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1823F73350E96AB22F)
어머니에게 작별하는 윤봉길.
윤의사가 상해를 향하여 출향하기 전날인 3월5일 시량리동네 한 길가 느티나무 아래 종형 상점 앞에서 친정나들이 가시는
어머님께 "어머니 갈미에 잘다녀오시라"고 하면서 수건과 과자를 사드리고 작별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5A9D3B50E96B731B)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그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 윤봉길의사가 조국독립에 몸을 바칠 뜻을 세우고 집을 떠나가면서 남긴 글
![](https://t1.daumcdn.net/cfile/blog/1255A93450E96BE418)
왼쪽 시계는 2원짜리 김구선생의 시계이고.
오른쪽 시계는 6원짜리 윤봉길의 시계.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백범일지에서..>
![](https://t1.daumcdn.net/cfile/blog/145A0B3850E96C2E31)
황포강(黃浦江)북쪽이 잿더미로 변하매 십만의 침략군은 피를 물고 돌아가더라.
철통같은 진지도 한 선비를 막지 못해 조용히 괴수들을 섬멸했도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7D233850E96C2F01)
형장에서
검찰관 네모도 소타로가 사형을 집행한다는 내용을 고(告)하고 유언을 묻자,
윤봉길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미 사형을 각오한 것이니 지금은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고 일본어로 명료히 말했다.
형장에서 형집행과정을 기록하는 일본군인 다찌무라 구베는 이 순간 범인(윤봉길의사)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여 육군대신에게 고했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세고 침착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576E43850E96C300A)
o 표 윤봉길의 유해가 묻혀있던 장소.
이곳은 쓰레기하치장 옆 통로였다.
일제는 사형집행 후 곧바로 윤봉길의사의 사체를 남쪽을 약 3km 떨어진 가나자와시
공동묘지북쪽 모퉁이에 알지 못하게 평장(平葬)하였다.
일제는 윤봉길의사의 유해가 발굴될 때까지 13년간 짓발고 다니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