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歌謠函

가슴아프게1966(영화)/정두수 작사 박춘석작곡

bsk5865 2013. 4. 1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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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프게1966(영화)/정두수 작사 박춘석작곡| 남진노래녹음방
가요사랑 | 조회 107 |추천 0 | 2010.01.26. 19:48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 노래인 <가슴아프게>는 1960년대 나온 인기대중가요 가운데 하나다.

 4분의 4박자 트로트로 부르기가 쉽고 멜로디연결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맑으면서도 굵직한 목소리의 미남가수 남진이 젊은 시절 취입한 노래로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노래는 남진이 가요계데뷔 후 1년 만에 부른 가요다.

 

1966년 가수가 되기 위해 가출하다시피 집을 나와버린 남진은 <울려고 내가 왔나>를

데뷔 곡으로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는 처음엔 대중들의 눈을 끌진 못했다.
그랬던 그가 <가슴아프게>를 불러 단번에 뜨는 가수가 됐다. 연정의 대중적인 노랫말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바람을 타고 남녀간 만남이 자유스런 분위기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무렵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했던 까닭이다.
50대 이상 장·노년층들이 즐겨 부르는 이 노래의 원제목은 <가슴 아프게>가 아니었다.

노래제목이 바뀌어 탄생한 이 노래의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66년 남진이 서울 경복고를 막 졸업한 후 어느 날이었다. 남진이 국내연예기자 1호인

정홍택 당시 한국일보 기자(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전 한국일보 부장/월간 편집국장)를

우연한 기회에 만난 것이다. 그 땐 레코드취입 전으로 짧은 머리에 자주색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 나눈 대화를 보면 꽤 재미있다.
“자네 가출했지?”

“네! 부모님들이 가수 되는 걸 하도 반대하셔서 나와 버렸습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 속 썩히지 말고 공부나 하지 그래!……”
남진은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없었다. 끝까지 가수가 돼야한다며 막무가내였다.

“최희준 씨처럼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게 꿈이다”면서 오히려 “좀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정 씨는 자신의 말이 도무지 먹혀들지 않자 겁을 주기로 했다.
“자네 실력으론 가수 되긴 틀렸으니 일찌감치 그만둬!”
“그래도 더 노력할 테니 도와 주십시오.”
결국 정 씨는 남진의 집념과 성의에 손을 들고 말았다. 남진이 가수가 될 수 있는 쪽으로 힘을 써준 것이다.

 

음반을 낼 수 있는 지구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연결시켜 주고 작사가, 작곡가와도 선이 닿게 했다.
경남 하동 출신의 작사가 정두수(본명 정두채/시인 정공채 선생의 동생)씨가 노랫말을 만들고

이미자 노래 등을 작곡,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 박춘석 씨가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진을 위한 음반취입 준비작업이 하나 둘 이뤄지고 있을 때

정 씨는 레코드사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남진이 부를 노래작곡이 끝났으니 한번 들어봐 달라는 전화였다.

 

정 씨는 서울 충현동에 있는 작곡가 박 씨 집으로 갔다.

작사가 정두수, 지구레코드사 임정수 사장, 그리고 노래를 부를 남진이 와 있었다.
2층 작곡실에서 박춘석 씨가 남진이 부를 곡을 피아노로 쳐주며 의견을 내달라고 했다.

노래제목은 <낙도 가는 연락선>.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와 그 시절 대중들 취향에 맞는

노랫말은 좋다고 느꼈으나 노래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같은 의견에 작사가 정 씨 역시 동감한다며 제목을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노래제목들 대부분이 명사로 끝나는 게 전통이었으나 과감하게

부사나 형용사로 만들어보기로 하고 몇 가지 가제목들을 달아봤다.
최종적으로 정해진 건 <가슴 아프게>였다. ‘아프게’란 부사로 노래제목을 단 것이다.

 부사로 끝나는 제목이 드물었던 터라 노래는 나오자마자 눈길을 모았다.

 

방송전파를 타면서 남진 노래는 크게 히트했고 1967년 <가슴 아프게>란 제목의 영화까지 나왔다.

남진은 그 영화에서 남정임과 함께 주연을 맡아 가수 겸 영화배우로 날개를 달았다.

미남형 가수와 미모의 여배우 연기가 화제를 모아 노래는 영화와 더불어 상종가를 쳤다.
본명이 김남진(金湳鎭)인 남진은 목포시내 부잣집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국내가요계 황금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을 주름잡은 가요계 간판스타였다.

오빠’소리를 처음 들은 가수, 가수 팬클럽이 처음 만들어진 가수로 기록될 만큼 인기정상을 달렸다.
그러던 중 남진은 젊은이들의 월남참전바람을 타고 1969년 증파되는 베트남 참전군의 일원으로 파병,

1971년 귀국 때까지 전장에서 뛰었다.

 

제대 후 부산출신 가수 나훈아와 경쟁을 벌이며 귀국 첫해 <눈물로 끝난 사랑> <마음 약해서>에

 이어 1972년 히트곡 <님과 함께>로 가요계를 평정했다.

 <그대여 변치 마오> <꽃분이> <마음이 고와야지> <미워도 다시 한번> 등

숱한 레퍼터리로 승승가도를 달려온 그는 요즘도 가끔씩 무대에 서며 열심히 뛰고 있다.
<펴온글입니다.>

 

1966년 어느봄날 나는 보슬비가 흩뿌리던 인천 연안부두에 나와 있었다.

혜성처럼 가요계에 나타난 가수 남진(본명.김남진) 의 다음 노래가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나와 콤비인 작곡가 박춘석 선생으로부터 남진의 지구레코드사 전속기념음반에 수록할 가사를 청탁받은 지도 이미 사흘째

가사를 박춘석 선생께 넘기기로 한 마지막 날이었다.

이때만 해도 팔팔한 청년 때라 3일간의 약속은 그 기간이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졌다.

원고지를 펼치기만 하면 금세라도 몇 편의 가사가 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63년부터 줄곧 써오던 MBC 라디오 심야프로인 "밤의속삭임" 이라는 방송 원고를 쉬고 있었다.

2년 동안이나 쫒기다시피 썼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방송가요나 홈 송에서 출발한 나는 오로지 작사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마음같이 써지지를 않았다.

"덕수궁 돌담길" 이나 "흑산도 아가씨" 처럼 쉽게 글이 되지 않고 골탕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것봐라?

 

애꿎은 담배만 피우다가 하루가 홀랑 지나갔다

이튿날 부터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술집을 전전하며 거리를 방황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약속의 날 그3일째가 들이닥쳤다.

 

나는 꼬박 밤을 새운 눈을 하고 새벽 첫 전차를 탔다.

독립문에서 출발하여 청량리,노량진,을지로,원효로 다시 동대문역에서 전차를 타고 이번에는 뚝섬까지 나가 보았다.

가사를 써야만 한다는 압박감으로 긴장하고 있을 때라 졸리기는 커녕 되레 정신이 또렷하게 맑아지고 있었다.

전차종점에서 전차종점으론만 흐르던 나는 결국 마포종점에서 내려야만했다.

전차여행 에도 어지간히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까지 촉촉하게 젖어버린 나는 봄비 속을 헤치고 어느 술집으로 들어섰다.

대낮이라 그 술집은 한산했다.

젊은 여주인이 혼자서 라디오 앞에 앉아 열심히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무너지듯 의자에 걸터앉은 나는 술과 해장국을 시켜놓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오늘은 기필코 가사를 써야만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박춘석 작곡생활 10주년 기념공연에서 "가슴아프게"는 그의 9백99번째의

작곡으로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고 신인가수 남진을 일약 톱스타 반열에 올려 놓았다.

우리 가요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가슴아프게"의 명콤비 작사가 정두수-남진(사진위)

박춘석(아래) 의40년 후 모습. 박춘석 선생은 지금 고인이 되셨다.

 

박춘석 선생은 피아노 앞에서 줄담배를 태우며 초조하게 나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뜩이나 긴목을 학처럼 늘어뜨리고 학수고대 할 게 안봐도 눈에 선했다.

무엇을쓴담?

 

노래테마를 어디에 맞출까?....

 

이런 생각에 취해 있을 때였다.

나의 가슴에 와 닿는 무슨 금속성의 둔탁한 울림이 들렸다. 그것도 두 서너 번씩이나...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목관악기처럼 낮고 쉰듯한 부웅~ 하는 뱃고동소리가 라디오 연속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순간 누가 뒤에서 떠밀기라도 하듯 나는 후다닥 그 술집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연안부두로 달리는 차에서도 내 눈에는 온통 바다뿐이었다.

남빛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낸 나에게 바다는 늘 상 친근감으로 다가왔다.

광안리는 바다에서는 쾌청한 날이면 일본 대마도가 보였다.

손짓해 부르는 듯한 현해탄 너머로 의 그 창망한 물굽이..........

 

아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 그래야만 그 바다와 다시 만날 수 있을텐데........

 

처음 찾은 연안부두.

나는 이때 어떻게 왔는지를 몰랐다. 이미 내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빗소리 파도소리 바람소리.비린내가 나는 갯가를 서성이던 나는 뽀얀 안개비 속을 제치고 간간이 들려오는 뱃고동소리를 들어도

부두 냄새만 맡아도 될 것 같았다.

그토록 나를 옥죄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에 갇혀 본래의 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바다에 대해서는 못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직도 나를 외면하고 있는 바다로 하여 가슴에 뚫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와 나를 가로막고있는 그 보이지 않는 장벽. 이를 허물 수 있는 연결고리를 지금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밤9시를 지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했다. 통금시간이 촉박했기 때만이다.

이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현해탄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박춘석 선생과 가수 남진. 지구레코드사 임정수 사장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다.

그리고 약국 아가씨의 꿈도 꾸었다.

깜빡 잠이 든 것이다.

 

 

녹번동에 살던 나는 그 약국 앞을 지나쳐야만 집으로 갈수 있었다.

서울대 약대를 나온 그 아가씨는 문학도였다.

웃을 때 한쪽 눈이 약간 사시가 되는 그런 점만 뺀다면 괜찮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자 반색을한다.

 

방금 박춘석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어요. 자지않고 기다릴테네 가사를 전화로 불러 달래요

그리고 남진씨 한테서도 가사가 됐느냐고 전화가 왔었구요

남진-가슴 아프게 음반(지구 LM-120174,66년)과 일본에서 빅히트를 기록한

이성애 음반 (일본 도시바 TP-60308)재킷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걸 보니 이번에 대작을 쓰시나보죠"?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아가씨는 내 몰골이 안쓰러운지 내게 살갑게 굴었다.

"집에가서 좀 쉬세요. 마음을 편히 갖고 여기 보약이 있는데.... 시간에 맞춰 제때 잡수셔야 해요"

 

약방아가씨와 나 양가에서 우리 둘을 결혼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지금의 내 아내와 불같은 사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지금 가슴이 아픈 것 밖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무너가 금방 써질것 같은 가사만 나오게 되면

펄펄 날것 같은데............. 스스로도 우습게 들리는 말을 혼자서 중얼대다 나는 갑자기

 

"나왔다! 나왔어! 그렇지!

"가슴아프게" 가 나왔어 바다와 나 사이가 아니라 당신과 나 사이에 그 바다가 있었단 말야.........

 

그게 나를 지금까지 가로막고 있었거든

 

나는 아가씨에게 메모지를 달라고 해 단숨에 써 내려갔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가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날두고 떠나지는 않았을것을

아득히 바다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나는 그자리에서 전화로 박춘석 선생에게 가사를 불러주었다

가사를 받아쓰고 있던 박춘석 선생은 한동안 말이 없엇다.

나는 제풀에 기가 꺾이면서 볼멘소리로 "왜 말이 없어요? 라고 가사가 안좋은모양이죠?

라고 다그치듯 물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제가 구상하던 곡과 바로 딱 맞아 떨어지고 있어요

오늘 밤으로곡을 붙일 테니 이따 통금이 해제되는 데로 집에 들러요. 지금 남진이도 여기와 있어요.

 

박춘석 선생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박춘석 작곡생활 10주년 기념공연에서 "가슴 아프게" 는 그의 9백99곡 째의 작곡으로 기록되는 영광과 행운을 안기면서

남진을 일약 가요황제로 등극시켰다.<펴온글입니다.>

 

    



가슴아프게/남진

  노래/가요사랑

 

당신과 나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것을
해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것을
아득히 바다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첨부파일 가슴아프게 090329.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