 농사를 천직으로 아는 우리의 농부들이 추수한 후 기쁨을 함께 나누는 흥겨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여기에서는 우리의 귀에 익은 도라지타령도 나타나 쉽게 음악속에 빠져들게 한다.그러나 이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 고유민요의 가락이 끊어지며 투쟁이 시작된다.

3.1운동이 표현될 때는 때로 애국가의 가락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계속되지 못한 채 끊어지며 암울한 일제시대의 시련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드디어 가락은 조용한 진혼곡으로 바뀌며 독립운동에 의해 희생된 선열들의 넋을 위로한다.그러나 어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이어 받은 우리민족은 다시 분열이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며 드디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이 부분에서 안익태 선생은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합창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의 애국가가 조를 달리하며 소리 높이 울려 퍼질 때 그 감격은 말할 수 없는 떨림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허지만 광복의 기쁨도 잠깐 또다시 한반도는 6.25동란으로 인한 전환에 휩싸이게 되고 선율은 또다시 슬픔의 덩이로 바뀐다.기쁨 후에는 슬픔이 있고 밤이 지나가면 낮이 온다는 말과 같이 역사는 계속해서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것인가 6.25 동란의 아픔도 과거의 것으로 묻히었고 드디어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깊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 하고 외치면서 만세 소리와 더불어 장엄하게 곡은 끝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한국환상곡은 안선생이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착상하기 시작했고 필라델피아 음악학교를 졸업할 때 1부가 완성되었지만 연주되지 못했고, 독일로 건너간 1936년 애국가를 작곡한 후 후반에 애국가를 합창으로 삽입한 후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된 것이다.

이 곡은 그의 스승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조언도 많이 포함되었고 해방되기까지는 합창부분까지만 연주되어 오다가 6.25 동란이 일어나자 다시 그 뒤에 전쟁 부분을 추가시켜 현재의 곡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한 이래 안선생은 1939년 로마교향악단 연주에서 역시 한국환상곡을 공연했고 같은 해에 벨그라드 라디오교향악단, 불가리아 필하모닉에서도 연주했는가하면 1940년에는 부다페스트 필하모니, 1941년에는 쥬리히와 하노버, 1942년에는 베를린필하모닉과 바르셀로나, 마드리드필하모닉, 1943년에는 다시 베를린필하모닉과 마드리드 심포니, 함부르크에서 다시 1944년에는 로마와 프랑스 파리 등에서 총 15회에 걸쳐 한국환상곡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교향서곡 강천성악과 논개)

안선생의 작품들 가운데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제외하면 관현악곡은 해방 후에 작곡된 것들이다.
그 중에서 강천성악은 1959년도 작품으로 '아악'에서 주제를 따왔지만 1961년에 작곡된 '논개'는 기법에서도 휠씬 짜임새가 있는 가운데 우리의 토속적인 민요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특히 교향서곡 '논개'는 안선생이 1964년 그의 모교인 동경국립음악대학 초청으로 일본에 같을 때, NHK 방송이 전국에 중계하는 동경 필하모니 연주회에서 첫곡으로 연주되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당시 이 문제를 가지고 NHK 관계자들은 상당히 고심했으나 결국은 안선생의 고집으로 연주되고야 말았다.


(애국가의 완성)

애국가라는 말은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라는 뜻이니 만큼 누구나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를 만들어 애국가라고 이름을 부치면 애국가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처음부터 국가가 아니었던 음악이 후에 국가가 된 예도 많은데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이예츠」도 그렇다. 지금 우리가 국가로 쓰고 있는 애국가도 사실은 왜정시대때 만들어진 약 20여종의 애국가 가운데 하나로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불리워지게 되었고 결국 그 중의 하나가 현재의 애국가로 쓰여지게 된 것이다.

초창기의 애국가들은 한 집단이 필요에 의해 가사를 만들어 함께 노래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워진 노래는 현재 영국 애국가 선율과 스코트랜드 민요인 「올드랭 사인」의 선율이었다.안선생이 처음 애국가를 접하게 된 것은 3.1운동 때였는데 애국가의 가사에 「올드랭 사인」의 선율을 부쳐 노래하는 것을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이 때의 감동이 후일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이때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안창호 선생으로 들었고 같은 안씨라는 점에서 더욱 애착을 가졌다고 했으나 현재의 연구결과로는 윤치호 선생의 작사설이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안선생은 그 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고 처음 찾아간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펄럭이는 태극기와 특히 예배가 끝난 후 모두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번 애국가를 작곡해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했던 것이다.이러한 결심을 전해들은 한인교회의 담임목사는 애국가의 4절까지가사를 적어 주고는 만년필까지 선물하면서 꼭 이 가사에 곡을 부쳐 주기를 당부했다.

애국가를 완성한 안익태 선생은 사본을 만들어 미국의 교민회로 보내어 동포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왜정하에 있던 고국에서는 마음대로 애국가를 부를 수 없어 광복후에도 국내에서는 올드랭 사인에 미루어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1948년 정식으로 정부가 출범하면서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기 시작했고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는 지금도 국가로 우리들 가슴속에 나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그런데 십여년전 음악계의 일각에서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불가리아의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결국 이 문제는 음악의 기법이라든가 또 당시 안선생이 아직 불가리아로 여행하기 이전에 이미 애국가가 작곡된 점등으로 보아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따지고 보면 국가란 음악적 완성도를 따지기 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감격속에 이를 부를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특히 잊을 수 없는 아픈 역사의 응어리를 안고 있는 우리의 애국가는 이제 영원히 태극기와 더불어 대한민국과 함께 살아 남으리라 믿는다.(이 글은 1991년8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인물로 지정하고 작성한 것으로 한상우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것임)


우리 음악계에 끼친 영향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국을 떠난 지 25년만에 한국을 찾아던 안익태선생은 그 후 1961년 제1회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기 위해 두 번째로 조국의 땅을 밟았고 그 후 3회까지 국제음악제는 계속되었다.안선생은 해방된 조국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빙 음악을 활성화시키고 바람직한 오케스트라 운동을 통해 음악의 생활화를 국민속에 심으려고 했다.그러나 포부는 대담성과 스스로 흥분감 속에서 이 일들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오랜 동안 외국생활에서 몸에 밴 서양적인 사고 방식과 무언가 국내 음악인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섭섭함들이 엇깔려 제4회 국제음악제는 무산되고 말았고 이 때에 안선생은 크게 실망한 나머지 세계가 나를 환영하는데 왜 조국엔 내가 설 땅이 없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뿐만 아니라 안선생은 필생의 역작으로 교향시 「계림」을 착상하고 이를 위해 실제로 경주와 해인사 등을 방문, 전 4악장으로 된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모두가 물거품처럼 살아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활약하던 안익태 선생이 조국의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하지 못하고 가신 점이다. 청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선생의 멋진 지휘를 좀 더 분명히 느끼고 싶은 마음 간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훌쩍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60을 마저 채우지도 못한 채 가버린 것이다.그는 비록 조국을 떠나 있었어도 자신이 지휘봉을 들 때마다 한국 환상곡을 연주 이 지구상에 분명히 한국이 있음을 밝혔고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말로 애국가를 소리 높여 외치도록 하고야 말았다.그가 이탈리아를 방문 다시 독재자 뭇솔리니의 치하에서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압력을 가해 안선생을 추방토록 했는가 하면, 그가 가는 곳마다 일제의 마수는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그를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생전에 그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에서의 생활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이역의 하늘 아래서 눈을 감긴 했어도 그의 예술적 유산들은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으며 이제는 국립묘지에 고이 안장되어 세상을 떠났을 망정 고국에 묻히었으니 영혼이나마 평안하기를 빌 따름이다.

한 많은 조국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얼, 그리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한민족의 힘찬 의지를 담아 작곡한 「한국환상곡」은 조국에 바치는 사랑과 충성의 표증이며, 스페인에 살면서도 끝까지 한국 국적을 고수한 투철한 한국 국민으로서의 신념은 우리민족 모두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이 글은 1991년8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인물로 지정하고 작성한 것으로 한상우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것임)



                가족소개  









                      애국가  

애국가의 내력

애국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를 뜻한다. 우리나라는 애국가에 달리 이름을 붙이지 않고 이를 국가로 사용하고 있다.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노래말과 곡조가 붙여져 나타난 것은 조선 말 개화기 이후부터이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여러 가지의 애국가 가사가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는데, 이 노래들을 어떤 곡조로 불렀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대한제국이 서구식 군악대을 조직해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라는 이름의 국가를 만들어 나라의 주요 행사에 사용했다는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오늘날 불리고 있는 애국가의 노래말은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7년을 전후하여 조국애와 충성심 그리고 자주 의식을 북돋우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여러 선각자의 손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내용을 담게 되었는데, 이 노래말에 붙여진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었다. 해외에서 활동중이던 안익태는 애국가에 남의 나라 곡을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35년에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곡을 애국가로 채택해사용했으나 이는 해외에서만 퍼져 나갔을 뿐, 국내에서는 광복 이후 정부 수립 무렵까지 여전히 스코틀랜드 민요에 맞춰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현재의 노래말과 함께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의 애국가가 정부의 공식 행사에 사용되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전국적으로 애창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해외에서도 이 애국가가 널리 전파되어 실질적인 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우리 겨례와 운명을 같이해 온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우리는 선조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새롭게 되새겨야 할 것이다.


애국가 제창 및 연주

- 애국가를 부를 때에는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애국가의 곡조에 다른 가사를 붙여 부르거나 곡조를 변경하여 불러서는 안된다.

- 주요 행사 등에서 애국가를 제창하는 경우에는 애국심과 국민적 단결심을 고취하는 의미에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4절까지 제창하여야 한다.

- 애국가는 모두 함께 부르는 경우에는 전주곡을 연주하지만, 약식 절차로 국민의례를 행할 때 국기에 대한 경례시 연주되는 애국가와 같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연주만 하는 의전행사(외국에서 하는 경우 포함)나 시상식,공연 등에서는 전주곡을 연주해서는 안된다.

- 애국가가 연주될 때에는 일어서서 경청하는 것이 예의이다.



애국가 악보














       작품목록  

1) 악보가 남아있는 작품들

<한국의 생활> 모음곡. 성악곡 (1934-1935)
1번 : 이팔청춘, 2번 : 아리랑고개
<애국가> (1935)
<강천성악>. 교향시 (1936?)
<한국환상곡>. 환상적 교향곡 (1936-1937)
<논개>. 교향시 (1962)
<애국지사추도곡>. 관현악곡 (1962)
<흰 백합화>. 성악곡 및 현악독주곡 (1962?)
<한국무곡>. 관현악곡 (1963)

2) 악보가 남아있지 않은 작품들

<한국의 생활> 모음곡. 성악곡 (1934-1935?)
3번 : 전원, 4번 : 백합화
<마요르카>. 교향시 (1948)
<퍼르멘토르의 로 피>. 교향시 (1951)
<시와 조선>. 교향곡 (?)
<방아타령> (?)
<고종의 승하> (?)
<아악> (?)


3) 편곡작품들

<월광>. 드뷔시 (1949)
<전주곡과 푸가 B단조>. 바하 (?)
<푸가 G단조>. 바하 (1953)
<토카타와 푸가 D단조>. 바하 (1953)
<전주곡 E단조>. 쇼스타코비치 (1954)

<끊어진 시간 Hora Staccato>. 다니쿠 (?)
<고예스카스 Goyescas>. 그라나도스 (1953)
<스페인 춤곡>. 그라나도스 (1951.1955)
<황량한 대성당 La Catedrale Engloutie>. 드뷔시 (1956)

4) 행사용 작품들

<서강대학교 교가> (1964)
<유한의 노래> (1964)
<국기경례곡> (?)
<한국학원 교가>(?)

<독립기념관 소장악보>

분류번호 760-1

<애국가>의 합창보와 피아노 악보, 그리고 <한국환상곡>의 오케스트라 총보가 함께 묶여져 있음. <한국환상곡> 악보의 제목은 '환상적 교향곡 <한국> (Fantastique Sinfoni )'이라고 붙여져 있고, 제목 위에 '로리타 탈라라베라에게'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전체는 3악장을 나뉘어져 있는데 제1악장은 1944년 6월 15일 사가로에서 사보를 시작하여 1944년 9월 23일 바르셀로나에서 마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2악장은 바르셀로나에서 1944년 10월 1일에 시작하여 그해 11월 1일에 사보를 마쳤으며, 제3악장은 바르셀로나에서 1944년 12월 10일에 사보를 마쳤다. 특별히 제2악장 마지막 부분에 1947년 1월 14일과 19일 마요르카의 프린시팔 극장에서 마요르카 교향악단에 의해, 또 1947년 3월 9일 마드리드 극장에서 마드리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은 것으로 보아, 제2악장만을 따로 떼어 연주를 했던 것으로 보임.

분류번호 760-2

<강천성악>의 오케스트라 총보. 제목과 사보 연월일이 적혀져 있지 않음. 9쪽부터는 잉크색이 파란색에서 검정색으로 바뀌고, 또 표기방식도 달라지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에 의해 사보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음.


분류번호 760-3

<한국환상곡>의 오케스트라 총보. 제목은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적 교향곡 <한국>( Sinfonie Fantastique fur grosses Orchester gesetzt)'이라고 붙여져 있으며, 첫 장에 악기편성과 연주된 장소가 적혀 있음. 또한 다음과 같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헌정사도 첨가되어 있음.

Dedicated to Dr. Syngman Rhee :
Symphonic poem "Korea" which I composed with all my heart and without his permission, I would dedicate to Dr. Syngman Rhee, the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hom I respect as great Hero and great patriot, who has given the greatest contribution for our young and perilous Republic.

Ahn Eaktai

이승만 박사께 :
박사님의 허락없이 제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교향시 <한국>을, 위대한 영웅이자 위대한 애국자로 존경하는 한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시며, 생긴 지 얼마되지 않고 할 일 많은 우리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이승만 박사께 헌정합니다.

안익태

(1954년 8월 25일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사보된 악보이며, 악보의 맨 마지막 부분에 합창부분에 대한 습작악보가 첨가되어 있음.)



분류번호 760-4

<한국환상곡>의 오케스트라 총보. 1950년 11월 4일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사보된 악보로, 제목은 교향시 <한국>(Poema Sinfonico Korea)이라고 적혀져 있음.

분류번호 760-5

<애국가> 오케스트라 총보와 합창보. <대한국 애국가>라고 적혀있는 오케스트라 총보는 1949년 4월 18일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사보된 것이며, 합창보가 사보된 날짜는 적혀있지 않음.

분류번호 760-6

안익태의 편곡작품을 모아놓은 악보집. 바하의 <전주곡과 푸가 B단조>, <푸가 G단조>, <토카타와 푸가 D단조>와 쇼스타코비치의 <전주곡 E단조 아다지오>, 디니쿠의 <끊어진 시간>이 실려있음. 바하의 곡들과 쇼스타코비치의 곡 사이에 <한국학원 교가>가 삽입되어 있음.

분류번호 760-7

<애국지사추도곡>과 <한국무곡>의 오케스트라 총보. <애국지사추도곡>은 1962년 7월 19일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사보되었으며, 1963년 5월 1일 제2회 국제음악제에서 초연되었닥 기록되어있음. 1972년 악익태기념사업회에서 출판한 악보와 거의 같은 악보임. <한국무곡>은 1963년 9월 29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보되었음. 맨 마지막 장에 <유한의 노래>가 첨가되어 있음.


분류번호 760-8

교향시 <논개>의 파트보.

분류번호 760-9

<한국환상곡>의 오케스트라 총보. 필사본을 그대로 복사한 악보. 독립기념관 소장악보 분류번호 760-16의 악보와 같은 악보로 제목과 사보된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음.

분류번호 760-10

<강천성악> 오케스트라 총보. 안익태기념사업회에서 출판한 악보임.

분류번호 760-12

<한국환상곡>의 합창보. 가사는 영어로만 표기되어 있고 사보된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음.

분류번호 760-13

<한국환상곡> 오케스트라 총보. 안익태기념사업회에서 출판한 악보임.

분류번호 760-14

교향시 <논개>의 오케스타라 총보. 두 개의 다른 본이 한꺼번에 묶여져 있음. 첫번째 악보는 1965년 8월 31일에, 두번째 악보는 1962년 9월에 사보된 것임. 두 악보 사이에는 판소리의 창을 사보해놓은 악보가, 악보집의 맨 마지막 부분에는 <서강대학교 교가>가 삽입되어 있음.

분류번호 760-15

<강천성악>의 오케스트라 총보. 독립기념관 소장악보 분류번호 760-9의 악보와 같은 악보이지만 여러 군데 수정한 흔적이 보임. 1953년 9월 26일에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사보되었음. 악보의 맨 앞장에 독립기념관 소장악보 분류번호 760-3의 <한국환상곡> 악보와 같은 제목이 붙어 있으며, 악기편성, 연주장소, 헌정사 등의 내용도 그 악보에 적힌 것과 거의 같음.
악보의 마지막 부분에 <한국환상곡>의 새로운 주제선율에 대한 습작 악보가 첨가되어 있으며, 그 습작 악보가 사보된 날짜는 1952년 8월 26일이라고 따로 적혀있음.

분류번호 760-17

<애국지사추도곡>과 <한국무곡>의 파트보.

분류번호760-18

<애국지사추도곡> 오케스트라 총보. 안익태기념사업회 출판물임.

분류번호 760-14

교향시 <논개>의 오케스타라 총보. 두 개의 다른 본이 한꺼번에 묶여져 있음. 첫번째 악보는 1965년 8월 31일에, 두번째 악보는 1962년 9월에 사보된 것임. 두 악보 사이에는 판소리의 창을 사보해놓은 악보가, 악보집의 맨 마지막 부분에는 <서강대학교 교가>가 삽입되어 있음.

분류번호 760-15

<강천성악>의 오케스트라 총보. 독립기념관 소장악보 분류번호 760-9의 악보와 같은 악보이지만 여러 군데 수정한 흔적이 보임. 1953년 9월 26일에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사보되었음. 악보의 맨 앞장에 독립기념관 소장악보 분류번호 760-3의 <한국환상곡> 악보와 같은 제목이 붙어 있으며, 악기편성, 연주장소, 헌정사 등의 내용도 그 악보에 적힌 것과 거의 같음.
악보의 마지막 부분에 <한국환상곡>의 새로운 주제선율에 대한 습작 악보가 첨가되어 있으며, 그 습작 악보가 사보된 날짜는 1952년 8월 26일이라고 따로 적혀있음.

분류번호 760-17

<애국지사추도곡>과 <한국무곡>의 파트보.

분류번호760-18

<애국지사추도곡> 오케스트라 총보. 안익태기념사업회 출판물임.



                                                  연보  


ㅇ1906. 12. 5 평양출생(평양시 계리 35번지)
ㅇ1914 평양보통학교 입학
ㅇ1918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
ㅇ1919 3ㆍ1운동관련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제적당함
ㅇ1921 일본동경 세이소꾸중학교 입학
ㅇ1926. 4 일본 동경국립음악학교 입학(첼로전공)
ㅇ1930 일본 동경국립음악학교 졸업
   미국 신시내티 음악원 입학
   미국 신시내티 시립교향악단 입단

ㅇ1932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 입학
   미국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 입학

ㅇ1934 미국 필라델피아 심포니클럽 지휘자
   미국 앱나키캠프 관현악단 지휘
   미국 체스트넛 힐 장로교회 성가대 지휘자

ㅇ1935 미국 엘칸-보걸사에 의해 <한국의 생활>모음곡 출판
ㅇ1935. 11. 애국가 작곡
ㅇ1936. 6. 유럽순회연주
ㅇ1936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바인가르트너 사사
ㅇ1936. 10. 미국 뉴욕으로 돌아옴
ㅇ1937. 6. 미국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 (음악학 석사학위 취득)
ㅇ1937. 11. 유럽으로 이주
ㅇ1937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 특별연구생 입교(코다이 사사)
ㅇ1938. 2. 헝가리 더블린방송교향악단 객원지휘.<한국환상곡> 초연
ㅇ1939 스승인 "R.쉬트라우스" 대신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교향악단 지휘
ㅇ1940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
ㅇ1940~44 세계 주요 교향악단 지휘
ㅇ1944 스페인 바르셀로나 교향악단 지휘
ㅇ1946. 7. 5 스페인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벨라"와 결혼
ㅇ1946 스페인 마요르카 교향악단 창단 및 상임지휘자 취임
ㅇ1947. 1.14 마요르카 교향악단 창단연주회
ㅇ1947 영국 런던 로얄필하모니 지휘
ㅇ1949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한국환상곡 지휘
   (미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고국에도 방송됨)
ㅇ1952. 7~8 멕시코 순회연주
ㅇ1955. 3. 문화포장 받음(25년만에 첫 번째 고국방문)
ㅇ1959. 5.30 마요르카 교향악단 고별 연주회
ㅇ1959. 7. 6 영국 런던 필하모니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
ㅇ1959 교향시 "강천성악" 작곡
ㅇ1962. 5. 제1회 국제음악제 지휘(서울 시민회관)
ㅇ1963. 5. 제2회 국제음악제 지휘(서울 시민회관)
ㅇ1964. 5. 제3회 국제음악제 개최(서울 시민회관)
ㅇ1964 일본에서 올림픽대회 기념 ABC교향악단 지휘
ㅇ1965. 7. 4 영국 런던 뉴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
ㅇ1965. 9. 16 스페인 바로셀로나 병원에서 별세
ㅇ1965. 10. 15 문화훈장 추서
ㅇ1977. 7. 유해봉환(국립묘지 제2유공자 묘역에 안장)






Los Angeles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ed by Ahn, Eaktay

안익태는 1930년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랭자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춰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당시 24세의 안익태는 일본의 구니타치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즉시 미국 유학에 올라 첫 기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에 체재하고 있을 때였다. 올드랭자인의 선율에 가사를 붙여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에 충격을 받고 제데로된 애국가를 만들어야 겠다고 작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애국가를 완성하게 되었고 동시에 [한국 환상곡]도 완성 시켰다.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 유럽에 건너갔던 무렵이었다. 때마침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몇몇 한인들이 모여서 안익태가 쓴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노래하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로 불리어진 애국가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938년, 안익태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서 [한국 환상곡]을 초연했다.

한국 환상곡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그린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교향시곡의 형태를 취하면서 작품의 표제를 한국의 역사, 그 속에 깃든 한민족의 고난과 영광을 테마로 삼고있는 것이다.

최강주로 연주되는 관현악의 총주(總奏)는 단군 조선의 개국을 알리는 장엄한 서주로 여겨진다. 여기에 이어지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가락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껏 담은 것인데 여기에 보태지는 전통적인 민요 가락과 리듬이 평화롭고 순박한 한민족의 얼을 그린다. 그러나 음악은 일변해서 무겁고 침통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일본의 침략과 애국지사들의 죽음이 그려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전통 아악(雅樂)이 등장하여 분위기를 더욱 참담하게 이끈다. 그러나 이러한 비통의 역사를 누르고 애국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해방의 환희와 감격이 표현된다.(안익태는 처음 여기까지로 곡을 완성 시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안익태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추가했다. 그리하여 전쟁에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을 연주한 뒤 음악은 다시 장엄한 애국가와 만세! 만세!를 피날레로 치달아 가면서 감동적인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우리 민족의 수난과 영광을 함께 묘사한 안익태(1905-1965) 선생님의 대서사시 교향곡 "한국 환상곡"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한국의 민족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 부분입니다. 서두에 진동하는 관현악의 울림으로 고조선이 개국을 알리고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그리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며 이어 우리의 민요 가락이 여러 가지 악기 소리와 더불어 타령조의 멜로디로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가 표현됩니다.


1부

2부

둘째 - 일제 아래 신음하는 한반도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무겁고 침통한 선율이 슬프게 이어집니다.

3부

셋째 - 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애국가의 1절부터 4절까지를 합창으로 표현했습니다.

4부

넷째 - 6.25로 인한 처절함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선율은 다시 슬픔으로 바뀌고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퍼진 뒤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의 만세 소리와 함께 곡 전체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클래식 음악산책

출처 : 송운 사랑방 (Song Woon Art Hall)
글쓴이 : 山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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