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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6대 단종 (哀史)애사

bsk5865 2012. 1. 15. 16:42

보낸사람: 엔카 컴나라 운영자 12.01.1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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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6대 단종 (哀史)애사|◈...자 유 게 시 판

 

 

조선왕조 제6대 단종 애사

 

 

 

단종의 탄생과 세손으로의 책봉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경혜공주에 이어 홍위 왕자를 분만하게 되었는 데,
난산이라 간신히 아이를 낳긴 했 지만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 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혜빈 양씨는 후덕한 여자였 다.
태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어머니를 여윈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 기 위해 자신의 둘 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 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30년)
에 세손 에 책봉 된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 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 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왕위찬탈의 조짐과 왕의 죽음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 에 태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 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 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 았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 기에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렀고 왕족 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 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간의 세력 다 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 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 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 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 황보 인
등 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 를 피살하고, 황보 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계유정난으로 고명 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 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으 며, 또한 왕을 대신 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 의 집권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 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하였 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 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 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 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
했다는 소식을 접하 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 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 난다.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 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 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 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가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 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 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 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 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단종은 1681년(숙종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 도 영월에 있다.
 
계유정난의 배경과 후세의 평가

백관이 말하기를, 의정 부가 있는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됐 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 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의 예는 곧 의정부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한 편으로는 왕권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음을 반증 해주고 있다.

하지만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세력을 키워 수양대
군을 제거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수양은 자청해서 명나라 에 고명 사은사로 간 바 있는데
만약 의정부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면 이 기간 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은 그의 수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을
다녀왔다.
이는 곧 당시 김종서 등이 수양의 행동에 별 로 관심이
없었 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수양은 명을 다녀옴으로 써 의정부 대신들에게
자신이 정권에 대한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 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의정부 대신들을 안심시켜 허를 찌르겠다 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는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이 명에서 돌아온 뒤 급진전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 아온 1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했 다.
그는 우선 김종서를 제거했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 고,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
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 고는 거사를 성공 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해 10월 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 등 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 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 죽였으며,
영의 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 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
시켜서 죽였으며, 단 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전락시켜 죽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
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또한 비록 의정부 대 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왕권에 대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이 권한을 펼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시적인
일이 었다.

조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에서는 별 문 제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 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 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 가일 것이다.
 
단종 복위 운동

세조 즉위 4개월 만에 발생한 단종복 위운동은 집현전 학사
출신의 대신들과 일부 무인들이 주동이 된 사건 이었다.
계 획: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
체화되었다.

당시 세조는 명나 라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 어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 획.
결과와 그 이유: 세조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연회장을 나서는
것이 위험하다 고 판단한 한명회 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 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 살 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결국 단종 복위계획에 가담 한 사람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두 번째 단종 복위 운동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 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일으킨다.
동기와 결말: 그는 종친 자격으로 수 양대군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양 이 단종을 상왕 으로 밀어내자 이에 항의하다가
유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유배 지를 전전하던 금성대군은 순흥 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부사 이보흠 과 모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 노의 고발로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그는 형제들 중 세조 의 등극에 반기를 든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정조 때 사 육신을 비롯해서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의 어정배식록을 편 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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