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野談函

[先蠶壇址] 선잠단지(先蠶壇址) 이야기

bsk5865 2013. 1. 19. 20:46

보낸사람 : 演好마을 운영자 13.01.19 17:42

 

선잠단지(先蠶壇址)이야기|☞ 자유게시판
설봉헌 |  http://cafe.daum.net/enka6300/D7cf/23455 

 

선잠단지(先蠶壇址)

 

 

장난이나 우연에서

위대한 발명이 나오기도 한다.

누에에 대한 전설을 만든 중국인도

그 우연을 염두에 둔듯하다.

신화시대

중국황제(中國黃帝)의 비(妃) 서릉(西陵)에

관한 이야기다

서릉은 어느날

신기한 고치 하나를 가지고 놀다가 잘못하여 끓는 물에

떨어뜨리고 만다.

나무 젖가락으로

이를 건저올리려 하는 동안 젖가락 끝에 가느다란 실이

묻어나고 그 실은 끝없이 이어져 나왔다.

이것이 비단실의 탄생순간이 되었다

한개의 고치가 만들어 내는

생사 의 길이는 자그만치 1km에 이른다.

비단을 중국에서 만들기 시작했고

그 비단이 세계로 팔려나가면서

고대 <실크로드=비단길>를

개척해 나갔다는 것을부인할 사람은 없다.

비단길을 만들기 위한 누에고치는

이땅에도 들어와 고려때부터 국가규모로

해마다 한번씩 잠신(蠶神)을 위한

대제(大祭= 나라가 지내는 큰 제사)를 올렸다.

잠신은 물론 "서릉"이며 잠신을 모셨던 단(壇)터는

선잠단이다.

잠사(蠶絲)는 70년대

고도성장기 효자 수출품 역할을단단히 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이후

사양길에 접어 들기 시작 잠업자체가 사라질듯 보였다.

그런데 5천년에 걸쳐 인간을 위해

실을 토해왔던 그 누에가 이제

새로운 가능성으로다시 태어났다.

의료(衣料)아닌 의료(醫療)에서

화장품원료 까지 누에가루,

누에오즘 무엇하나 버릴것 없는

귀한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한국연구자들도

이미 유전자 조작등으로 초록빛

형광누에를 만드는가 하면 신비의 보약

동충하초(冬蟲夏草)버섯 재배에도 누에를 이용한다.

당뇨병등 각종 성인병에

화학합성만으로 만들 수 없는

신비의 약을 누에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 한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조선시대 선잠단을 복원한것은

이토록 경제에 새로운 이바지를 한

누에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에는 엣날 나라에서 주관하는

큰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 5군데 있는데

사직단, 환구단(원구단) 장충단,

선농단, 선잠단이다

그중의 하나인 선담단지는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하는 5백여평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왕비의

소임 중의 하나는친잠례(親蠶禮)를

지내는 일이었다

누에를 키워 고치에서

실을 뽑아 방적하는 일은

중요한 생산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하여 각 도에

적지(適地)를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하는 한편,

한 곳 이상의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그리고 잠사가 생산되면

국가에서 엄밀히 심사하는 것을 제도로 삼았다.

1506년(중종 1)에는

여러 도의 잠실을 서울 근교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

일대는 그런 잠실이 있던 지역이다.

한말까지 이 일대에는 수령(樹齡)이

300∼400년이나 되는 뽕나무가 있었다.

1471년(성종 2)에는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하여 달라는 기원을 드리고자

동소문(東小門:惠化門) 밖에

선잠단을 지었다.

단에는 대를 모으고

중국 황제(黃帝)의 왕비인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의

신위(神位)를 배향(配享)하였다.

단의 남쪽에는 1단 낮은 댓돌이 있는데

그 앞쪽 뜰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1908년(융희 2)에 선잠단은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되면서

폐허화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민유화(民有化)되었다.

현재는

성북국민학교 옆 길거리에 여러 집들에 둘러싸인

조그만 터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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