隅田川慕情-島津亜矢 作詞 ばやしみえこ 作曲 ばやし和彦 編曲 池多孝春
一 遠いみちのり 夫婦の旅は 夢を求めて 越えていく 泣いて一生 笑って一生 ひとつに結ぶ 波と波 ふたりで渡る 隅田川
二 お前ひとりを 泣かせはしない 二人でひとつの この道は 出逢った時の 運命だよ 波にゆられて ゆらゆらと ふたりで渡る 隅田川
三 岸につければ 苦労も忘れ やっと来たんだ 倖せが 心と心 抱きしめて 愛を包んだ 屋形船 ふたりで渡る 隅田川
伊勢商人が築き上げた325年の伝統「ちくま味噌」 325年의 伝統을 가진 된장 製造 • 都賣業 老鋪인 株式会社‘ちくま味噌’를 紹介합니다. 이 会社는 東京地下鉄 半蔵門線(はんぞうもんせん)을 타고 都心에서 約 10分,隅田川를 가로지르는 永代橋(えいたいばし)의 바로 近處에 있습니다.
味噌は天与の食物、味噌業もまた天職 ちくま味噌社는 17世紀 中半에 伊勢国乳熊郷(いせいくにちくまごう: 現在의 三重県松阪市의 一部)에서 江戸로 進出한 伊勢商人이 만든 가게였습니다. 過去 伊勢国(いせいくに)라 불렸던 三重県 은 実業界에서 成功한 사람을 많이 輩出해 ‘伊勢商人’의 発祥地로서 有名 합니다.
伊勢国에서 産業資本을 蓄積해 온 竹口(たけぐち)家門은 江戸에 資本을 投資하는 첫 발판으로 日本橋(現・中央区内)에서 漆器가게를 運營했는데 뒤이어 1688年에 竹口作兵衛松方(たけぐちさくべえよししも)氏가 隅田川 江邊의 永代橋 近方에서 雑穀商을 基盤으로 된장을 製造하기 始作한 것이 된장 事業의 始初가 되었습니다. 이 된장가게는 故鄕의 地名을 따서 商品名을 ‘ちくま味噌’로,商号를 ‘乳熊屋’라고 定했습니다. 그 後 伊勢商人의 가장 큰 長点인 合理的인 思考를 通해 米穀商을 基盤으로 한 된장 醸造業뿐만 아니라 伊勢国에서 해왔던 海運業,換錢商 等의 事業도 江戸로 가져와 事業을 多角化했습니다. 이들 大部分은 江戸時代 末부터 明治時代 初의‘明治維新’이라 불리는 政治的 政治的 動乱과 그 後의 大地震, 第二次世界大戦으로 因한 被害 等으로 因해 中斷되었지만 生活과 密接한 된장 事業만은 살아남았습니다.
現在 ちくま味噌社는 江戸時代부터 伝해 내려오는 商品을 비롯해 多樣한 된장을 製造•販売하고 있습니다.‘味噌は潤いと活力をもたらす天与の食物である(된장은 마음의 윤 택함과 활력을 가져오는 하늘이 준 식품이다). この仕事に携わることもまた天職である(이 일에 종사하는 것 또한 하늘이 내린 일이 다.)’라는 経営方針을 創業 以來 固守하고 습니다. 現在의 経営者인 竹口作兵衛(たけぐちさくべえ)氏는 17代째입니다.
歴史に刻まれる数々のエピソード 創業325年이 된 老舗에 걸맞게 ちくま味噌社에는 歴史에 새겨질 듯한 逸話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例를 들면 永代橋 바로 隣近에〈赤穂義士休息の地〉라는 碑石이 있습니다. 그 碑文의 內用은 다음과 같습니다. 乳熊屋의 初代 作兵衛는 風流를 즐겨 俳句를 가까이했는데 赤穂義士 47名 中 한 名이자 詩人으로도 有名했던 大高源吾(おおたかげんご) 는 俳句의 벗이었다. 1703年 1月 末 主君의 復讐에 成功한 赤穂義士들이 돌아가는 途中에 永代橋의 近處까지 왔을 때 作兵衛가 一行을 가게로 불러들여 술과 食事를 待接하며 그들의 成功을 축했다. 이것은 運 좋게 그날 增築하고 있던 社屋의 上樑式의 날과 偶然히 一致했던 德分에 實現된 일이었는데 大高源吾는 그 일을 가게 마룻대에 記錄했고 또 가게의 看板을 써서 남겼다. 이것이 크게 所聞이 나서 乳熊屋는 江戸名所 中 한 곳이 되었다.
그 밖에 오늘날 ちくま味噌가 繁昌하는 데 주춧돌이 되었던 선조의 興味로운 逸話를 列擧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