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엔카 컴나라 운영자 12.03.09 07:47
기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명예회장 1927년 9월 29일 ~ 2011년 12월 13일(박태준}
■ “내가 대선배여서 李 당선자가 어려워했는데, 이제 거꾸로 될지 모르죠.”
■ 이병철 회장 “견실한 재무구조 인정”… 이후 의기투합했다 ■ 정주영 회장, 포스코 둘러본 후 자신감 얻어 조선소 기공식 나서 ■ 김우중 회장, 넘치는 아이디어 관철하지 못해 곤경에 처해 ■ 3선 개헌 지지 서명 거절… 박 대통령 “그 친구 제철소 일이나 잘하게 해”
<월간중앙> ‘한국의 상징’ 서베이에서 경제인 3위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선정됐다. 생존자 중에서는 1위다. <월간중앙>은 이번 호에 박태준과 박세리(스포츠인 1위), 이어 다음호에는 박경리(문화예술인 생존자 1위)·박원순(운동가 생존자 1위) 등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할 예정이다.
오피니언리더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월간중앙> ‘한국의 상징’ 서베이에서 한국 경제계의 두 거두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그는 오늘의 포스코를 일으켜 세운 주역이자 격변기 대한민국 정치·경제사의 산 증인이다. “국민적으로 경제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활력을 되찾을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5% 성장은 해야 하는데, 지도자가 잘하고 그에 따라 사회 분위기가 한번 잘해보자는 쪽으로 조성되면 여기에 1~ 2%를 더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국가 지도자와 정치권이 경제를 해보자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또 노동계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다행히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노선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전통적 계급투쟁노선을 버리고 말 그대로 실용노선으로 가야 합니다. 나는 왜 이명박 당선자가 노동계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미루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는 지금 아일랜드와 같은 리더십과 국민적 결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손바닥 하나만으로는 박수를 칠 수 없어요.” “나는 포항에서 오래 일했고, 아시다시피 당선자도 포항 사람이죠. 당선자가 기업에서 오래 일하는 동안 선후배로서 어쩌다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당연히 그 시절에는 내가 대선배였죠. 그때는 나를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앞으로야 거꾸로 될지 모르지만.(웃음)” “대한민국의 장래는 국제경쟁에 달렸습니다. 국제경쟁에서 밀리면 대한민국은 끝장입니다.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이 나라가 제자리를 지킬 수 있어요. 무섭게 추격하는 중국·인도·러시아 등에 추월당했다가는 여기서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내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세계가 시장입니다. 그런데 국제경쟁에서 이기려면 국민이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비서실장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조정 역할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럴 때일수록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비서실장을 맡아야 합니다.” “기업인 중 이병철 회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회장은 본래 우리나라에서 제철소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경제 기반이 약하다는 거였죠. 일본도 메이지(明治)유신 때 시작해 실질적으로는 2차대전 이후에나 성공했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죠. “뭐 그렇게까지…. 제철소라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커다란 고로에서 쇳물이 나오면 다시 여러 단계의 공정을 거치죠. 다이내믹하다고 할까요?”
- 이번 <월간중앙> 서베이에서 경제인 4위는 최근 특별사면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었습니다.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수출을 늘려 국난을 극복하자는 파격적 제안을 했죠. “나도 한 제안입니다. 축소조정의 방향이 아니라 확대조정으로 가자는 것이 골자였죠. 축소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하던 일도 그만둬야 하고 국민의 사기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외화의 밸런스는 조절하되 확대조정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아이디어가 많은 분이었어요. 행동력도 있었는데,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대로 관철하지 못해 문제가 생겼죠.” “ 그런 점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라 전체의 기강이 해이해진 듯합니다. 공무원사회도 그렇고, 기업 쪽도 그렇고.” “나는 이 당선자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당선자와 둘이 식사하면서 신중하게 생각하시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있지만 제대로 스터디해 보지 않았어요. 어쨌든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협조하는 분위기가 돼야 합니다.” “장관회의는 기업으로 치면 중역회의입니다. 총리 시절 비서실에 회의 준비를 착실히 시켰죠. 확인도 철저히 하고. 그러다 보니 장관들이 대통령보다 내 앞에서 더 긴장합디다. 총리는 행정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한·일 관계가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과거 신일본제철의 사이토 회장은 ‘부메랑론’을 폈습니다. 한국에 기술을 이전한 결과 따라 잡혔다는 거였죠. 그러나 스승보다 나아지는 것이야말로 스승에 대한 보답입니다. 포스코가 그 실례죠. 지독하게 따라붙으면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느슨하게 해서는 물론 못 따라잡죠.” “한마디로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우뚝 서야죠. 포스코에서는 창업세대가 심어놓은 애국심, 기업정신, 구성원들의 좋은 분위기, 애사심 그리고 책임자들의 우수한 자질 등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기업이라는 위상을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우향우 정신은 지금도 필요합니다. 우향우가 뭐냐? 사심 없이 헌신하자는 거예요. 무한경쟁, 사생결단의 국제경쟁시대일수록 기업들이 우향우 정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파이넥스 공법의 경제성에 대해 목표의 95%는 달성했다”고 말했다. “경영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외국의 사례에 한국적 요인을 접목해 플러스 알파를 찾아내는 거죠.” “리더십 부재, 교육의 난맥, 집단갈등, 분단, 국민정서 등이죠. 무엇보다 리더십 문제가 큽니다. 개인적으로 군에서, 기업에서, 그리고 정치현장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나름대로 실천적 노력도 했고요. 리더가 잘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따라가는 편이 유리하니까요.”
“모든 길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놓쳤지만, 나는 교육에서도 특별한 보람을 느낍니다. 포스텍과 포스코교육재단 산하의 열두 학교는 언제 떠올려도 포스코를 대할 때처럼 가슴이 뿌듯해지죠. 나는 인생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업인으로서 포스코를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일본의 각계 지도자들을 설득했던 것이 특히 잊히지 않습니다. 나는 애국심을 발휘했고, 일본사람들의 영혼과 신뢰를 얻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는 다시 애국심을 발휘할 것이고, 그러면 결과는 더 좋겠죠. 그 사이 우리나라는 더 발전했고 국민도 더 성숙해졌으니까요.” “생존의 길을 찾아 일본으로 들어간 아버지의 뒤를 좇아 현해탄을 건너간 수많은 식민지 아이들 가운데 사춘기를 벗어난 무렵에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신생 독립국의 어른으로 성장한 다음, 유·소년기에 어쩔 수 없이 익혔던 일본어와 일본문화로써 가장 훌륭하고 가장 탁월하게 조국에 이바지한 인물은 박태준일 것이다.” “마쓰시타 선생이 정경숙을 세웠듯 나도 포스텍(포항공대)과 일류 학교들을 세웠는데….(웃음) 일본이 2차대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 선진국으로 올라섰지만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마쓰시타의 생각이었죠. 마쓰시타정경숙의 탄생 배경입니다. 그분의 철학은 단순했습니다. 평화와 행복은 번영하는 사회라야 이뤄지고, 지속적으로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좋은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제철소에는 고가의 설비가 많습니다. 그래서 보험에 드는데, 보험회사에서 리베이트로 7,000만 원이 나왔습니다. 지금 돈으로 700억 원 정도 될 거예요. 그 돈을 당초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중요한 선거가 많았는데 번번이 ‘정치자금은 절대 못 낸다. 돈이 나올 데가 없다’며 버텼거든요. 막상 그러면서도 가슴이 아팠죠. 보험회사에서 들은 대로 리베이트는 보험사 예산에 책정돼 있는 돈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이 분이 다시 돌려주면서 나더러 마음대로 쓰라는 거예요. 포항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죠. 사원주택은 지었는데 학교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철장학재단을 만들고 각급 학교를 하나 하나 만들어 나갔죠.”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이나 잘하게 내버려둬.” “누가 보든 말든 나는 성격을 드러냅니다. 사실 건전한 사람들 눈에는 우리나라가 건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불건전한 것이 많아요.” “나는 애초에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어쩌다 끌려간 거지. 숫자 맞춰 주러.” “우선 국회의원들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지 못했어요. 기업인에게도 정치자금 달라는 소리나 했지 규범적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기업인들도 물론 책임이 있죠. 그런 점에서 일본사회가 부럽습니다. 일본은 서로 인정합니다. 정치인들은 기업인들이 일본경제를 일으키느라 고생했다고 인정하고, 기업인들은 정치인들이 패전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합니다.” “많이 닮았지. 닮은 데가 많아요.” “그런 생각 했으면 타협했겠죠. 그랬다면 YS가 먼저 하고 그 뒤에 하고 그랬겠지. 그런데 타협 안 했잖아요? 민자당에서 3년 동안 김종필 총재(JP)와 셋이서 매일 아침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잘 알아요. 일을 같이 안 했다면 모를까, 같이 해봐서 아는데 어떻게 밉니까?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결국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저질렀지. 외환이 고갈된 상태에서 수습해 달라고 나한테 왔습디다.” “JP야 유능하지.” “민족성과 관계가 있는 듯싶습니다. 음식점이 고달프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그렇지만 일본사람들은 부모가 한 일 나라고 못할까, 이렇게 생각하죠.”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는 청년 실업자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딱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살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전자의 경우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고, 후자는 사회 분위기 탓이 큽니다. “일본에서는 원로들이 할 말을 합니다. 원로로서 발언도 하고, 이들에게서 훈련받은 사람들도 원로를 선배로 대접하죠. 결국 사회 분위기가 제대로 잡혀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틀렸어’ 하는 분위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틀린 사람도 많지만 옳은 말 하는 사람도 많은 것을 알아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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