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養常識函

[석유파동] 1.2차 oil shock

bsk5865 2012. 9. 8. 14:18

paraguay netwwork 

 

제1차 석유파동 발생,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자원민족주의 세계사주요100장면

2011/09/05 22:26

 

복사 http://jugangyopo.blog.me/140138579729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자원민족주의
-제1차 석유파동 발생(197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74년/긴급조치 1,2,3,3호 선포,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1975년/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 (찬성 73.11%)
1979년/박정희, 피격 사망


비동맹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새로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한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운하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의 화약구 중동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열흘 후인 10월 16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합의 페르시아 만 6개 석유수출국은 OPEC회의에서 원유
고시가격을 종전의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17%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17일에는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5%씩
줄여나가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해 석유수출을
금한다고 했다.

 

 

그해 말 원유가는 배럴 달 5,110달러에서 11.651달러로 다시 인상되었다.
단기간에 4배 가까이 치솟은 원유가는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제품생산
부족과 제품가격 상승으로 심각한 불황과 인플레이션에 휘말렸다.

 

1967년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은
참패를 했다.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이집트와 요르단은 단
엿새 만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이듬해인 1968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리비아는  아랍 제국의
이익을 위해 석유를 무기로 한다는 견해를 갖고 공동활동을 한다. 는
목적으로 아랍 석유수출국기구OAPEC를 결성했다. 그후 이라크, 아랍
에미리트 연합, 카타르, 바레인, 시리아, 알제리, 이집트가 가맹했다
.

 

 

이에 앞서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결성되었다. 국제 석유자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이라크 등 5개국으로 출발한 OPEC은 리비아, 나이지리아, 알제리,
인도네시아, 아랍 에레미트 연합, 카타르, 에콰도르, 가봉이 차례로 가맹,
13개국이 되었다. 그 중에는 OAPEC회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제석유자본, 통칭 메이저는 엑손, 모빌, 걸프, 소칼, 텍사코의 미국계
5개 사와 네덜란드, 영국계인 로열 더치 셸,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7대 사를 일컫는다. 세븐 시스터즈라고도 불리는 메이저는
석유 탑사부터 채굴, 회수, 수송, 정제, 판매, 석유화학에 이르기까지
석유에 관한 각종 부문을 분할 독점하고 있었다
.

 

 

석유를 무기로 단결한 아랍의 위력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하루 1천 톤씩 매일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중동노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유럽, 일본이
이스라엘과 외교를 단절하고 급속히 친 아랍 노선으로 기울었다.

 

이집트는 3주일에 걸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종전까지 국제
석유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 결정권은 OPEC으로 넘어갔으며, 아랍
산유국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OPEC은 자원민족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몇 년 후 또 한 차례의 석유파동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1978년 12월
OPEC은 배렬달 12.7달러이던 원유가를 단계적으노 14.5% 인상키로 했다.
이와 동시에 이란이 국내사정을 이유로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한다는 선언을 했다.

 

 

이란은 미국의 지지를 받던 팔레비 왕을축출하고 호메이니를 새 지도자로 추대,

 민족 혁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

 

 

원유가는 배럴당 20달러를 넘어섰고, 현물시장에서는 40달러에 육박했다.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78년 4.0%에서
79년 2.9%로 떨어졌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3%를 기록했다.

 

 

우리 나라 경제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79년의 경제성장률은 6.5%,
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했다. 물가상승률은 30%에
달했다. 경상수지 적자폭은 79년 42억 달러, 80년 53억 2천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외채는 200억 달러를 넘어 섰다.

 

석유자원을 무기화하여 서방세계에 도전한 아랍 민족주의, 이것이
석유파동을 낳은 근본원인이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gangyopo&logNo=140138579729

 

석유파동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eally1223&logNo=40135557025

oil shock

2011/08/05 09:32

 

복사 http://blog.naver.com/really1223/40135557025

 

10월 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한 사건.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에서 원유고시 가격을 17% 인상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서,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함으로서,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따라 73년 초 배럴당 2달러59센트였던 중동산 기준원유 값은 1년만에 11달러65
센트로 무려 4배 가까이 올랐다.

제1차 석유파동은 석유가 싼값으로 필요한 양이 공급된다고 안이하게 믿어왔던 석유수입국들에게 석유공황이라고 할 만한 사태를 초래했다. 각국 정부는 여러 업종에 대한 전력·석유의 공급삭감, 민간인에 대한 에너지 절감요청 등의 조치를 취했다.

세계경제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져 75년에는 서방 선진국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되었고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으며 국제수지도 각국은 대폭적인 적자를 기록하였다.

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OPEC는 국제석유자본(Oil Major)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제2차 석유파동

제1차 석유파동은 1978년 일단 진정되었으나 78년 말 이란의 국내 혼란과 79년초의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다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세계 석유 공급의 15% 수준을 점하고 있던 이란은 석유의 전면 수출금지 조치를 취했다.여기에 석유업자들의 매점매석과 투기성 시장조작까지 횡행하면서 국제 석유시장은 급격히 혼란에 빠져들었다

1980년 8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는 기준원유가도 30달러대를 돌파했으며 81년
10월 34달러선에서 단일화됐다.1978년의 12달러70센트에서 무려 168% 오른 것이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는 제1차 석유파동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 하락과 소비자 물가의 급상승 등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석유한국의 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 때에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 제2차 석유파동 때는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 이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경제 체질 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화학공업 중심의 확대정책에 중점을 둔 것에 기인한다. 

파동이란 원유값이 급등하여 전세계 각국에 경제적 타격을 준 사건을 말하며,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2차례의 석유파동은 각각 1973과 1979년에 일어났다.



■ 제1차 석유파동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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