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오후 18시 04분 57초 +0900 |
大邱十景(대구십경)
第一景 : 琴湖泛舟(금호범주, 금호강의 뱃놀이)
第二景 : 笠巖釣魚(입암조어, 입암의 낚시)
第三景 : 龜峀春雲(귀수춘운, 거북산의 봄 구름)
第四景 : 鶴樓明月(학루명월, 금학루의 밝은 달)
第五景 : 南沼荷花(남소하화, 남소의 연꽃)
第六景 : 北壁香林(북벽향림, 북벽의 향림)
第七景 : 桐華尋僧(동화심승, 동화사의 중을 찾음)
第八景 : 櫓院送客(노원송객, 노원의 송별)
第九景 : 公嶺積雪(공영적설, 팔공산에 쌓인 눈)
第十景 : 砧山落照(침산낙조, 침산의 저녁노을)
大邱十景을 노래한 徐居正의 七言絶句 十首가 傳해오고 있다. 원래 十詠인 것을 大丘十詠, 大丘十景, 達城十詠, 達城十景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당시는 大丘로서의 邑城이 축조되지 않았고 達城(현재의 달성공원일대)이 그 堡障이 되어 慶尙道都觀黜陟使(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巡察할 때이며, 大丘邑에는 知事를 두고 있던 때이다. 일찌기 達城이 達城徐氏의 世居地였음을 지금의 달성공원 경내에 1971년에 세워진 達城徐氏遺墟碑(달성서씨유허비)가 그 來歷을 말해주고 있다.
徐居正(서거정, 1420-1488)의 字는 剛中, 號는 四佳亭 또는 亭亭亭이다. 世宗 2년(1420)에 태어났고, 太宗의 王權確立에 佐命一等功臣인 陽村 權近의 外孫이기도 한 그는 世宗 26년(1444) 式年文科에 오른 후 9代 成宗까지 6朝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6曺判書를 두루 지냈으며 兩館大提學과 左贊成에 佐理功臣三等으로 達城君에 封해지고 諡號(시호)는 文忠이다. 그의 학문은 天文(천문), 地理(지리), 醫藥(의약), 卜筮(복서), 星命(성명)등에 능통한 대학자로 海東의 奇才라 일컬을 만큼 국가의 高文大冊이 거의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歷代年表(역대년표), 經國大典(경국대전), 東國通鑑(동국통감), 筆苑雜記(필원잡기), 東文選(동문선), 新撰輿地勝覽(신찬여지승남), 四佳集(사가집) 등외에도 많은 저서가 있다.
大邱의 十景은 成宗 12년(1481), 王命에 의해 盧思愼(노사신)등이 중국 明나라의 大明一統誌(대명일통지)를 본 떠서 만든 各道의 地理誌인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中宗 25년(1530)에 역시 왕명에 의해 보완하여 증보한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大邱(대구)는 이른바 內凌盜地(내릉도지)로 新川을 軸으로 하여 北東部의 八公山 줄기와 南의 最頂山(최정산) 및 琵瑟山(비슬산)줄기로 둘러 싸여 있고 西쪽으로 약간 트여 있는 나팔모양을 하고 있다.
新川은 비슬산 줄기에서 發源하여 南部山地의 谷口인 嘉昌(가창)에서 龍頭부리(용두방천)를 거쳐 시내로 들어 와서 배나무 샘(지금의 梨泉洞)과 水道山(대구수도관리소가 있는 산, 기린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기린산이라 했음) 동쪽 기슭을 스쳐 건들 바위를 지나 이곳에서 한바퀴 돌아 깊은 물 구비를 만들고 다시 連龜山(연구산, 제일여중이 있는 산), 蛾眉山(아미산, 대구 향교가 있는 산, 모양이 나비눈썹 같다고 하여서) 밑으로 해서 東山(신명여고 일대의 산)을 지나 달성공원 앞으로 해서 날뫼(飛山洞)로 하여 達川(達西川)으로 흘러 八達津(팔달진, 팔달교부근)에서 琴湖江(금호강)과 合流하던 것을 正祖 1년(1777)에 大丘判官(대구판관)으로 부임한 이서가 1778년에 사재를 들여 해마다 겪는 대구지방의 물난리를 막고자 물길을 지금의 新川으로 돌렸고 新川을 현재의 백사부리(서변 잠수교와 침산교부근)에서 琴湖江으로 流入되게 하였다.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3년 후인 1797년에 李公堤碑(이공제비)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매년 1월 14일에 대백프라자 부근인 중구 봉덕 1동 655번지의 新川堤防(새내둑)에 移建된 李公堤碑閣(이공제비각)에서 방천시장 번영회가 중심이 되어 祭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新增東國輿地勝覽(이하 新輿覽이라 약칭함)의 山川條(산천조)에서 笠巖(입암, 삿갓바위)을 「在新川中其形如笠故名(재신천중기형여립고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新川은 무엇이며 248년 후인 正祖 2년(1778년)에 判官 李淑(이숙)가 私財를 들여 대구의 수로를 변경하여 당시 교동에 있었던 孔子廟(공자묘, 향교)의 侵水 위험까지도 막았다던 新川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다. 新川이 되기 이전의 내 이름을 알길 없어 1778년 이후의 新輿覽의 重刊 과정에서 이미 굳어진 新川으로 改字했는지 아니면 1530年의 新輿覽에서도 대구의 수로를 변경한 적이 있어 新川이라고 하였고 그 후의 李判官(이판관)의 수로 변경도 新川이라고 아울렀는지, 아니면 「새내」의 뜻에서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나마 大邱十景(대구십경)이 있었기로 근 500년 전의 大邱風光(대구풍광)이 이러했으리라고 나름대로 그 情景을 그려볼 수 있게 됨은 다행한 일이다.
第一景 : 琴湖泛舟(금호범주, 금호강의 뱃놀이)
琴湖淸淺泛蘭舟(금호청천범난주) 금호강 맑은 물에 조각배 띄우고
取此閑行近白鷗(취차한행근백구) 한가히 오가며 갈매기와 노닐다가
盡醉月明回棹去(진취월명회도거) 달 아래 흠뻑 취해 뱃길을 돌리니
風流不必五湖遊(풍류불필오호유) 오호가 어디더냐 이 풍류만 못하리
蘭舟(난주) : 本蘭(본란) 木蓮(목련)으로 만든 조각배
取此(취차, 次(차)) : 차츰, 점차
五湖(오호) : 중국의 큰 호수로, 陽湖(파양호), 靑草湖(청초호), 洞庭湖(동정호), 丹陽湖(단양호), 太湖(태호) 또는 격호, 조호, 財湖, 貴湖를 말함.
琴湖江은 그 根源이 둘인데 하나는 慶州(경주)의 母子山에서, 또 하나는 新寧(신녕)의 普賢山(보현산)에서 發源(발원)하여 永川(영천) 雙溪(쌍계)에서 合流(합류)하고 河陽(하양), 半夜月(반야월)을 지나면서 구비마다 아름다운 景勝을 이루니 蛾洋樓(아양루)가 있는 東村유원지 일대가 그렇고 檢丹(검단)의 蒼壁(창벽)과 花潭(화담)의 진달래, 砧山 落照(침산 낙조)와 櫓院(노원)의 白沙場(백사장), 臥龍山(와룡산)의 玉沼岩(옥소암), 江倉(강창)의 절벽을 둘러 江停(강정)나루에서 洛東江(낙동강)으로 流入하는 大邱의 젖줄로서 江岸(강안) 곳곳에 樓臺亭舍(누대정사)와 景勝地(경승지)가 많아 時人墨客(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第二景 : 笠巖釣魚(입암조어, 삿갓바위의 낚시)
烟雨空濛澤國秋(연우공몽택국추) 이슬비 자욱히 가을을 적시는데
垂綸獨坐思悠悠(수륜독좌사유유) 낚시 드리우니 생각은 하염없네
纖鱗餌下知多少(섬린이하지다소) 잔챙이야 적잖게 건지겠지만
不釣金驚鉤不休(부조금오조불휴) 금자라 낚지 못해 자리 뜨지 못하네
空(공몽) : 이슬비가 보얗게 내리거나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어둑침침한 모양
垂綸(수륜) : 낚시줄을 늘어뜨림, 낚시질을 함
纖鱗(섬린) : 작은고기
金驚(금오) : 금자라
笠巖(입암) 역시 新川과 마찬가지로 논란이 있어 왔는데,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215번지에 있는 속칭 건들바위를 말한다.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얹혀 있는데 건드리면 건들건들 한다고 건들바위라 이름하였다 한다. 높이 3m, 너비 1.6m의 이 바위가 영험하다 하여 지금도 매년 정월초가 되면 부인들이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치성을 드리고 있다.
그런데 新輿覽에 「在新川中 其形如笠故名 世傳星隕爲石」즉 新川 가운데에 있고 그 모양이 삿갓 같아서 이름을 삿갓바위라 한 것까지는 수긍이 가나, 별의 운석이 된 돌이라 하는데서 지금의 건들바위는 운석이 아니기 때문에 삿갓바위가 아니다는 疑問이 提起된다. 그래서 일설에는 지금의 新岩橋(신암교) 건너 북쪽에 西洋月山이 있는데 이 山아래 新川쪽에 큰 바위가 높이 솟아 사람이 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삿갓바위등이라 이름하고 山밑에서 옛날 羊을 많이 먹였기 때문에 양지동이라 칭하였다 하나 알 길이 없다. 이 바위는 일제시대 신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호안공사를 하면서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버렸다 하니 아쉬운 일이다. 여하간 앞서의 新川과 이 삿갓바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第三景 : 龜峀春雲(귀수춘운, 거북산의 봄 구름)
龜岑隱隱似驚岑(귀잠은은사오잠) 거북뫼 아득하여 자라산 닮았고
雲出無心亦崙心(운출무심역유심) 구름 토해냄이 무심한 듯 유심 한 것이
大地生靈方有望(대지생령방유망) 온땅의 백성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可能無意作甘霖(가능무의작감림) 가뭄에 단비 만들어 주려 함이네
鰲岑(오잠) : 鰲山, 자라산, 中國에 있는 神仙이 산다는 山
生靈(생령) : 生民, 百姓
甘雲(감운) : 오랜 가뭄 뒤에 내리는 장마
龜岑(귀잠, 거북산)은 運龜山(운귀산), 午砲山(오포산), 자래방우산 등으로 불리어온 대구광역시 봉산동의 제일여중이 있는 連龜山(연귀산)을 말한다. 純宗(순종)때 大邱府民에게 午正을 알리기 위해 이 곳에서 포를 쏘았기로 午砲山이라 한 것이다.
新輿覽에 「連龜山 在付南三里 鎭山 諺傳建邑初 作石龜 藏于山春 南頭北尾 以通地脈 故謂之連龜」라 하여 대추의 진산이 되는데 산등에 돌거북을 만들어 지맥과 통하도록 머리는 南쪽, 꼬리는 北쪽으로 하여 묻고 이를 連龜(연귀)라 하였다는데 막상 현재의 돌거북은 언제부터인가 머리는 東으로 꼬리는 西로 하여 地脈(지맥)과 관계없이 제일여중 교정 한 모서리 철책 속에 갇혀 있다. 학교 건축시에 옮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이라도 바로 잡았으면 한다. 또 이 連龜山을 지금의 大德山(대덕산)이라 하고 安逸寺(안일사)가 있는 안지랭이골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이의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
또 돌거북을 만들어 둔 곳이 옛 서낭당이라는 기록도 있고 보면 이곳에서 祈雨祭(기우제)를 지냈던 것 같고 徐居正의 時도 기우제의 祈禱詞(기도사)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처럼 大邱十景은 거의가 景勝(경승)과 風光(풍광)을 노래하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國泰民安(국태민안)의 祈願(기원)을 담고 있어 四佳亭(사가정)의 愛民精神(애민정신)을 살피게 한다.
第四景 : 鶴樓明月(학루명월, 금학루의 밝은 달)
一年十二度圓月(일연십이탁원월) 일년에 열 두 번 둥근 달이야 뜨지만
待得中秋圓十分(대득중추원십분) 기다리던 한가위 달 한결 더 둥그네
更有長風秋雲去(갱유장풍추운거) 긴 바람 한바탕 불어 구름 쓸어내니
一樓無地着纖紛(일루무지착섬분) 누각엔 티끌 한 점 붙을 자리 없구나
纖紛 : 먼지, 티끌, 흉한 기운
鶴樓(학루)는 琴鶴樓(금학루)를 말한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 50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舊 達城館(달성관, 客舍) 東北쪽 모퉁이에 世宗 7년(1425) 당시 大邱邑知軍事(대구읍지군사)였던 琴柔(금유)가 세우고 慶尙道都觀察黜涉使(경상도도관찰출섭사)였던 拙齋(졸재) 김요가 記文(기문)을 썼는데 『옛사람이 사물의 이름을 지을 때는 그 地名에 따르거나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짓게 된다. 巴陵(파릉)의 岳陽樓(악양루, 중국 악양현에 있고 洞庭湖(동정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俯瞰(부감)할 수 있는 누각)는 그 地名을 땄으나 醉翁亭(취옹정)은 저주지사인 醉翁(취옹, 宋나라 歐陽修의 別號)의 이름을 땄듯이 이제 琴候(금후)가 邑에 부임했고, 邑에 琴湖(금호)의 이름도 있고 보니, 그 이름과 樓의 모양이 鶴(학)이 춤추듯 하여 樓에 오른 즉 一琴(일금)에 一鶴(일학)이라, 世俗의 티끌을 털어내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상쾌한 氣象이로다. 거문고 소리에 은은히 和答하고 南風에 세상의 시름 풀어주는 즐거움이 있으니 그 이름을 琴鶴樓(금학루)라 함이 可하도다.‥‥‥』라 하여 樓의 이름이 지어진 경위를 말해주고 있다.
琴鶴樓(금학루)를 두고 읊은 詩, 姜進德의 〈日僧龍章 琴柔〉에서 樓高(누고), 鈴閣(영각), 朱欄(주란), 明月(명월), 雲鶴(운학), 淸香(청향) 등의 詩句로 미루어, 그 규모와 情趣(정취)를 짐작할 수 있겠다.
第五景 : 南沼荷花(남소하화, 남쪽 연못의 연꽃)
出水新花疊小錢(출수신화첩소전) 새로 나온 연꽃 포갠 동전 같더니
花開畢竟大於船(화개필경대어선) 꽃 다 피고 나니 배(船)보다 더 크네
莫言才大難爲用(막언재대난위용) 감(才) 커서 쓰기 어렵다 말 것이
要遣深痾萬姓悛(요견심아만성전) 고질병에 긴히 써서 온 백성 고치리
小錢(소전) : ①청나라 때 쓰던 黃銅錢(황동전) ②얇은 날의 작은 가래
深痾(심아) : 고질병.沈痼(침고).
萬姓전(만성전) : 만백성의 병을 고침
南沼(남소)란 남쪽 못이란 뜻인데 聖堂池(성당못)를 가리킨다. 지금 靈仙市場(영선시장)이 들어선 靈仙池(영선지 또는 靈信池)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 영선지는 일제시대인 1923년에 넓이 10,017평으로 판 貯水(저수) 灌漑用(관개용) 못이었다. 따라서 聖堂池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東北쪽에 있는 第六景 道洞(도동) 香林(향림)을 『北壁林(북벽림)』이라 한 것과 대칭되게 南沼(남소)라 한 것 같기 때문이다.
聖堂池는 성댕이못이라고도 불렀는데 땅골(당곡)이라하여 성당동에서 으뜸되는 마을에 八聖堂이 있어서 八聖堂里 이를 줄여서 聖堂, 聖堂里 하였으나 그 뒤 八聖堂을 헐고 대구 判官 金魯가 못을 팠으니 이것이 현재 花園(화원) 방면으로 나가는 大路邊에 있는 주위 약 2Km의 못이다. 한 때 그 부근의 도축장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로 오염되었으나 지금은 두류공원의 경내가 되었으므로 南沼荷花를 다시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또한 이 시에서도 백성의 무병을 바라는 四佳亭의 소망이 역력하다.
第六景 : 北壁香林(북벽향림, 북쪽 절벽의 향나무 숲)
古壁蒼杉玉槊長(고벽창삼옥삭장) 옛 벽에 푸른 측백 옥창같이 자라고
長風不斷脚時香(장풍부단각시향) 그 향기 바람따라 철마다 끊이지 않네
慇懃更着栽培力(은근갱착재배력) 정성들여 심고 가꾸기에 힘쓰면
留得淸芬共一鄕(유득청분공일향) 맑은 향 온 마을에 오래 머물리
玉槊(옥삭) : 옥으로 된 창
淸芬(청분) : 맑은 향기, 깨끗한 德行
北壁(북벽)의 香林(향림)은 대구광역시 도동 180번지 일대의 절벽산에 자생한 側柏樹林(측백수림)을 가리킨다. 대구천연기념물 제1호이기도 한 측백나무는 常綠僑木(상록교목)으로 원래 중국의 특산으로 알려졌으나, 우리나라의 丹陽(단양), 英陽(영양), 蔚珍(울진) 및 安東 等의 山地에서도 자라고 있는데, 북벽의 향림은 측백이 자랄 수 있는 분포지역의 南方限界地(남방한계지)로 植物地里學(식물지리학)상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이 북벽향림 이후 이 산을 香山이라고도 하였는데 19세기 초엽 인근에 살았던 아홉 노인의 詩會를 기리는 후손들이 중국 白樂天(백락천)의 香山九老會(향산구로회)를 본떠 1933년 3월에 이 산 낭떠러지 중턱 10여 평 남짓한 터에 3樑 맞배집을 짓고 九老亭(구로정)이라 하여 지금도 남아 있다.
제7경 : 桐華尋僧(동화심승, 동화사의 중을 찿음)
遠上招提石逕層(원상초제석경층) 멀리 절로 오르는 좁은 돌층계 길
靑藤白襪又烏藤(청등백말우오등) 푸른 등나무 하얀 버선 검은 지팡이
此時有興無人識(차시유흥무인식) 지금의 이 흥은 아무도 모르리라
興在靑山不在僧(흥재청산부재승) 흥은 청산에 있고 중은 간 곳 없네
招提(초제) : 절, 사찰
靑藤(청등) : 푸른 등나무
白襪(백말) : 흰버선
烏藤(오등) : 검은 등나무, 검은 꼬부랑 지팡이
여기서 承句(승구)의 靑藤(청등)이 新輿覽과 英祖年間에 편찬된 大丘邑誌(대구읍지)에는 靑藤(청등, 푸른등나무)으로 되어 있고 純祖 32년(1832)의 慶尙道邑誌(경상도읍지) 중의 大丘府邑誌(대구부읍지)와 高宗 32년(1895)의 嶺南邑誌(영남읍지) 중의 大丘府邑誌(대구부읍지)에는 「靑鞋(청혜)」(푸른 짚신)으로, 日帝下 1924년에 나온 大邱府邑誌(대구부읍지)와 達城徐氏派譜(달성서씨파보)에는 靑衫(청삼, 푸른적삼)으로 나와 있다. 新輿覽의 靑藤(청등)대로함이 마땅하나 「푸른 등나무 흰 버선에 검은 등나무」 또는 「푸른 등나무 흰 버선에 검은 지팡이」보다는 「푸른 적삼 흰 버선에 검은 지팡이」가 보다 形(형)의 具象化(구상화)를 위해 더 좋을 것 같은데 고증할 길이 없다.
그리고 桐華寺(동화사)는 大邱의 東北쪽 18km 지점인 道鶴洞(도학동) 八公山 기슭에 있는 新羅(신라)의 古刹(고찰)로 炤智王(소지왕) 15년(493)에 極達和尙(극달화상)이 創建(창건)하여 처음 瑜伽寺(유가사)로 하였다가 340년 후인 興德王(흥덕왕) 7년(832)에 憲德王子(헌덕왕자) 心地王師(심지왕사)가 重建(중건)할 때 簡子(간자) 8개를 던져 그 떨어진 곳에 佛堂을 이룩하니 지금의 籤堂(첨당) 뒤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인데 때마침 겨울인데도 오동나무 꽃이 피었다 해서 桐華寺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로암, 양진암, 염불암 등의 부속 암자는 물론, 동화사입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43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 극락전 삼층석탑(보물 제246호),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동화사 당간지주(보물 제254호), 도학동 석조부도(보물 제601호) 등 보물 6점과, 金剛杵(금강저), 泗溟大師(사명대사)의 眞影(진영)등의 문화재뿐만 아니라, 경내에 1992년에 완공된 統一藥師大佛(통일약사대불)의 위용(높이 33m, 둘레 16.5m)이 동화사를 더욱 유명하게 하고 있다.
第八景 : 櫓院送客(노원송객, 노원에서의 송별)
官道年年柳色靑(관도년년류색청) 한양 길 버들잎은 해마다 푸르고
短亭無數接長亭(단정무수접장정) 줄지은 주막들이 길게도 늘어섰네
唱盡陽關各分散(창진양관각분산) 이별의 노래 그치고 객 흩어진 뒤에는
沙頭只臥雙白據(사두지와쌍백거) 빈 술병만 짝이 되어 모래밭에 뒹구네
短亭長亭(단정장정) : 작은 숙사와 큰 숙사, 옛날에 五里마다 단정을, 십리마다 장정을 두었음.
陽關(양관) : 중국의 關門名(관문명)으로 지금의 甘肅省(감숙성) 敦煌縣(돈황현)에 있고, 王維(왕유)의 渭城曲(위성곡)으로 有名하며 送別의 상징으로 쓰임.
櫓院(노원)은 大櫓院의 약칭인데 당시 大邱의 북쪽 關門(관문)인 이곳 大櫓院에서 惜別의 情을 노래한 것이다. 원래 도로 연변에 행인들이 쉬어가게 해 놓은 곳을 院 또는 亭(정)이라 하였는데, 거리가 먼 곳을 長亭(장정), 가까운 것을 短亭(단정)이라 했고, 이곳이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의 첫 나루터여서 길손들이 쉬어 감은 물론 이별과 만남의 哀歡(애환)이 교차되던 곳이다.
이 大櫓院 앞이 八達津(팔달진, 팔달교가 놓이기 전의 금호강 나루)이어서, 그곳이 大邱의 關門(관문)으로 되어 있었다.
第九景 : 公嶺積雪(공령적설, 팔공산에 쌓인 눈)
公山千丈倚峻層(공산천장의준층) 팔공산 천길 높이 가파르게 솟아 있고
積雪漫空沆瀣澄(적설만공항해징) 쌓인 눈 하늘 가득 이슬 되어 맑구나
知有神祠靈應在(지유신사영응재) 사당 모시니 신령님 應感 있어
年年三白瑞豊登(연년삼백서풍등) 해마다 서설 내려 풍년을 점지하네
沆瀣(항해) : 이슬기운
三白瑞(삼백서) : 정월에 오는 서설
豊登(풍등) : 오곡이 많이 잘 여묾, 풍작
八公山은 大邱盆地(대구분지)의 東北部를 병풍처럼 가리고 있는 산줄기이다. 新羅 때는 아버지의 산, 즉 父岳(부악)이라 하였다가, 나라의 중앙에 있다 해서 中岳(중악)이라고 불렀고, 또 여기서 나라의 公的儀式(공적의식)인 祭天壇(제천단)을 설치하게 되어 公山이라 하였다.
그 후 후삼국시대에 王建(왕건)과 甄萱(견훤)의 이곳 공산 전투에서, 王建이 포위당하여 죽게 된 것을 申崇謙(신숭겸), 金樂(김락)등의 여덟 공신이 장렬히 전사하고 王建을 구했다 해서 八公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최정상인 비로봉이 해발 1,192m로 중앙에 우뚝 서 있고, 좌우로 염불봉, 삼성봉이 양어깨처럼 펼치고 東西로는 동봉, 서봉이 東南으로 관봉, 노적봉, 인봉, 수봉, 북으로 시루봉, 西로 파계봉을 너머 가산에 이르는 環狀山脈(환상산맥)을 이루어 영천, 달성, 군위, 칠곡을 깔고 앉은 靈山(영산)이다. 동화사, 파계사를 비롯하여 부인사, 송림사, 갓바위 등의 크고 작은 사찰, 암자와 기암절벽 및 계곡, 폭포로 사시사철의 절경을 이루고 또한 정상 바로 아래까지 케이블카가 운행되는 등, 대구 시민에게는 가장 큰 휴식처와 등산로를 제공해 주고 있다.
第十景 : 砧山落照(침산낙조, 침산의 저녁 노을)
水自西流山盡頭(수자서류산진두) 물줄기 서로 흘러 산머리에 닿고
砧巒蒼翠屬淸秋(침만창취속청추) 침산의 푸른 숲은 가을 정취 더하네
晩風何處春聲急(만풍하처춘성급) 저녁 바람 타고 오는 방아 소리는
一任斜陽搗客愁(일임사양도객수) 노을에 젖은 나그네 시름 애끓게 하네
蒼翠(장취) : 푸른빛, 푸른 물총새
春聲(춘성) : 방아나 절구 찧는 소리
砧山은 대구의 新川河口(신천하구)를 지키는 속칭 水口막이 山이라 하고, 방망이를 닳았다 하여 일명 방망치산이라고도 하였다. 높이 144m의 平地에 솟은 獨山(독산)으로 조선시대 때는 大丘府의 女祭壇(여제단)이 있었다 하는데 없어지고 지금은 침산공원이 되어 있다.
白沙부리라 하여 북쪽에 있는 마을 앞에는 흰모래가 많았으니 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은 푸른 숲에 물든 단풍과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노원 나루에서 팔달교로 흘러 들어가는 금호강의 금빛 물결과 어울러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女祭壇이란 동네 수채나 水溝(수구)쪽에 돌이나 흙으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방아를 Y자 모양으로 거꾸로 세운 뒤, 여자의 속곳을 뒤집어 입혀 놓고, 묽은 팥죽이나 수수밥을 올려, 문둥병이나 못된 돌림병을 퍼뜨리는 女鬼, 惡鬼(악귀)를 쫓는 액막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 곳에 女祭壇이 있었던 것은 新川(신천)이 琴湖江(금호강)으로 流入(유입)되는 水溝가 이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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