過去資料函

빛은 韓半島로부터’ | 유홍준교수

bsk5865 2014. 3. 8. 13:23

보낸사람 : 演好마을 운영자 14.03.08 02:11

 

빛은 韓半島로부터’ | 유홍준교수|☞ 일본영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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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교수의 '빛은 한반도로부터' · full-movie
1 장 〈한국과 일본, 색안경부터 벗어야〉

유홍준 교수 · '빛은 한반도로부터'

CHAPTER 1. 일본 역사 제대로 알기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한반도에서 이뤄진 것만 이해하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계속에서 19세기까지를 이야기하면 동아시아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히 해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을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한일관계에 불편한 상황이 많이
있지만, 결국은 이웃으로 같이 가야할 동반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G2라는 거대한 두 나라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이 EU로 큰 덩치가 되었을 때
한국과 일본은 그들과 함께 경쟁하면서 살아갈 때 협력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습니다. 본래 한일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최근 100년 사이의 일입니다.
임진왜란 때 그들이 7년동안 우리를 침략했다가 물러나갔던 것이 한일관계가 어긋난 몇 시간 안되는 짧은 기간입니다. 2300년 동안 우리가 그들과 트러블을 갖고 있었던
것은 겨우 100년입니다. 역사적인 뿌리부터 다시 살펴볼 소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 옆에 사는 일본인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말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고등교육을 받아오는 동안에, 제대로 배운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고 무서워하는데
오직 한국인만 우리를 무시한다고 말합니다. 일본이 고대국가 시절에 뭘 했고,
문화가 뭐 였고, 이야기를 하면 한국인들은 천편일륜적으로 한국이 해준거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 역사 속에서 역사 왜곡을 참 많이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는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가 있어서 역사를 왜곡했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가 있어서 일본을 무시합니다.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한국과 일본은 우정의 관계로 갈 수 있습니다.

2 장 〈백제로부터 전파된 일본의 찬란한 문화〉

유홍준 교수 · '빛은 한반도로부터'

CHAPTER 2. 백제로부터 전파된 일본의 찬란한 문화

일본 열도에 문명이 들어가면서 역사의 중심이 규슈에서 아스카, 나라, 오사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710년 나라의 수도를 옮기고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 당시 한반도는 삼국시대가 끝나고 통일신라 시대였습니다.
그 때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한반도를 넘어섰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794년에 교토로 이사를 가서 그 때부터 1000년동안 교토가 일본 천왕이 머무는
역사의 중심지역이었습니다. 300년~600년 사이 일본의 주 무대는 오사카와 나라였습니다. 오사카에서 아스카로 넘어가는 산맥 근처에 '가까운 아스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였습니다. 그 동네 풍경을 보면 일본 풍경이 아니라 우리나라 동네 사진을 찍어둔 것 같습니다.

아스카는 한자로 편안할 안 자에, 잘 숙 자 입니다. 즉, 안숙(安宿) 편안이 잠 잘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아스카에 온 첫 번째 사람은 가야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야 사람들이 이곳에 온 이후로 토기가 달라졌습니다. 일본 토기 변화는 조몬 토기
에서 야요이 토기, 그 다음 스에키 토기로 바뀌게 됩니다. 스에키라는 단어는 쇠기라는 우리말을 일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쇠처럼 단단한 그릇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에키 토기는 가마에서 구웠기 때문에 빨간색이 모두 없어져 기와장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즈미(오사카 남부)라고 하는 곳에는 가야 토기와 똑같은 스에키를 굽던 가마가
발견되었습니다. 가야 이주민들이 그들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은 말입니다.
그리고 마구(馬具)가 함께 전파됩니다. 문명이 들어가면서 그들의 삶을 바꾸는데,
생활문화는 사라졌지만 죽음의 문화는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죽음의 문화를 통해 삶의 문화를 복원해 보는 것입니다.

고고학이 과연 낭만적일까요? 고대 문화를 발굴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덤을 파지 않으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화는 거짓말 하지 않기 때문에 가야인들이 일본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습니다.

3 장 〈日 조상은 도래인, 근거는..〉

유홍준 교수 · '빛은 한반도로부터'

CHAPTER 3. 천왕가 자손을 키운 도래인?

아스카 시대, 일본이라는 나라가 형성되기 이전에 천황가 집안을 중심으로
해서 호족이 형성됐습니다. 천황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소가씨 가문이었습니다.
소가노 우마코가 도래인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증명해서 소가노 우마코가 도래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일본 사람이 스스로 소가노 우마코가 도래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소가노 우마코 집안을 일으킨 사람은 소가 마치입니다.
그런데 소가 마치는 일본으로 피난 간 백제의 목협만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도래인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소가 마치 집안은 아스카 시대의 사실상 실권자였습니다. 일본 천황가의 며느리들은 전부 소가씨 집안 여자였습니다. 외척입니다.
외척이 우리의 외척과는 다릅니다. 아스카 시대 일본의 결혼 풍습은 방초혼이었습니다. 결혼을 해도 따로 살고 남자가 필요할 때 처갓집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결혼 후 여자는 친정에서 자식을 양육합니다. 즉 천황가의 자식은 소가씨 엄마 밑에서 자라는 것이죠.

아스카에 있는 도래인 신사 '히노쿠마 신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아야씨라는 성이 있는데, 대장장이, 토목, 금속기술, 심지어 경호까지 하는
기술 집단이었습니다. 도래인에 의해 모든 것이 유지됐습니다. 그런데 도래인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토호세력들의 반대로 승불파와 배불파가 부딪치게 됩니다. 배불파 지도자는 모노노베, 승불파 지도자는 소가씨였습니다.

결국 소가씨가 전쟁에서 이긴뒤 천황을 제거하고 스이코 여왕을 옹립했습니다.
스이코 여왕은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태자에게 성덕태자에게 모든 정권을 위임합니다. 바로 이 사람이 불교를 기반으로 고대국가 토대를 만들고 헌법을 만들어 율령 국가
기초를 닦습니다. 결국은 신앙의 대상이 되어 성덕종의 종주로 모셔집니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은 성덕태자이고, 최고액권이 발행될 때마다 성덕태자 초상을 사용하게 됩니다.

4 장 〈도래인이 만든 문화, 우리 것 아니다.〉

유홍준 교수 · '빛은 한반도로부터'

CHAPTER 4. 일본 고대국가의 눈부신 성장

법륭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입니다.
법륭사 오중탑과 부여 정림사탑은 비슷하면서 달라 보입니다.
그만큼 일본화 됐다는 얘기입니다. 법륭사 오중탑을 그림으로 보면
5층인거 같기도 하고 6층인거 같기도 합니다. 1층이 속지붕이 있는 이중 구조입니다.
이것을 빼고 보면 확실한 5층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여 정림사탑이 가지고 있는
비례감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300년~550년은 삼국과 가야시대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삼국과 가야와 왜의 시대였습니다. 바로 5국 시대였습니다.
1500년 전 일본과의 관계를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올바른 역사 인식이 안 됩니다.
한반도 역사에 국한시켜 왜를 항상 적대적 관계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덕태자를 병(病)간호 하던 부인이 먼저 죽고 다음 날 성덕태자도 사망합니다.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비는 석가삼존상을 제작합니다.
632년에 청동 석가삼존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만든 기술자는 도래인이었습니다.
여기서 '도래인이 만든 것을 우리가 했다고 할 수 있나?'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반도에서 살 수 없어서 일본 열도에 간 도래인들이 생존을 위해 그들의 문화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일본 문화입니다. 이 일본 문화에 한국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지 도래인 문화를 우리 문화로 편입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러한 옹졸한 시각으로
역사를 본다면 역사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전수했다는 주장은 무리입니다. 중국에서 전수받은 문화를 우리식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일본이 자기 문화를 가짐으로 동아시아 문화가 풍부해졌습니다.
유럽의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독일과 네덜란드의 동참으로 더 풍부해졌듯이 말입니다.

신라에서 건너 간 진하승 조각이 광륭사 호류지에 모셔져 있습니다.
진하승은 일본에서 최고로 성공한 도래인입니다. 진하승의 성공사례를 보면
토목사업, 섬유사업, 주류사업이 있습니다. 교토 니시진 비단, 마쓰오 신사 술의 시조는 진하승 가문입니다. 진하승(하타 씨)의 씨사가 광륭사인데 그곳에 일본 국보 제1호
목조 반가사유상이 있는 것입니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일본 국보
제1호 목조 반가사유상을 비교해 보면 똑 닮았습니다. 여고생이 목조반가사유상의
손가락을 부러뜨렸습니다. 목조반가사유상이 한반도의 육송으로 제작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확한 경로는 모르지만 목조반가사유상은 한반도 양식의 도래 불상입니다.

5 장 〈스스로 왜곡한 역사 '백촌강 전투'를 아시나요?〉

유홍준 교수 · '빛은 한반도로부터'

CHAPTER 5. 우리가 스스로 왜곡한 역사, 백촌강 전투

규슈 다자이후에 있는 수성에는 '663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퇴각한
야마토 정부의 군사와 백제의 장수들이 쌓은 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제가 660년에 나당 연합군에 망했다, 그리고 백제의 귀족들이 부흥 운동을 하다
내분이 일어나서 결국은 망하고 말았다, 이게 우리 역사책에 쓰여 있는 백제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고 오슬로 대학의 한국사 교수인 박노자 씨는 일본 역사책에서 한 챕터를 얘기하는 660년 백촌강 전투, 당나라와 왜, 삼국이 얽힌 동아시아에서 5개국이 혈전을 벌였던 이 전투를 대한민국 교과서에서는 단 한 줄만 쓰는 이런 역사교육을 시키고 어떻게 역사 의식을 갖느냐, 한국인들이여 각성하라는 일침을 했습니다.

일본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것은 이 백촌강 전투였습니다.
백촌강 전투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백제가 왜의 지원을 받아
나당연합군과 벌인 전투입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백촌강 전투의 진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는 의자왕이 잡혀가자 일본에 있던 부여풍 왕자를
불러서 다시 왕으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이에 야마토 정부가 백제를 돕기 위해 왕자와 함께 200척 배와 5천 명의 군사를 보냈습니다. 663년 8월 25일 나당연합과 마지막
전투하는 백제를 위해 야마토 정부에서 800척 배와 2만 7천명 군사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싸웠는데 삼국사기에 '백촌강의 불이 하루종일 꺼지지 않았다'고
하는 그 전투에서 백제가 멸망을 하게 됩니다. 그 때 백제의 장수와 귀족들은 일본으로 피난가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피난을 갑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여기로 와서 이들은 나당연합군이 뒤쫓아오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백제식
성(城)이 있는 거예요. 일본 성하고 전혀 달라요. 그런데 앞뒤 사정은 보지 않고
규슈와 오사카 지역에 백제식 성이 있어서 여기는 백제가 지배했다는 식으로
끼워맞춰서 이야기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치러 올라갔고 신라가 당나라를 치니까
끝내 이 성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끝났죠. 그 대신에 이를 계기로 왜는 702년
다이호 율령을 반포, 천황제 확립 '일본'이라 부르며 본격적인 고대국가 면모 갖추게
됩니다. 663년 8월에 동아시아에 있었던 이 엄청난 전투가 우리 책에서 백제 부흥운동이라고 해서 농성하고 머리띠 두르고 있다가 그만둔 것처럼 쓰여 있는 것은
우리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