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02일 화요일, 오전 08시 07분 32초 +0900 |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도성(都城)이었던 취푸(曲阜)는
오늘날 중국 山東省 省都, 濟南에서 남쪽으로 약 130㎞
떨어진 곳에 있다.
산둥성(山東省) 약도
본명이 구(丘)인 孔子는 서기전 551년에 魯나라 창평향(昌平__)
추읍(鄒邑)1)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2)은
추읍 대부(大夫)로, 무예를 갖추었고 완력이 있었다.
취푸(曲阜) 현성(縣城)의 남문인 仰聖門
사마천의 ‘史記·孔子世家’에 따르면 숙량흘이 안씨(顔氏) 여인과
합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따르면
숙량흘이 시씨(施氏)와 결혼하여 딸만 아홉을 두었다.
아들을 기다리던 숙량흘은 첩을 얻어 아들 맹피(孟皮)를 얻었으나,
그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갖고 있었다. 武士인 숙량흘은 가문을
이을 건장한 사내아이를 원하였다.
일흔두 살이 되던 해에 숙량흘은 안양(顔襄)의 셋째 딸인 열여덟살의
안징재(__徵在)를 취하였다.3) 안징재는 취푸에서 약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니치우산(尼丘山)에서 기원을 한 후 공자를 얻었다.
혹자는 산(尼丘山)의 이름을 따서 공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지만,
사마천은 史記에서 공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구(丘)’라 하였다고 전한다.
공자가 3살이 되던 해에 숙량흘이 사망하였다. 안징재는 서자로 괄시 받던 공자를 데리고 취푸(曲阜)의 췌리(闕里)로 이주하여, 공자가 장성하기까지 부양하였다.
孔廟 내에 9개의 정원이 있다. 이러한 숲길을 따라 3번 째 정원에 들어
서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지고 사당(廟)의 엄숙함에 길들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범인(凡人)들에게는 그저 혼잡스런 관광지일 뿐이다.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군략가였던 공자의 가르침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 큰 영향력을 과시하여 왔다. 공자와 그의 가르침 기리기 위하여 고향인 취푸(曲阜)에 孔廟, 孔府, 孔林을 조성하였다.
孔廟는 공자를 기리는 사당이고, 孔府는 공자의 직계 자손이 대대로 살아 온 주거 공간이다. 孔林은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들 사적(史蹟)을 ‘싼쿵(三孔)’이라하는데,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金, 元 시기(1115년-1368년)에 세워진 碑亭, 모두 13개가 있다.
孔廟는 2400여년이 넘도록 제사가 한 번도 끊인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공자 사후(死後) 일 년 후인 서기전 478년에,
노(魯) 애공(哀公)이 공자가 살던 집에서 그의 의관(衣冠)을 놓고 제(祭)
를 지내면서 쿵먀오(孔廟)가 시작되었다.
奎文閣. 송나라 때인 1018년에 건축되어, 명(明)대인
1504년과 지난 세기인 1985년에 개수되었다.
역대 황제들이 하사한 경서(經書) 등이 보관되어 있다.
BC205년 漢高祖 유방이 황제로서 처음 孔廟에서 공자에게 제례를
지냈다. 이후 많은 황제들과 고관대작들이 前例로 따르게 되었다.
황제로 즉위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쿵먀오를 찾았다.
12명의 황제가 20번이나 개인적으로 방문하여 공자에게 제례를
지냈다. 약 100여명의 황제는 자신을 대신해서 공자에게 제례를
지내기 위해 관리를 196번이나 파견하였다.
성지뎬(聖迹殿), 1592년에 제작된 120장의 석각판으로 이루어진
공자 사적도
3개 공간으로 이루어졌던 공자가 살던 집 - 묘는, 공자의 위상이
올라간 수(隋)나라 때, 서기 611년에 대규모로 재건되었다.
송(宋)나라 때 묘(廟)는 3개 구역과 4개 뜰로 꾸며져 확장되었고,
묘 주변에 400개가 넘는 방들이 배치되었다. 금(金)나라 말기인
1214년에 화재와 약탈로 인하여 묘가 파괴되었다. 원(元)나라 초기에 묘는 이전보다 확장되어 재건되었다.
1499년 화재로 인하여 또 다시 폐허가 된 후에 孔廟는 마침내 현재와 같은 규모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묘 내에 건물과 장식들은 그 후에도 속 추가되었다. 전체적으로 孔廟는 15번이나 크게 개선되었고, 31번이나 대규모로 수리를 하였고, 수많은 작은 건물이 배치되었다.
청(淸) 건륭제(乾隆帝)가 기대어 기울어졌다는 나무.
지금의 쿵먀오(孔廟)는 중국에서 쯔진청(紫禁城) 다음으로 규모가 큰
역사적 건물이다. 장방형 묘에는 460개 방을 가진 건물들이 16,000㎡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1499년의 화재 이후 명(明) 도성(都城)인 쯔진청을 본 따 묘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묘의 주요 부분은 9개 정원을 둘러싼 건물들이다.
건물들은 남북으로 이어진 1.3㎞의 직선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孔廟 입구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3개 정원은 작은 문들과 키 큰 소나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와 격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네 번째 정원부터 건물들을 만나게 된다.
성시먼(聖時門)
싱탄(杏檀), 살구나무 아래서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을 기리고 있다.
주요 건물로는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시기에 세워진 13개의 碑亭,
송(宋)나라 때인 1018년에 건축되어 명(明)대인 1504년과 지난 세기인 1985년에 개수된 奎文閣, 살구나무 아래서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을 기린 싱탄(杏檀), 그리고 공자에게 제례를 지내는 大成殿 등이 있다.
大成殿, 용을 조각해 놓은 魚卵石이 보인다.
大成殿은 묘의 중심 건물로 공자와 안회(顔回), 자사(子思), 증삼(曾參), 맹자(孟子) 등이 모셔져 있다. 가로가 54m, 세로가 34m, 높이가 32m인 건물은 청(淸)대에 보수된 것이다.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노송나무. 공자가 직접 세 그루의 나무를
심었으나, 두 그루는 고사(枯死)하고 현재 한 그루만 남아 있다.
건물은 장식된 2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기둥은 직경이 0.8m이고
높이가 6m로 각각이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전면(前面)에 있는
10개의 기둥에는 각기 용 두 마리가 승천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장식
되어 있다. 이것들은 황제의 방문 기간 중에 황제가 시샘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천으로 덮어두었다고 한다.
대성전 앞뜰에서 매년 9월 28일5)에 공자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행해진다.
분서갱유 때 경서를 숨겼던, 공자가 사용했던 우물인 孔宅古井과
노(魯)나라 시대의 담장인 루삐(魯壁).6)
취푸(曲阜)의 문화 유물들은 문화대혁명 때에 광범위한 손상을 입었다. 1966년 11월 북경 사범 대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200여명의 ‘문화혁명소조’가 취푸에 와서 6,000여점 이상의 유물을 파괴하였다.
당시 주동자는 탄허우란(譚厚蘭)이란 여성이었다. 이들이 ‘토공대회(討孔大會)’를 열었었는데, 무려 10만 명이 동원되었다(현재 취푸의 도심 주거 인원이 6만 5천명이다).
쿵린(孔林) 입구
취푸(曲阜) 북쪽에 위치한 쿵린(孔林)은 중국에서 제일 크고 오래 된 가족 무덤으로,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다. 원래 이름이 ‘성린(聖林)’인 이곳에 공자와 10만이 넘는 그의 후손들 무덤이, 1만여 그루가 넘는 나무숲 사이에 산재해 있다.
주수이챠오(洙水橋)와 주수이(洙水)
쿵린(孔林)의 정문인 얼린먼(二林門)을 지나면, 성벽에 둘러싸인 광대한 묘역인 쿵린으로 들어가게 된다. 泗水의 지류인 주수이(洙水)를 건너 숲길을 한참 들어가면, 노란색 기와와 붉은 기둥의 享殿 뒤로 공자 무덤이 있다.
샹뎬(享殿)의 문인석(文人石)
쓰수이(泗水) 연안에 조성된 공자 무덤은 원래 규모도 작고 봉분도
없었다. 수(隋)나라에 이르러 공자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무덤이
크게 확장되어졌다.
공자 무덤. 예서(隸書)로 쓰인 금빛 묘비(大成至聖文宣王墓)가 있다.
묘비는 명대(明代)인 1443년에 건립되었다. ‘왕(王)’자는 제단에 가려 ‘간(干)’자처럼 보이게끔 세로로 길게 획을 긋는 세심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 씀도 소용없이 문화대혁명 때 무참하게 훼손되었다.
공자 후손의 무덤과 비석들이 공자의 무덤 주위에 추가되어졌다.
춘추시대부터 조성된 이들의 무덤은 최근에 조성된 직계 76대,
방계 78대 자손의 무덤까지 있다.
공자 아들인 사수후(泗水候) 공리(孔鯉) 무덤(왼쪽)과 손자인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자사(子思, 본명이 孔伋이며 中庸의 저자) 무덤(오른쪽).
漢代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비석은 송, 원, 명, 청을 거쳐, 현재 약 3,600여개의 비석이 남아 있다. 1331년에 쿵린(孔林)의 벽과 문을 세우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18세기 후반에 3.6㎢의 공간을 두르는 7.5㎞의 벽이 만들어졌다. 전체적으로 쿵린은 13번에 걸쳐서 보수, 또는 확장되었다.
공자 제자인 자공(子貢)이 심었다는 해(楷)나무가 밑둥치만 남아 있다(왼쪽). 공자 사후 다른 제자들은 3년 시묘(侍墓)를 하였지만, 6년 시묘를 한 자공을 기리는 집(오른 쪽).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에 쿵린(孔林) 또한 파괴되었다. 공자 무덤이 파헤쳐져 평평하게 되었고,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 새겨진 묘비는 훼손되었다. 심하게는 76대 적손인 공령이(孔令貽) 시체는 파내어져 대성전 앞 나무에 효시(梟示)되기도 하였다.
쿵린 입구에서 얼린먼(二林門)까지의 점포들.
공린 폐관 시간이 되자 철수하기 시작한다.
취푸(曲阜) 현성(縣城) 북문에서 쿵린(孔林) 정문까지 울창한 가로수로 이루어진 1,266m의 직선도로(林道路)가 있다. 특히 공린 입구에서 얼린먼(二林門)까지의 길은 좌우로 점포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취푸(曲阜) 시가지
쿵먀오(孔廟) 동쪽으로 공자 후손이 살던 쿵푸(孔府)가 있다.
역대 제왕들은 공자를 기리는 동시에 그 자손들에 대하여 은총을 많이 베풀었다. 서기전 195년에 한 고조(漢 高祖) 유방(劉邦)은 공자 제 9대 손인 공등(孔__)을 봉사군(奉祀君)에 봉했다.
1055년에 송 인종(宋仁宗)은 46대 손인 공종원(孔宗愿)을 연성공(衍聖公)에 봉하여, 공자 제례 주관자로 임명하였다. 이후 적장자(嫡長子)들은 중화민국이 성립될 때까지 습위(襲位)되었다. 청 건륭제(淸 乾隆帝)는 자신의 딸을 공자의 후손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렇듯 공가(孔家)는 중국에서 제일 오랜 귀족 가족사를 가진 가문으로,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가 되었다.
그들에게 쿵먀오와 쿵린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식읍(食邑)들이 제공되어, 중국 역사에서 가장 넓은 농지를 소유하며 관리하는 대지주가 되었다. 쿵푸에 딸린 재산은 청말(淸末)에 2억1600만 평으로 산둥(山東),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등 5개 성(省)에 걸쳐 있었다. 또한 각 지역에 수백 개의 재산 관리 기관이 있었다.
저택으로서의 쿵푸는 송 인종(宋仁宗) 때인 1038년에 처음으로 쿵먀오와 인접해서 건설되었다. 명 태조(明 太祖) 때인 1377년 독립된 연성공부(衍聖公府)로 쿵푸는 쿵먀오와 약간 떨어진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다. 1503년에 쿵먀오처럼 9개의 정원과 3열로 늘어선 560개의 방을 가진 건물로 확장되었다. 1838년에 쿵푸는 개수되었지만 47년 후인 188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2년 뒤 재건되었고, 모든 비용은 국가 재정에서 지출되었다.
오늘날 쿵푸는 12,470㎡에 480개의 방을 가진 152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쿵푸에서 공자 후손이 1937년까지 거주하였다. 공자 77대 적손(嫡孫)인 공덕성(孔德成, 2008년 사망)과 78대 적손인 공유익(孔維益, 1989년 사망)은 2차 중일전쟁 때 충칭(重慶)으로 피난하였다가, 국공내전 말에 타이완(臺灣)으로 옮겼다. 공덕성의 누이인 공덕무(孔德懋)는 본토에 남아 중국정부로부터 우대를 받았다. 현재 공자 79대 적손인 공수장(孔垂長)과 80대 적손 공우인(孔佑仁)은 타이완에서 살고 있다.
취푸(曲阜)의 야시장, 개고기도 판다.
취푸(曲阜)는 루난(魯南) 구릉과 루시(魯西) 평원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연 평균 기온은 13℃이며, 평균 강수량은 666㎜다. 밀, 옥수수, 면화, 석탄 등이 특산물이다. 특히 ‘孔府家酒’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을 생산하고 있다.
십 수 년의 떠돌이 세월 속에서, 그 ‘초췌한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____若喪家之狗)’는 소리를 들었던 공자는 ‘태평천국의 난’ 때부터 봉건 지배 계급의 주구(走狗)로 개 취급을 받았다.
루쉰(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 우위(吳虞)의 ‘신청년(新靑年)’ 기고문 등에서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후 문화대혁명(1966-1976)과 비림비공(枇林枇孔, 1973-1976) 때에는 무덤이 파헤쳐지고, 공구(孔狗)라고 불렸다. !
주유천하(周遊天下)할 때 정(鄭)나라 사람이 자공(子貢)에게 자신을 가리켜 상갓집 개(喪家之狗)라는 표현이 옳다고 웃었던 공자가 옳다고 웃었을까?
4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공자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大作으로 TV 드라마와 TV 만화로 제작 방영되고 있고, 급기야 350억 원의 거금을 들여 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던 영화 ‘아바타’ 상영을 자국 내에서 중단시키고, 영화 ‘공자’를 상영하게 하였다. 물론 세월이 바뀌었고 비난을 가하던 사람들과 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이유도 있겠지만, 제대로 공자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영화 속에서 공자와 계손사(季孫斯)의 화해를 공자가 추구하던 인(仁) - 대동(大同)으로 이해한 후메이(胡__) 감독의 의도가 궁금하다. 또한 대동(大同)을 정치적인 조화(調和)로 해석하는 중국 정부(공산당)의 의도가 궁금하다. 영화 ‘공자’와 같은 일련의 ‘공자열풍’이 중? ??恣?중화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한다고 하지만 ‘동북공정’ 같은 왜곡을 통한 지배권 확보가 아닌지 궁금하다. 몇 년 전 모 TV방송국에서 중국 리장(麗江)을 소개하면서 장이머우(張藝謀)의 ‘인상(印象)’을 소수민족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처럼 극찬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내 좁은 소견으로는 소수(少數民族) 특색이 사라지고 다수(漢族)로 흡수되는 조화(調和) - 또 다른 ‘동북공정’으로 보였다.
‘공자열풍’은 ‘공자학원’에까지 이른다. 우리나라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걸쳐 ‘공자학원’이 세워져 나가고 있다. 들리는 예기로 중국어 교육을 한다는데, 그 중 중국 공산당을 찬양하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이렇듯 영화 ‘공자’를 위시한 ‘공자열풍’이 중국 정부(공산당)의 권력유지 - 지배 이데올로기(ideology)에 활용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새로운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1) 오늘날 취푸(曲阜) 동남지역
2) 숙량흘(叔梁紇). 또는 추인흘(__人紇), 추숙흘(__叔紇)이라고도 불린다. 흘(紇)이 이름이고, 숙량(叔梁)은 자(字)다. 본래 상(商, 또는 殷)나라의 후예(後裔)이기에 성(姓)이 자(子)이나 종법(宗法)에 따라 그의 7대조인 공부가(孔父嘉; 孔은 字, 父嘉는 이름)부터 새로운 씨족(氏族)을 형성하게 되면서, 공부가의 자(字)인 공(孔)을 씨족(氏族) 명(名)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공자(孔子)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그의 후손들이 공(孔)을 성(姓)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3) 일부 일본 학자들은 안징재가 무녀(巫女)였다고 한다.
4) 사상이나 언론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존중받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특히 공자의 완성된 인격을 기리는 말로 쓰였다 - 孟子萬長下篇.
5) 1952년 중국 정부에 의해 공자의 출생일을 서기전 551년 음력 8월 27(양력 9월 28일)로 확정되었다.
6)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공자의 9대 손인 공등(孔__)이 경서(經書)들을 담장 등에 숨기고 종산(崇山)으로 몸을 숨겼다. 이후 한(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노공왕 유여가 자신의 집(靈光殿)을 확장하기 위하여 쿵먀오(孔廟)의 벽(壁)을 허물었다. 이때 벽속에 숨겨두었던 고문상서(古文尙書), 예기(禮記), 춘추(春秋),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 수십 편의 경전을 발견되었다. 진(秦)에 의해 문자(文字)가 통일되기 이전 전국 칠웅 중 여섯 나라의 문자로 기록되어진 문서를 발견한 것이다. 문자를 ‘벽중서(壁中書)’, 또는 ‘고문(古文)’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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