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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配길 이야기

bsk5865 2010. 10. 26. 08:59

  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23시 55분 28초 +0900
 

제170호 (2010.10.22)


유배길 이야기


심재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조선시대에 사형(死刑) 다음의 무거운 형벌이 바로 유배형(流配刑)이었다. ‘귀양’이라고도 부르는 이 형벌은 중죄를 지은 자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관 땅에 보내 종신토록 살게 하는 벌이었다. 유배형을 굳이 오늘날의 형벌과 비교해보면, 형기가 종신이라는 점, 유배지에서 노역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무기금고’에 가깝다.


유배형은 양반들에게만 행해진 형벌이 아니었다. 정치범으로서 양반 관료들이 유배된 사례가 많긴 하지만, 일반 평민, 천민들도 유배형에 처해지곤 했다. 중국의 유배형은 죄가 무거울수록 더 먼 곳으로 귀양 보냈는데, 죄인의 거주지에서 유배지까지의 거리에 따라 2천리, 2천 5백리, 3천리 등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3천리 밖으로의 유배를 시행하기 곤란했다. 그래서 세종 때에는 ‘유 2천리’는 거주지로부터 6백리 밖 고을, ‘유 3천리’는 9백리 밖 해변 고을을 유배지로 삼는 등 우리 실정에 맞게 조정하였다.


 멀리 떨어진 변방이나 바닷 속 섬으로

조선시대에 거의 전 국토가 유배지였지만, 유배지 가운데 가장 혹독한 곳으로는 아무래도 삼수, 갑산과 같은 함경도 변경 고을이나 섬 지역을 들 수 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정쟁이 격화되면서 섬 지역으로의 도배(島配)가 크게 늘었다.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섬에 유배를 보내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 하여 영조 때에 흑산도나 조그만 섬에 유배를 보내지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규제 조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에도 이들 섬들에 유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고종 때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제주도 귀양을 원칙적으로 금지시켰지만, 최익현, 김윤식 등이 제주도로 귀양갔다.



유배인이 관원 신분일 경우 호송 책임은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평천민은 형조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같은 관원이라도 등급에 따라 호송관이 달랐는데, 정2품 이상, 즉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 이상 고위 관원은 의금부 도사(都事)가 맡았다. 그리고 이외의 관원들의 경우도 당상관은 서리(書吏), 당하관은 나장(羅將)이 나누어 맡았으며, 관직과 무관한 평천민은 지나는 고을의 역졸(驛卒)이 번갈아가며 호송을 책임졌다.


유배지에 도착하기까지 드는 비용은 대개 유배인 자비로 해결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 압송관의 여행 경비까지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압송관 입장에서도 죄인의 압송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으므로 으레 수고비를 챙겼다. 이는 유배인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신분 따라 처지 따라 천차만별 유배길

 

어떤 직책, 어떤 신분인가에 따라 압송관도 달랐듯이 유배지로의 긴 여행길도 죄인 처지에 따라 대우가 크게 달랐다. 평천민 들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동하는 것은 예사였으며,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반해 조만간 정계 복귀 가능성이 높은 관리, 제법 힘깨나 쓰던 돈 많은 양반들의 경우 유배길의 불편함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을 수령과 지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지나는 길에 선산(先山)에 들러 성묘를 하거나 중간에 며칠씩 쉬어가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연구에 의하면, 유배길이 호화판 유람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경종 2년(1722) 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갑산(甲山) 유배 길에 오른 윤양래(尹陽來)의 경우 전체 18일 여행 동안 가는 곳마다 고을 수령으로부터 후한 접대는 물론 많은 노자를 받았다. 선조 22년(1589) 함경도 길주(吉州)로 유배된 조헌(趙憲)은 경유지인 안변(安邊)에서 부사(府使)와 활쏘기와 만찬을 즐기다가 다음날 술이 깨질 않아 출발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신유옥사(1801)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장기에 유배를 갔는데, 유배길을 지나며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남겨 놓았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조사를 받고 강진으로 유배를 갈 때는 형님 정약전과 나주까지 함께 했다. 형제는 나주 주막에서 이별을 하고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향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고, 정약용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학문적 업적을 쌓아 고향에 돌아왔다.


* 부기 : 오는 11월 5일부터 유배길을 재현하는 행사를 서울에서 시작한다고 하여(강진의 다산동호회와 강진군 주최) 다산연구소의 원고 청탁을 받았다. 기왕에 발표했던 글 가운데 일반인의 유배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심재우, 『극과 극, 조선시대 유배의 재발견』(『조선 양반의 일생』, 2009, 글항아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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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심재우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한국사)

· 저서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통제』(2009, 태학사)

          『조선 양반의 일생』(2009, 글항아리) (공저)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2009, 두산동아) (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