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 사람들2011/04/0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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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피터 박사
이휘소 박사는 한국이 자랑할만한 훈륭한 한 '재미' 한인 학자였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알려저 있는 그런분은 아닙니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나온 이래, 한국 사람들은 이희소 박사를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이용후'박사와 동일 인물로 알게되어, 마치 박대통령의 '핵무기 개발'계획과 연관된 분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사실은 저도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본것이지만) 간단히 이휘소 박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허구'성을 나열해보겠습니다.
우선, (1) 한국에서는 그를'핵 물리학자'으로 알려저 있지만, 그는 '고 에너지 소립자 이론 물 리학'자입니다.
(2) 그는 한국 국적을 계속 가진것이 아니라, 이미 1968년에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으며, 미국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미국명, '벤자민" 이 나와 있습니다.
(3) 그는 박대통령의 편지를 받은적이 없으며, 그래서 박 대통령과 만난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하는,그의 '일기'라는것도 다 없는것입니다.
(4) 더구나 동경에 왔다가, 밤중에 한국, 청와대에 갔다 왔다는것은 완전 허구이며, 그해에, 그는 동경에 왔던적은 없습니다.
(5)그러므로 다리뼈에, '유도탄 및 핵무기' 재료를 수술로 삽입하고 한국에 와서 박대통 령에게 전달했다는것은 그야말로 '소설'에 불과한 '허무 맹랑'한 얘기입니다. 더구나 그 '픽션'에 나오는, '10센티-4센티' 정도의 물건을 다리뼈에 수술해 넣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다니며, 강의도 할수 있다는것입니까?
(6)그가 받았다는 훈장도 박 대통령이 특별히 준것이 아니라, 재미 과학자들이 건의하여 된것이며, 그것도, 3등급인 '동백장'이였다고 합니다.
(7)그의 죽음이 마치 미국 정부가 죽인것처럼, 소설이나, 인터넷 등에 떠돌아 다니지만, 그는 'I-80' 하이웨이를 달리다가, 단순한 '교통사고'로 사망한것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그의 가족도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무슨 '의혹'같은것은 없으며, 미국 하이위에서는 언제나 교통사고 가 발생합니다.
(8) 박 대통령의 죽음도, 마치 한국정부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죽인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그것도 전혀 근거 없는 소리입니다. 김재규 쯤 된 사람이 (일국의 정보부장)이 장래가 불투명한, 미국의 CIA 의 사주를 받아 대통령을 쏘겠습니까? 다 '소설'의 얘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9) '핵개발'은 어떤 학자 한사람에 의해 개발될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나는 과거 한국의 해군 사관 학교에 근무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박대통령의 '미사일, 핵 개발' 의지에 의해, 사관학교 교수로 있던, 그 계통의 학자(교수)들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것을 보았습니다. 박대통령이 어찌 이희소 박사 한사람에게 그렇게 매달렸겠습니까?
(10)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때, 아침에 미군들과 반바지 바람으로 '조깅'을 한것을 두고 , 한국이나 박대통령을 무시한 처사' 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것을 이해할수 없군요.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또 사병들과 어울려 함께 뛰는것, 또 그렇게 부지런한것, 다 훈륭한 대통령으로 볼수 있는 점입니다. 카터는 물론 대통령으로서는 '부족한 면'이 있는 사람이지만, 박 대통령은 물론, 남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는 ,그런 교만한 태도는 없는 사람입니다.
나도 오래전 '무궁화꽃..' 소설을 읽어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 소설은 '허구'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본래 소설이란 'fiction' 이지 'fact' 는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것을 읽고 ,그것이 '사실'처럼 기술되어 있기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진실'처럼 믿게 된다는것입니다.
그 소설은 한마디로, 약소민족의 열등감 '컴플렉스'를 부추겨, "반미 감정을' 일으키게 하고, '우리 민족 끼리'의 감정을 일으켜, '친북' 의식을 암암리에 불어 넣는 '반미 친북' 적 소설이라 고 나는 단정합니다.
그 소설에 나오는 '북의 통치자'는 또 얼마나 멋있게 등장합니까? 그 소설의 저자를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소설로 인해서 아마 많은 한국의 젊은 이들이 미국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졌을 것이고, 북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최면적' 인식을 갖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 이희소 박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허구'성의 글들이 계속 인터넷에 떠다니고 있는것에 대해 심히 개탄하는 바입니다.
오죽하면, 이희소 박사의 부인이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했겠습니까? 더 이상 사람들을 오도하는 그런 글들에 '현혹'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래에, '위키 백과'에 나와 있는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김진명이 1993년에 쓴 소설이다. 후에 영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도 만들어졌다.
[편집] 소설에 대한 비판
김진명의 1993년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는 제3공화국 시절 대한민국을 위해 핵무기 개발을 하다 강대국의 공작에 의해 죽은 물리학자 이용후가 등장하는데, 김진명은 소설 속 이용후는 이휘소를 모델로 한 인물이며, 이휘소에 관한 이야기는 공석하의 소설《핵물리학자 이휘소》를 바탕으로 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30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1]
그러나 실제 이휘소는 핵개발과 박정희 독재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한국의 입자물리학 대학원 교육을 준비하고 KAIST 교수로 부임하는 것까지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모든 계획을 취소했던 적도 있다.[2] 이휘소는 1971년 여름에 당시 한국과학원 부원장 정근모 박사와 함께 한국에서 물리학 하계대학원(Summer School, 일본식 표현으로는 夏の__校(여름 학교))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이미 유럽이나 미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휘소는 한국에서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을 보고 1972년 초 정근모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3]
“ |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중인 하계대학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하계대학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정권과 그 억압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 |
이휘소의 유족들은 소설가 공석하와 김진명을 상대로 이휘소와 본인들에 대한 명예훼손과 인격권 · 프라이버시 침해로 고소했다. 해당 재판에서 법원은, "소설 이휘소" 및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문제된 사안에서, "이휘소는 뛰어난 물리학자로서 우리 나라 국민들에게 많은 귀감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공적 인물이 되었다 할 것인데, 이러한 경우 이휘소와 유족들은 그들의 생활상이 공표되는 것을 어느 정도 수인하여야 할 것이므로 유족들의 인격권 또는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4]
이후 소설가 공석하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그 소설은 20퍼센트 정도가 픽션이다. 그가 한국의 핵 개발에 관련해서 한 일이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거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핵개발 초청을 위해 이휘소에게 썼다는 편지의 내용이 그 20퍼센트의 픽션이다. 나는 소설 속에서 일본과 한국과 주변 몇 국가에 있었던 소문을 픽션화 시켰으며 진실은 알 수 없다고 했었다."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두 픽션이지만, 이휘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어떤 편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며 왜냐하면 이것은 (고) 박순희 여사(이휘소의 생모, 2000년 작고)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보문동에서 대저동으로 이사를 갈 때 가장 중요한 박스 하나를 분실했는데 그 속에 그 편지가 들어있었다고 하며, 고 박순희 여사는 후일 나에게 그 편지 내용에 대해 구술하였고, 나는 그 내용을 토대로 그 편지를 각색하였다. 원문은 아니지만 내용은 같다"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휘소의 남동생 이철웅 내외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30년 동안 집에서 이사를 간 적이 없고, 한 군데에서만 살았다. 공석하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또한 그런 내용의 편지(이휘소의 한국 핵개발 협력이 전부 픽션이라고 인정한 후에도, 공석하가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분실한 일도 없다." 라고 반박하였다.[5]
KBS는 마리안 리 여사(이휘소의 부인)의 녹취록을 공개했는데, 리 여사는"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며 비밀이 없었다. 남편이 특히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기색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우리는 평범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이런 소설들이 한국인들에게 심어준 잘못된 인식 때문에) 나는 남편의 명예가 명백하게 훼손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한국인들은 아주 명석해서 그런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믿을 리가 없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토로하고 있다.[6]
공석하는 핵개발 의혹을 전국적으로 부각시킨 것에 관해 "픽션이 개입되어 있을지라도 독자들에게 정말로 읽게 하고 싶었다. 순수한 과학자로서만 그 사람을 작품화 시켰을 때는 대중화가 힘들다. 또, 과학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 인식이 상당히 어렵다. 일단은 이휘소라는 사람은 이런 일을 했다는 전제를 깔아놓고 20퍼센트는 픽션화 시키지 않으면 소설로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해명하였다.[7]
이철웅은 이에 "거짓을 바탕으로 한 명예의 고양을 고양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게 우리 가족들의 입장이다. 명예가 고양되었다고 하면, 이것은 반드시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만약 명예훼손이 될 만한 사실이 있었다면 차라리 훼손이 낫지, 이런 식으로 잘못된 근거, 거짓에 의해서 명예가 고양이 되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다"고 말하였다.[8]
또한, 수 명의 물리학자들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핵무기에 대한 정보는 당시로서도, '한 사람의 이론 물리학자가 목숨을 걸고 정보를 빼내올 만큼의 극비 정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핵 무기의 제작 원리는 당시로서는 그렇게 큰 비밀도 아니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쌓이는 기술적인 경험의 문제일 뿐이었다." 라고 진술하였다.[9]
<필자 / 현재 재미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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