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황금심 작사 이서구 작곡 전오승
一 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아 님 고이 든 그날 밤이 차마 그려 치마폭에 목매는가
二 대전마마 뫼시던 날에 칠보단장 화사하던 장희빈아 버림받는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사무라이 出身 데라우치의 韓國 赴任 1910년 7월 21일 황성신문 잡보란에 '통감 환영(統監歡迎)'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선통감부 제3대 통감으로 임명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1~1919)〈사진〉가 일본을 떠나 7월 23일 인천에 도착하게 된다는 소식이다.
데라우치는 원래 지방의 무사였다.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에 막부(幕府)를 몰아내는 '보신전쟁'에 참가할 만큼 무사 기질이 강했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7년) 이후에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877년 왕정복고의 일등공신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반란을 일으킨 세이난(西南)전쟁에 참전했다가 오른팔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이후 프랑스 주재 무관을 시작으로 육군사관학교 교장, 초대 교육총감, 참모본부차장, 육군 대신 등의 주요보직을 거쳐 1910년 5월 30일 조선통감에 임명된 것이다. 그의 임명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순종황제는 '신임을 축하하며 건강을 기도한다'는 전문을 일본에 보냈다.
데라우치는 7월 23일 오전 10시경 일본 해군 순양함 '야쿠모(八雲)'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했다. 군함에서 하선한 직후 곧바로 인천 정거장으로 이동하여 특별열차를 탔다. 인천에서 경성 남대문 정거장까지 경인선 철도 연변에는 일본 헌병과 경찰이 포진하여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조선 황실에서는 칙사를 인천까지 보내고 내각의 각 대신도 모두 출영(出迎)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학부에서는 각급 관•공립학교에 공문을 보내어 통감이 조선에 도착하는 날 각 학교 임원들이 학생들을 15명씩 차출하여 환영 대열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황성신문). 일장기를 앞세운 특별열차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하자, 정부는 원수급에 해당하는 의전을 베풀었다.
데라우치는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 달 동안 조선 강점의 모든 절차를 끝내고 한일합병 처리안을 일본정부에 제출한 뒤, 이완용을 앞세워 한일합병조약을 조인, 8월 29일 공포했다. 강제합병 후 초대 조선총독에 임명(1910.10.1.)된 그는 '집회취체령'을 공포하여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시켰으며, '조선주차헌병조례(朝鮮駐箚憲兵條例)(1910.9.12.)'를 발표하여 일본 헌병을 증원하고 경찰 업무를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일본 헌병대에서 장교 30명, 하사 600명, 헌병 3000여명을 충원받아 각 지역에 헌병대 분견소를 설치하고 조선을 총칼로 억눌렀다.
그는 총독에 임명되기 하루 전인 9월 30일 이완용 저격 사건으로 체포 수감되어 있던 이재명 의사에 대해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치안 방해를 이유로 '초등대한역사' 등 여러 서적의 발매를 금지 압수하고, '서북학회월보' 등 사회단체의 회보 발행 허가를 취소했으며, 민족 신문을 모두 폐간 조치했다.
중국에 망명 중이던 안명근(安明根, 안중근 의사의 종제) 선생이 1910년 12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자 황해도 일대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중 체포되자, 이를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이라고 날조해 60여명의 인사를 검거해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이 같은 악랄한 탄압이 한국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공포의 시대가 되었다. 그의 악명높은 무단통치(武斷統治)는 1916년 총독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