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소담엔카 운영자 11.05.08 07:02
테마에세이- 民族魂의 活火山
-테마 에세이- 민족혼의 활화산 (제92주년 3.1절에 붙여) 黃 晋 燮(에세이스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는 한반도를 열강외교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비열한 땅 따먹기 게임이 전개되었다.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을 종결하기위해 이홍장(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맺은 조약이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다.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한반도를 그 세력권에 넣고 대륙으로 진출할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이 조약을 중재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1902년 1월 30일에 체결된 제1차 영일동맹(英日同盟)에서는 남하하는 북극 곰 러시아를 공동으로 막고, 영국은 청국에서, 일본은 한 반도에서 각각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확인하면서, 이를 지키기 위해 상호협력하기로 한바 있었다.
1905년 8월 12일에 체결된 제2차 영일동맹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것을 일본이 양해하고, 한반도에서 가지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영국은 보장한다고 명시하였다.
1903년 4월 러시아는 앞서 획득한 압록강 일대의 삼림 벌채권과 거기에 종사하는 종업원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00여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압록강을 건너 용암포까지 쳐 들어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 5월에는 러시아인 40명을 거주케 하였고 포대를 설치하여 만주의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선(鳳凰線)을 거쳐 안동(安東/지금의 丹東)에서 용암포에 이르는 지역에 1개 여단병력을 배치한 다음 용암포를 조차하도록 강요, 이를 획득한 바 있었다. 이에 일본이 강력히 항의하였고 러 •일간의 각축이 첨예화되자 북위 39도선 분할 안을 제안하였으나 일본 측에 의하여 거부 되었다. 이 용암포 사건은 러일전쟁을 유발한 요인이 되었었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1년 반 동안 계속된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를 어느 쪽이 차지하느냐 하는 러⦁일 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였다. 일본은 중국 여순 항의 러시아 군대를 괴멸시키고, 압록강 건너 만주에서 전개된 육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동해에서는 러시아가 자랑하던 세계적 해군력인 발틱 함대를 격파하였다.
러⦁일 양국은 각각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종전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거중조정으로 러일전쟁을 종결하는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 졌다.(1905. 9. 5)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는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고 명시하였으며, 그 비망록에는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의 승인 하에 정치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은 이 조약의 요지를 사전에 독일과도 조율해 둔 상태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0.27.-1919.1.8.)는 러일전쟁을 종식시킨 공적으로 미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포츠머스조약체결 2개월 전, 그해 7월 29일, 미국은 일본에 접근하여 비밀조약을 맺었는데 그 요지인즉, 첫째, 미국, 영국, 일본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이며, 둘째,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일본이 인정하고, 셋째, 일본의 한국 점령을 미국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루스벨트대통령 특사인 윌리엄 하워드 테프트 육군 장관과 가쓰라 타로(桂 太朗) 일본 총리대신이 맺은 이른바, 가쓰라 테프트 밀약이다. 깊이 비밀의 베일 속에 묻혀 있다가 미국 존 홉킨스대학교의 T데넷 교수가 1924년 루스벨트서한집에서 발견해 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은 시모노세키 조약과 포츠머스조약을 중재하였고 일본의 한반도 침탈을 눈감아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미국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방이고 동맹국이다. 한국 전쟁 때 미국은 우리를 도와 13만 7천명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고, 그 중 5만4천명이 이 땅에서 아까운 젊음을 불태웠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은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인 것과 같이, 미군을 우리 땅에 주둔케 하는 것은 우리의 안보를 돕고 있는 우리의 국익 때문이다. 양국의 국익이 서로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하겠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치욕을 당하였고, 급기야는 외교권을 빼앗겼으며 이 땅에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이어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직후에 강압으로 맺은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1907.7.24)으로 행정권과 사법권을 빼앗겼고, 군대마저 해산되었다. 끝내는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탄으로 국권은 유린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기나긴 36년 동안 압박과 수탈의 역사가 흘러갔다. 결국 세계열강은 일본의 한반도 침탈을 외교적으로 승인했다는 사실이 역사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운명이 남의 손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뼈를 얼어붙게 하는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만주벌판에서 우리의 독립군들이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뜨거운 피를 뿌리면서 가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어도,
전해지는 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이준(李儁)열사가 배를 갈라 창자를 뿌리는 장렬한 순국을 하였어도,
3.1운동 때, 소리 높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피맺힌 절규를 외치면서 순국과 옥고와 고문 등,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을 당하였어도,
제국주의 열강은 뒤에 앉아 “아 코리아,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서야” 하고 연민의 정은 느꼈을지언정, 우리를 도와주지는 않았다. 우리는 19세기와 20세기 초, 세계정세에 어두웠고,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다.
그런데 100년 전 그때와 똑같이, 우리는 지금도 세계 강대국들의 한복판에 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영토침탈의 야욕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두만강 하류의 하천도서 녹둔도(鹿屯島)는 세종대왕 때 육진개척 이래 우리의 고유영토였다. 1587년 당시,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여진족의 침략을 막아 지켜낸 우리 땅이었다. 현재의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90년 무렵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있어, 벼, 조, 옥수수, 보리 등이 재배되었고, 연어 붕어를 비롯한 민물고기가 많이 잡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860년(철종11) 청나라와 러시아의 북경조약 체결로 녹둔도가 러시아 영토가 되고 만 것을, 1889년(고종26)에야 비로소 알고 청나라에 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84년 11월 북한과 당시 소련 당국자 간에 평양에서 국경문제에 대한 회담을 열어(조, 소 국경회의) 관심을 끌었으나 미해결로 끝나버렸다. 1990년에는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섬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한 체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있는 상태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만주 벌판에서 용약하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자기네의 역사라고 우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나라 서남해역의 이어도(離於島)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파랑도(波浪島) 라고도 불리우는 이어도는 제주도 서귀포시 마라도로부터 149km 서남쪽에 위치한 우리나라 해저광구 제 4광구에 속하는 한국 대륙붕이다. 중국 유인도인 위산다오(余山島)로 부터는 약 2배에 가까운 287km나 떨어진 수중 암초로 국제법상으로도 당연히 우리 영토에 속하는 것이다. 2003년 6월에 우리 정부에서 이어도 해양 과학기지를 설치하였다. 중국은 부당하게도 이어도의 영유권을 넘보고 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도 논의의 여지없이, 우리 땅임이 분명하고 일본정부가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대한제국의 영토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독도는 자기네 영토라고 강변하고 있다.
2008년 봄부터 쇠고기 문제로 국내는 극도의 혼란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 때에 일본은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그 해설서에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기술함으로써 문제를 일으켰다.
나라 안에서는 미국 쇠고기를 안 먹겠다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100번이나 촛불데모를 하였고 서울 시내는 수라장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2.300여회의 데모소동이 벌어졌다. 때마침 독도문제가 일어났는데 어째서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국토수호의 촛불은 밝히지 않는 것인가?
한편 금강산에서는 우리의 관광객이 인민군의 피격을 받아 쓸어졌다. 그 원인과 과정이 아직도 소상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광화문에서 단 한번이라도 북한에 대한 항의와 통분의 시위기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바로 우리의 정통성과 민족정기의 문제이며 국민정신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20세기 초엽에 일어났던 3.1운동은 90년의 역사가 흘러간 오늘에도 우리들에게 엄숙한 교훈과 명령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어느 때 어느 시대에도 민족정기를 가다듬고, 힘 있는 나라, 세계 변방국가가 아닌 세계 중심 국가를 건설하라는 과제이다.
3.1운동은 밖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피압박민족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일대 경종이었다.
안으로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을 뿐 아니라, 세대 간의 격절감도, 계층 간의 단층의식도, 지역 간의 갈등도 없이 거족적으로 봉기 하였던 민족 총 단합 항쟁이었다.
오늘에, 우리사회의 갈등과 혼돈을 극복하고 온 국민이 하나 되어 힘 있는 나라, 선진국 건설에 매진하는 것이 역사적 대 명제일 뿐 아니라, 3.1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족정기와 민족자존을 영유케 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민족은 그것을 반복하도록 심판 받을 것이다.” 철학자 「조르지 산타야나」의 경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세계평화와 아시아의 공동번영을 위해 이웃과 협력하고 선린관계를 맺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용서는 할 수 있어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세기의 걸출한 역사가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갈파하였다. “역사는 오늘과 내일의 대화일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 고 명시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민족혼과 대한민국정신의 영원한 활화산(活火山)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처절했던 역사를 가감 없이 전해주고, 앞날을 대비하는 경각심을 촉구해 줄 책임이 기성세대에 있다. 자라나는 어린세대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던 지난날을 소상히 가르쳐야 될 책임 또한 기성세대에 지워져 있다.
1910년은 나라를 빼앗긴 해였다.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였다. 1945년은 조국광복을 맞이한 해였다. 2011년 3월1일은 3.1운동 그때와 오늘의 조국, 그리고 앞날의 민족 진운을 더불어 생각하는 3.1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제 92주년 3.1절에 즈음하여 우리들의 애국 혼을 다시 일깨우고 3.1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소담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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