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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 정권 10년 동안 .무조건 예편 좌천...!! 안보 무력화 [1]
실사구시 (poilk****)
★친북 정권 10년 동안 국가 안보 무력화 시도
친북 정권
1.2차 연평 해전에서 승리한 사령관은 무조건
좌천 / 예편
세계 역사에 없는 야만 이적 정권
친북좌익 정권하엔선 이순신 같은 해군 제독 탄생은 불가능!!
친북 좌파 10년 동안 연평 및 NLL부근에서 일어난 사건 요약!!
친북 정권 10년 동안
정당하게 임무 수행해 북한 침투 물리치면 무조건.. 좌천/예편....!!
1999.6.15...1차 연평해전
김대중 정부는 1999년 1차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2함대 사령관을
4개월 만에 '해군본부 대기'로 사실상 좌천시키기까지 했다.
6·25 남침 이후 첫 정규전인 1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이 크게 승리했지만 박정성 당시 2함대사령관은 인사 불이익을 당하고 승진을 못한 채 소장으로 예편했다.
지난 김대중 / 노무현 정부는 해군에 북한 함정이 우리 영해를 침범해도 절대 선제공격을 해선 안 된다는 '4대 교전수칙'을 정해줬다.
1차 연평해전 후 해군 교전지침은 ‘선제사격과 확전 절대금지, 북방한계선(NLL) 절대 고수, 슬기로운 대처’로 바뀌었다. 현장 지휘관의 작전권이 꽁꽁 묶인 것이다. 2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측 희생이 컸던 것은 당연했다. 박 전 사령관은 “적의 포탄을 맞고 나서야 대응하라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군(軍)의 주적(主敵) 개념을 흐려놓고 3조5000억 원의 ‘평화비용’을 북에 바친 김 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탔다.
2000.6.15 야합...김정일과 6.15 남북 연방제 합의...연방제는 사실상 남한 공산화 합의
2002.6.29 2차연평해전
해군 고속정 357호 참수리호는 김대중의 4대 교전 수칙을 지키다 북측의 포격을 맞아 윤영하 소령 등 장병 6명이 전사했다.
"(제1,2차 연평해전 당시)김대중 전 대통령은 명백한 전투상황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하는데 4시간35분이 걸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음날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일본에 갔다"
2002년 2차 연평해전 당시 대북(對北) 감청부대장을 지낸 한철용 예비역 소장은 “북의 도발 16일 전과 이틀 전 구체적인 포(砲) 이름과 ‘발포’ 용어가 언급된 특이징후(통신감청내용)가 있었음을 보고했으나 위에서 묵살했다”고 밝혔다. 군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확전 금지’ 교전수칙에 손발이 묶이다시피 했다.
1,2차 연평해전은 승패 여부를 떠나 우리 해군에게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1차 연평해전의 승장(勝將) 박정성 제독은 이기고도 불이익을 당했다. 그리고 2차 연평해전 뒤 NLL을 슬기롭게 지킨 나는 김성만 전 해군작전사령관(중장)도 임기를 못 채운 채 한직으로 밀려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04년 7월14 일
“참여정부 5년을 거치면서 NLL·서해5도 사수의지가 많이 약화되었어요. 2004년 7월14일 북한경비정(등산곶684정, 2차 연평해전 도발함)이 무력도발을 위해 서해NLL을 다시금 침범했을 때 우리 해군은 선제경고사격을 통해 성공적으로 몰아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대북정책에 지장을 준다고 해군작전사령관을 처벌하고 교체했어요. 그 뒤 해군의 해상작전은 심하게 위축되었습니다.”
▼ 2004년 5월26일과 6월3일 남북한은 장성급회담을 열고 휴전선에서의 심리전 중단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상당수 장교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심리전을 왜 포기하냐며 반발한 것으로 압니다.
“합참과 육해공군 모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왜 심리전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게 됐는지 정말 답답합니다.”
▼ 그 회담에서는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남북한 해군이 우발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교신방법에 대한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14일 북한 경비정이 거짓 내용이 담긴 송신을 일방적으로 보내고 NLL을 넘었고, 이에 우리 초계함이 경고사격을 하자, 북한은 남측이 NLL 교신 합의를 어겼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런데도 NSC(국가안전보장회의)는 우리 쪽이 허위사실을 보고한 것으로 보고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합참 정보본부장인 박승춘 중장이 일부 언론에 진실을 알린 것이 밝혀져 퇴임하게 되었죠. 당시 육군 수뇌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박 장군은 직을 걸었던 용기 있는 분입니다. 연평해전의 승리와 우리 고속정이 침몰한 서해교전을 기억하며 씁쓸해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2004년
2004년 6월 무궁화회의에서 主敵개념을 흐리는 이종석 NSC차장의 주장을 반박했던 김광현 육군정훈감은 04년 말로 조기 전역하게 됐다.
국무회의에서 고교 근현대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조영길 전 국방부 장관도 개각때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취임한 국방부 장관은 주적 개념 삭제, 국방부 문민화 등을 얘기하면서 열심히 '코드'를 맞추고 있다.
육군의 장성진급과 관련해 괴문서들이 나돌자, 軍검찰부가 육군인사참모부를 압수 수색했다.
軍인사에 부정이 있다면, 당연히 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나오기 전에 마치 적군 기지라도 급습하듯이 이루어진 압수 수색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主敵개념 설정, 국방부 문민화 등과 관련해 軍의 목소리를 대변해 오던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을 겨냥한 조치가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2005년 주적 개념 삭제....이때 부터 한국 군대 무력화 본격 진행
윤광웅 국방 장관의 경우 2004년 11월 국방부 간부회의 훈시에서 "군사정책은 국가 외교안보 정책의 하위개념이며 주적 문제도 그렇다"며 "그동안 국방부가 왜 주적 개념을 표현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이종석 NSC 사무차장도 당시 "변화된 남북관계 환경에서 주적개념은 달라져야 한다"면서 "국방백서에서 다른 용어로 서술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2006.10.09 북한 1차 핵실험
노무현 대통령은
북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을 보고도 안보장관회의조차 즉각 열지 않았고
“우리를 겨냥한 게 아니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적극적 대응을 호들갑으로 여기는 태도였다.
2007년 10.4
노무현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영토선이 아니다’는 NLL 포기에 준하는 선언
“지난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돌아온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NLL은 영토선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NLL과 서해5도 사수의지가 없는 것으로 해석되어 북한에게 잘못된 신호를 준 것입니다.”
북한의 서해상 주요 도발 일지
- 99년 6월 15일: 북 경비정 서해 북방한계선(NLL) 월선, 연평해전 발생
-10월 30일: 북 경비정 NLL 월선, 해군이 경고사격
-2002년 6월 29일: 북 경비정 NLL 침범, 대청해전 발생
-2003년 5월 3일: 북 경비정 1척 백령도 동쪽 NLL 월선
- 2004년 7월 14일: 북 경비정 NLL 월선, 해군이 함포사격
- 2004년 11월 1일: 북 경비정 3척, 서해 소청도 동방 6.5 마일 및 연평도 서방 25마일 해상 NLL 월선, 해군이 경고사격
- 2005년 11월 13일: 북 경비정 1척, 어선 9척, 연평도 서남방 NLL 월선
- 2009년 9월 4일: 북 경비정 1척, 백령도 동북방 10㎞ NLL 월선
- 2009년 11월 10일: 북 경비정 1척, 대청도 동쪽 6.3 마일 NLL 월선, 남북 해군 교전
- 2010년 3월 26일: 해군 초계함 천안함,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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