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노을05 운영자 12.08.14 11:03
光復 67周年- 그때 그 기쁨 그 感激
http://www.youtube.com/v/RIFr324Lk4Y?version=3&hl=ko_KR"
1절 :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절 :
꿈 엔들 잊을건가 지난일을 잊을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나리니
힘써힘써 나가세 힘써힘써 나가세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밤새도록 기뻐서 울었다...
1945. 8.15일
해방을 맞아 모두 길거리를 나와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전남 광양 서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군민들. (1945년 8월15일)
전국에 메아리진 해방의 기쁨 -
조국해방은 방방곡곡 어디라 할 것 없이 기쁨과 감격의 물결을 이루게 했다.
사진은 1945년 8월16일 전남 광양읍 목성리에서 주민들이 해방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李坰謨씨 제공)
조국으로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 -
왼쪽 세번째가 법무위원이었던 이시영,
다음이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순이다.
왜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광화문 네거리으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1045년 일제에 해방후 해방 경축 전국 체육대회-종합 경기대회-
1945년 10월27일에 열린 이 대회는 해방 후의 첫 전국 체전.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고자 박은 것으로 보이는
전남 해남 옥매산 정상의 쇠말뚝.
해남군 황산면과 사회단체로 구성된
'해남 옥매산 쇠말뚝 뽑기 추진위원회가
오는 8·15일 광복절을 기해 이 쇠말뚝을 뽑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한국이 독립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날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독립기념관의 경축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기념 행사를 거행한다.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정부는 저녁에 외교사절 등을 초청하여 경축연회를 베푼다.
기념식에서는 정인보가 작사하고, 윤용하가 작곡한 〈광복절의 노래〉가 연주된다.
◈ 1894년 . 19세
동학군 토벌을 위해 일어난 진사 안태훈(안중근의사의 부친)과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고 구월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이동엽부대의 습격을 받아 패하였습니다.
◈ 1896년 . 21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
◈ 1908년 . 33세
안창호 등 애국지사 104명과 신민회 조직하여 참여. 안악에 양산학교 설립.
◈ 1909년 . 34세
신교육 운동과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배일운동을 전개.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 사건 관련자로 몰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 후 석방..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전념함.
◈ 1910년 . 35세 :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여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결의함.
◈ 1919년 . 44세
3. 1운동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
◈ 1926년 . 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 1927년 . 52세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으로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취임.
◈ 1932년 . 57세
이봉창의사로 하여금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함.
윤봉길의사에게는 폭탄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함. 한국독립당 등 5개 단체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 1935년 . 60세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이사장으로 취임.
◈ 1940년 . 65세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됨.
또한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어 한국광복군을 조직 후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
◈ 1941년 . 66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5개항의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
◈ 1943년 . 68세
미국 O.S.S와 합작으로 국내침투를 위해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
3.1절 기념대회에서 <임정에 국제지위 주기를> 를 연설. 장개석과 회견 (7.26) ,
◈ 1944년 . 69세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
◈ 1945년 . 70세
해방 후 귀국하여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건국 포부와 방책을 밝힘. (11.26).
모스크바삼상회의 소식에 반탁운동 전개. <3천만에게 고함> 을 엄항섭 대독으로 방송.
◈ 1946년 . 71세
비상국민회의를 조직 후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취임.
대한독립청년단을 발족하여 부총재에 선출.
미국 하지 중장과 요담하여 좌우합작에 찬성, 좌우합작 7원칙 발표 ( 10.13 )
◈ 1947년 . 72세
우익반탁위원회를 구성 후 위원장에 취임.(1.26) ,
대동청년단 결성하여 부총재 취임. (9.21)
◈ 1948년 . 73세
김구 선생 등 3영수 19일 하지와 북조선 정권수립설에 대해 요담. (2.19)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에 남북회담 제의함. (2.25)
◈ 1949년 . 74세
성금을 내어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설립. (1.29)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피습을 받아 운명. (6 .26)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신민들은 1945년 8월15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방송에서 히로히토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신민들에게 “견디기 어려움을 견디라”고 설득했다. 민음사 제공
패전국 일본 병사가 고개를 떨구고 쫓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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