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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長崎) 原爆자료관 방문記
폐허로 변한 당시 나가사키의 모습을 생생히 보았다 고성혁
원자폭탄과 짬뽕 그리고 카스테라의 고장 나가사키
일본 나가사키(長崎)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십중팔구(十中八九)는 히로시마 다음으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을 말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짬뽕의 본고장이 나가사키다. 19세기말 나가사끼에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그들이 손쉽게 먹을 수 있게 만든 음식이 바로 짬뽕이다.
나가사끼하면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있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카스테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나가사키를 방문하게 된 것은 사실 우연이었다. 원래 츠이키기지 공개행사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비행기표가 매진되어 버렸다. 일본의 연휴와 겹쳐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하루 더 일본 후쿠오카에서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다음 행선지를 물색했다. 첫번째로 떠오른 곳은 미7함대의 기지인 사세보항이 물망에 올랐다. 후쿠오카에서 기차를 타면 2시간내에 갈 수 있는 곳이다. 밀리터리메니아라면 한번 가볼만 한 곳이 사세보항이다. 그러나 미군의 기지경계 수준이 높아져서 사진촬영이 여의치 않다는 말을 듣고 차선책(次先策)으로 선택한 곳이 나가사키이다.
일본 철도의 산실(産室) 규슈
나가사키는 후쿠오카 하카다역에서 특급열차를 타면 약 2시간반이면 도착한다. 나카사키까지 타고간 기차를 특급열차로서 틸팅열차다. 그 타는 맛이 그 자체로서도 아주 솔솔하다. 그 외에도 규슈는 일본철도의 산실(産室)로서 다양한 열차를 이용해 볼 수 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규슈의 각지역을 열차만 타고 다녀도 재밌는 여행이 될만하다.
사진 : 규슈의 각 지역별 다양한 열차를 소개하는 안내판. 철도메니아라면
저 사진을 보자마자 마음이 뛸 것이다.
사진 : 나가사키에서 운행하고 있는 나가사키의 명물 전차(電車). 우리나라에서는 1898년 12월 서울 서대문-청량리 구간에 처음 개통된 뒤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연결되었다.그러나, 자동차를 필두로 한 교통량의 증가로 1968년에 운행종료되었다.
나카사키 역에 내리면 바로 노면전차(路面電車)와 만나게 된다. 나카사키에서는 전차(電車)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필자가 아주 어렸을때 서울에서 타본 그 전차 모습의 전차가 일본 나가사키에선 아직도 다닌다. 제조일자를 보니 1952년 제작이다. 이 전차를 타고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으로 향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사진 :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입구
사진 : 나가사키 자료관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일본의 학생들.
월요일 아침이라서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전시관은 월요일날 휴관인데 나가카키 원폭자료관은 월요일도 개관하고 있었다. 여행객인 필자에겐 행운이었다. 원폭자료관의 첫번째 전시관은 어두운 조명에 석조건물이 통채로 전시되어 있다. 원자폭탄이 터진 폭심지에 있던 나가사키 성당의 전면부이다. 나가사끼는 일본에 천주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이다.
포르투갈 상인과 서구문물과 함게 들어왔다. 그런데 원폭이 그 성당위에서 터진 것은 또하나의 역사 아이러니다. 원폭의 폭풍과 열기에 휘어진 급수탱크의 철근과 녹아버린 묵주, 유리병등 당시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내부엔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기까지의 전쟁의 진행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사진 : 원폭자료관 내부의 모습. 태평양전쟁의 전개과정과 원폭개발과 투하과정을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라카미(浦上)성당
16세기후반 포루투갈 신부의 천주교포교지가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지구이다. 1587년 센고쿠시대 말기 천주교 금지령에서 시작된 기나 긴 박해의 역사를 견디고 메이지유신(1867)과 더불어서 1973년에 일본에선 천주교가 해금되었다. 모진 박해속에서도 신앙을 유지해온 신자들은 벽돌을 1장1장 쌓아올렸다.
20년의 세월을 거쳐서 1914년에 우라카미(浦上)성당을 완성하였다. 그후 1925년에 두개의 첨탑을 완성하였다. 탑의 높이는 26미터로 동양에선 장대함을 자랑하던 성당이었다. 나가사키 원폭투하후 종탑의 돔은 날아가버리고 성당 대부분은 무너졌다. 그중에서 성당벽 부분만이 유일하게 남았고 그것이 현재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진 : 원폭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우라카미(浦上)성당의 벽체일부분
나가사키는 제1목표가 아니었다.
히로시마에 우라늄으로 만든 원자폭탄이 투하된지 3일후인 1945년 8월9일 오전11시2분에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플로토늄으로 만들었다. 이 플로토늄 원자폭탄은 1945년 8월6일 티니안섬에서 조립되었다. 조립 2일 후인 8월8일 괌의 미육군 제20항공대 사령부 작전명령 17호가 하달되었다. 제1목표는 키타규유슈(北九州)의 고쿠라(小倉)였고 제2목표가 나가사키였다. 제1목표가 고쿠라로 정해진 이유는 그곳은 일본제철이 있는 핵심 산업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목표인 나가사키는 일본 군수산업중 가장 중요한 미쯔비시조선소와 항공기 제작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명의 8월 9일 플로토늄 원자폭탄인 일명 "팻맨(FAT MAN)"을 실은 B29 "벅스카"가 날아올랐다. 제1목표인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지만 구름에 가려서 투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B29는 제2목표인 나가사키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나가사키역시 구름으로 목표물을 식별할 수 없었다. 선회비행을 하던중 귀환하기 직전 구름사이로 나가사키 시내가 폭격수의 눈에 들어왔다. 그결과 나가사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사진 :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B29. 기체닉네은 벅스카(Buckscar). 실물은 현재 국립 아메리카 공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B29벅스카 승무원들의 기념사진
1945년8월9일, B-29 폭격기(Superfortress)의 조종사 챨스 스위니(Charles W. Sweeney)소령은, 히로시마(廣島) 원폭 비행대의 사령관인 폴 티베트(Paul Warfield Tibbets Jr.) 대령으로부터 원폭 투하작전의 실행명령을 하달받았다. 티니안에서 출격한 미군 제509 혼성부대 소속의 원폭 투하작전용으로 개조된 14기 중의 총 6기의 B29폭격기가 출동했다.
B-29 장거리 통상폭격기 벅스카(Bockscar, 기체번호 44-27297)의 조종사 챨스 스위니(Charles W. Sweeney)소령에 의해 오전 11시2분 나가사키(長崎)의 상공에 도달 고도 9,000m 상공에서 핵폭탄 「Mark 3」 일명 「Fat Man」을 수동 투하했다. 이 것은 실전에 사용된 사상 두 번째의 핵폭탄이었다.
사진 : 미군의 원폭 투하목표 결정 2차회의에 거론된 도시들이다. 동경은 이미 소이탄 공격에 의해 초토화 된 이후라서 제외되었다. 교토의경우는 일본의 역사도시라서 제외되었고 최종적으로 결정된 도시는 히로시마와 고쿠라 나가사키였다. 나가사키 경우는 원폭을 맞기전까지 한번도 미군의 공습을 받지 않았다.
사진 : 나가시키항의 지형도이다. 나가사키는 우리나라의 마산만처럼 깊숙한 만(灣)내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또한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히로시마의 경우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원폭의 피해가 광범위하게 퍼졌지만 나가사키는 주위의 산으로 말미암아 폭발은 나가사키에 한정되었다.
일명 뚱뚱이 "FAT MAN" 나가사키에 투하된 최초의 플로토늄 원자폭탄
사진 : 나가사키에 투하된 플로토늄 원자폭탄인 FAT MAN의 1:1 스케일 모형이다. 그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팻 맨(Fat-Man)은 1945년8월9일 일본 나가사키 시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코드명(미군의 무기번호는 MK.3). 길이 3.25m, 지름 1.52m, 무게 4,545kg으로, B-29 벅스카(Bockscar)에 실려 나가사키시 북쪽 상공 503m(±10m)에서 투하되어 폭발했다.
사진 : 플로토늄 폭탄의 내부 모형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우라늄폭탄과는 그 구조가 다르다.
나가시키원폭 "Mark3"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우라늄폭탄과는 구조자체가 달랐다. 플로토늄 원폭은 중앙에 플루토늄을 한꺼번에 놓고 주위를 고성능폭탄으로 감싸서 터뜨리는 폭탄이다. 먼저 외부 고성능폭탄의 기폭에 의해서 폭발력이 중심의 플로토늄에 전달되면 그 압력으로 플로토늄의 핵분열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구조가 둥근 공같은 모양이 나오는데, 미군은 이것을 뚱뚱하다 하여 '팻맨'이라고 이름붙였다.
「Mark 3」 핵폭탄은 길이 3.5m, 지름 1.5m, 무게 4.5톤이다. 플루토늄 239로 TNT 폭약 22,000톤(22 kiloton)으로 히로시마(廣島) 원폭의 1.5배에 해당한다. 당시의 나가사키 추정인구 24만 명중 사망자 약 7만 4천명과 건물은 약 36%가 전소 혹은 파괴됐다.
사진 : 폭발 시간인 11시2분에 멈춰서 있는 당시의 민가에 걸려있던 괘종시계.
유물 전시실엔 11시2분에 멈춰선 궤종시계가 몇개 전시되어 있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폭발한 시각이다. 폭심지에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폭풍에 의해서 일본가옥들은 대부분 날아가 버렸다. 세간살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중 하나가 벽시계였다. 시계속바늘이 가르키고 있는 11시2분은 일본인의 머리속에 각인된 핵폭발의 영원한 시간이 되었다.
사진 : 원자폭탄의 고열로 인해서 유리병이 녹아서 서로 엉겨 붙어 있는 모습
사진 : 전시유물중 눈길을 끈것중 하나이다. 녹아버린 유리에 사람의 손뼈가 같이 붙어있다.
제국주의일본에겐 패망을 한민족에겐 해방을 가져온 원폭.
전시실 내부에서 필자의 눈을 끈 두개의 사진중 하나이다. 우라카미 전차역홈에서 원자폭탄의 열기에 타죽은 모자의 사진과 새카맣게 변한 소사체(燒死體)옆에 서있는 여학생의 사진이다. 일제 식민지를 겪은 우리민족의 입장에선 저 모습을 보는 시각은 일본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분명 개인적으로나 민간인으로서 전쟁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선 애석한 일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민족적 감정에선 필자에겐 또 다른 느낌이 교차하였다. 일본인들에겐 원폭은 패망의 아픔으로 다가오겠지만 우리 한민족에겐 해방의 열쇠였기 때문이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폭발 원점을 가보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빠져나와서 공원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아담한 공원이 나온다. 그곳이 바로 나가사키 원폭의 폭발원점인 폭심지(爆心地)이다. 공원주변은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각종 추모비석과 상징물들이 세워져 있다. 아이를 안고있는 모자상도 있다.
사진 : 나가사키 원폭날짜인 1945년 8월9일 11시2분의 동판(銅版)이 세겨진 모자상
나가사키 원폭 투하 전후 비교사진이다. 그라운드제로를 중심으로 나가사키시내는 그 어떤 건물도 남아있지 않다.
사진 : 원폭 투하 2일전 미군의 항공사진이다. 강변 공설운동장과 공업시설이 꽉 들어찬 나가사키시내항공사진.
공원의 한쪽엔 원폭순난자명봉안(原爆殉難者名奉安)이라고 하는 추모비가 검은대리석으로 세워져 있다. 그앞에는 항상 꽃들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엔 우라카미성당의 부서진 기둥중 하나가 마치 탑처럼 옛날 그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극히 짧은 한순간의 섬광과 함께 10여만명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비이다. 그런데 만약 그 섬광이 없었다면 어떠하였을까하고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원폭투하에 대한 일본의 왜곡된 생각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서 "원폭투하까지의 과정"이라는 안내 설명문을 읽어보면 일본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를 생각을 하고 있슴을 알 수 있다. 핵심은 이렇다. 미국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서 원폭투하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20억불이 소요된 "맨하탄계획"을 과시하고 소련과의 냉전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독자에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기 위해서 사진으로 그대로 실었다.
사진 :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서 설명하고 있는 "원폭투하까지의 과정'이라는 설명안내판
그러나 이것은 왜곡에 가깝다. 일본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빼 먹었다. 바로 1945년 7월26일 포츠담선언을 통해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만일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요구에 일본이 불응할 경우 "신속하고도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를 명시했다. 그런데 일본은 철저히 무시하고 1억옥쇄를 주장하면서 전쟁을 독려했다는 사실이다. 이때 항복을 받아들였다면 원폭은 일본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 일본은 원폭을 맞았나?
과연 미국이 유럽엔 원자폭탄을 터트리지 않고 일부로 인종이 다른 일본에 원폭을 감행했을까? 절대 아니다. 나찌독일은 1945년 5월7일 새벽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때까지도 미국은 원폭을 개발하지 못했다. 최초 원폭실험 성공날짜는 1945년 7월16일 오전 5시30분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원자폭탄의 실험에 성공였다. 따라서 미국이 독일에서 일본으로 원폭목표를 바꾼것이 아니고 원폭이 개발되기 이전에 이미 독일이 항복했기 때문에 원폭투하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1억옥쇄를 외치면서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였다.
결국 45년 7월16일 사상최초의 원폭 실험 성공후 그해 8월6일과 8월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소련이 1945년 8월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약 150만명이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로 밀고 내려오면서 관동군을 무장해제시켰다. 결국 두번재의 원폭과 결정적으로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에 놀란 일본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원폭투하의 원인은 제국주의 일본 자신에게 있는 것인데도 이렇게 왜곡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가 지면을 빌려서 독자여러분에게 정확한 내용을 재차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진 : 원폭 폭심지에 세워진 추모비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조종사 챨스 스위니(Charles W. Sweeney) 소령의 회고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후 9월3일 폴 티베트 등과 함께 아쯔기 비행장(厚木飛行場)으로 도착해 일본 땅을 밟았다. 그는 회고록(원제 War's End)에서 피폭 중심지에 섰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당시 나는 전쟁의 잔학성에 대해 고생한 사람들이 자국의 인간이던 타국의 인간이던 결코 자랑이나 쾌감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모든 생명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서 있었던 그 도시를 폭격했다고 하는 일에 대해 후회나 죄악감도 느끼지 않았다. 파괴된 주위의 풍경이 말하듯 하는 고통은 일본 군국주의 문화의 학살과, 「하등의」 민족을 정복하는 것이 영광으로,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는 운명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전통에 의해 가져온 것이 때문이다. 전쟁의 후회와 죄악감을 느끼는 것은 일본국가이며, 위대한 야망을 달성하고자 국민의 희생은 안중에도 없었던 제국주이 일본군의 지휘부들이야말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
나 역시 피폭의 원점에 서서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조종사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원폭의 후회와 죄책감음을 느껴야 하는 것은 일본자신이며 그 책임은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우슈비츄 학살의 원죄(原罪)를 안고 있는 독일처럼 원폭의 원죄 또한 제국주의일본이라는 사실이다.
사진 : 폭심지 추모비 바로 옆에 서있는 무너진 우라카미(浦上)성당의 기둥.
오히려 보다 많은 생명을 구한 투루먼 대통령의 원폭 결정
폭심지앞에서 난 미국의 투루만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결정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순식간에 약 20여만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적은 숫자는 아니다. 결국 일본은 원자폭탄 2발에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전후(戰後)일본의 좌익과 미국의 반전운동가들은 미국의 결정이 최선의 것이었나하고 의문을 제기한 적도 있었다. 이문제에 대해서 필자는 이렇게 답을 하고자 한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구름사진 비교
사진 : 나가사키 원폭 폭발 직후 B29에서 촬영된 사진. 흔히 원폭 버섯구름사진은 나가사키
원폭사진이다. 이때 사진촬영과 기록을 위한 별도의 B29가 동행했다.
사진 : 히로시마에 피어오흔 원폭 버섯구름
투루먼대통령이 원자폭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슈와 동경으로 미군을 그대로 상륙시켜서 더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반문해본다. 만일 훗날 원폭이 있었슴에도 투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원폭을 사용치 않아서 일본본토에 상륙한 미군이 수십만이 더 희생이 되었다면? 그리고 후에 그 사실이 밝혀졌다면? 투루먼 대통령은 역사의 죄인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원폭투하결정이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막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군은 사이판전투와 오끼나와전투에서 수만명의 군인을 잃었다. 소위 일본의 옥쇄전법때문이었다. 그때문에 일본 본토에 상륙할 경우 최대 100여만명의 희생이 있을지 모른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런 추산은 투루먼대통령으로 하려금 원폭결정을 내렸다. 역(易)으로 생각하면 원폭투하가 일본의 전쟁의지를 꺽었고 결국 더 많은 희생을 줄인 결과를 가져 온것이었다.
또 그 결과 우리는 일본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원폭의 폭발원점에서 난 투루먼대통령을 떠올리면서 발길을 평화공원으로 옮겼다.
재일동포의 원혼이 서려있는 나가사키 평화공원
나가사키 원폭 폭심지에서 도보로 약 15분정도 걸어가면 나가사키 평화공원이 있다. 이곳으로 발길을 옮긴 이유는 원폭에 희생된 우리동포를 추모하는 위령탑이 있기 때문이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위에 아주 넓다란 공원이 나오고 멀리 청동상이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오른팔은 하늘 높이 치켜세우고 왼팔은 옆으로 수평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눈은 감고 있는 거대한 청동상이다. 그 앞엔 어김없이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조각상의 뜻은 이렇다 한다. 하늘로 높이 든 오른팔은 원자탄이 터진 하늘을 가르키고 수평의 왼팔은 평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눈을 감은 이유는 죽은이들을 기리는 뜻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업보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선인 희생자 위령탑을 찿아보았는데 결국 못찿았다. 중국인 위령탑은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못찾고 온것이 지금도 못내 아쉽다.
사진 : 나가사키 평화의 청동상.
일본의 조건부 항복은 무엇인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까딱 잘못했다면 한민족은 그대로 일본밑에서 식민지로 살아갈 뻔 했다. 여기엔 일본의 꼼수가 있었다. 만약 조건부 항복이었다면 한반도와 타이완은 그대로 일본영토호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이유는 전쟁의 시발점을 진주만 기습부터라고 하면 그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만 내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영 연합군은 전쟁의 시발점을 중일전쟁때부터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더라도 한반도와 타이완은 그대로 일본영토로 남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일본의 꼼수를 간파한 사람이 있었다.
일본의 꼼수를 간파한 이승만박사
미국에 있던 이승만박사는 미국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실상과 일본에 대한 대응방법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한 책을 출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의 원제는 (Syngman Rhee) 이다. 1941년 이승만박사는이 책을 통해서 일본과 미국이 장차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였다.
사진 : 이승만초대대통령이 미국에서 출판한 저서 (JAPAN INSIDE OUT)
이승만박사의 이 책은 베네딕트가 저술한 "국화와 칼"이라는 책과 더불어서 미국이 일본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었다. 이렇듯 일본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던 이승만박사는 일본의 꼼수를 정확히 꿰뚫었다. 이승만 박사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태평양전쟁도 아니고 중일전쟁도 아닌 청일전쟁때까지 소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박사는 미국정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여사를 만나서 이같은 뜻을 전하였다. 또한 중국에선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와 함게 하던 김구선생도 장개석총통에게 간청하였다. 일본의 침략전쟁은 청일전쟁때부터라는 것을 말이다. 청일전쟁에서 진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타이완과 펑후제도를 일본에 넘겼다. 바로 이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 시초라는 것을 이승만박사는 미국조야에 설파하였다.
한반도 독립을 최초로 언급한 카이로선언
사진 : 카이로 선언때의 연합군 대표. 장개석, 루즈벨트, 처칠.
이같은 이승만박사와 김구선생의 노력으로 장개석총통이 연합군 대표로 참석한 카이로선언에서 한반도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있었다. 카이로 선언에선 일본의 침략전쟁을 1차세계대전때까지 끌어올렸다. 4번 조항은 이렇게 명기하고 있다.
④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諸島)를 박탈하고, 또한 만주 ·타이완[臺灣] ·펑후제도[澎湖諸島] 등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구축(驅逐)한다’. 그리고 한반도에 대해선 별도조항으로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고 짧막하게 명시하였다.
카이로 선언에 별도조항이 들어간건 천만 다행이었다. 만약 별도조항이 들어가지 않고 1차대전 이후로 한정되었다면 한반도는 독립을 맞이 하기 힘들었다.
나가사키 원폭투하와 소련군이 점령할 뻔한 한반도
역사학자들이나 전쟁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가 있다. 그것은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하게 된 결정타는 미국의 원자탄이 아니라 소련군 참전이었다는 것이다.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탄이 투하된 바로 그날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1941년 스탈린과 맺은 일소불가침 조약에 의해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매진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것이 끝날 무렵 소련의 참전은 일본으로 하여금 모든것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결정타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폭이 투하된 후에도 미국은 일본이 그렇게 빨리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미군은 일본본토와는 너무도 먼 오끼나와에 있었다. 그런데 소련 스탈린은 빨랐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날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즉각적으로 150만의 소련군을 만주와 한반도 북북인 함경도로 투입했다.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은 8월12일에는 청진, 나진, 웅기, 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다. 막강하다던 일본 關東軍은 총한번 쏘지 않고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한반도의 일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불과 열흘안에 소련군은 부산까지 내려올 상황이었다.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에 다급해진 미국 워싱턴
당시의 긴박한 상황은 해리 투루먼 대통령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1945년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게 된 경위를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자.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 "Memoirs by Harry S. Truman" (트루먼 회고록)의 444∼5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
트루먼 대통령의 말을 보충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즉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 내의 일본군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야 했는데, 미군은 그때 한반도에서 1천km 남쪽 멀리 오키나와에 있었고, 또 미군은 주로 일본 본토에 들어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신속히 보낼 여유가 없었다.
소련군의 남진 저지선 38도선. 한반도의 반쪽이나마 구했다.
즉, 38도선은 소련군의 남하 저지선이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14일(워싱턴 시각) 밤늦게 서둘러 38선을 결정했다. 더이상 소련군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미국은 즉각 소련측에 통고했고 소련은 이를 받아들였다. 만일 소련이 그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부산까지 내려갔더라도 미국은 속수무책이었다. 한반도로 보낼 병력이 미군에는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오끼나와에 있던 미군이었고 일본 본토에도 상륙못한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 올 수는 없었다. 그나마 소련이 미국의 요구에 응해서 38도선 밑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는 불행중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나가사키 원폭투하와 동시에 북한땅에 진주한 소련은 북한을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국가로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북한은 김정일 치하에서 개돼지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나가사키에서 북한 김정일의 핵을 생각해보다.
전시관을 빠져나오는 길에 보면 일종의 반핵(反核)상징물로서 지구 곳곳에서 터지는 원폭구름의 지구본을 전시해 놓고 있다.
미소냉전이 끝난 지금 시베리아와 미국본토에서 터지는 원폭구름은 이제 현실감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을 생각해보면 핵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사진 :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반핵사징 지구본
사진 : 북한의 지대지 탄도미사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원폭피해를 말하면 일본만을 연상한다. 이미 태평양전쟁때 많은 우리동포는 원폭피해를 입었다. 강제징용에 의한 결과였다. 따라서 원폭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우리민족과 직결된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핵폭탄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현재의 당면과제다. 현재로선 북한의 핵공격에 우리는 그 어떤 방어수단도 없다. 이스라엘은 적성국의 핵시설을 선제타격함으로써핵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고 있다. 과연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답답해 져 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곳에선 핵을 맞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렇다면 현실적 결론은 둘중 하나뿐이다. 과감하게 선제타격을 하던지 아니면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던지 둘 중 하나다.
☞ 푸른깃발님의 추천 포스트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sd118&folder=18&list_id=12257599
이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았는데 [bsk5865와 2269]의 암호를 넣었다.(201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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