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史.軍歌(日)

徵兵, 徵用, 挺身隊 그리고 從軍 慰安婦

bsk5865 2015. 5. 14. 13:52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5.14 06:19

 

徵兵, 徵用, 挺身隊 그리고 從軍 慰安婦 |★....일반 게시판

황재순  http://cafe.daum.net/enkamom/KWfw/30286 

 

일제 때에 조선인 징병은 1944년부터 시행되었는데, 1923년 12월 1일 이후 출생자부터 신체검사를 거쳐서 일본군으로 데려 갔지요. 조선인 징병령을 일본 국회에서 심의할 때에 “일본군이 조선인 일본군에게 총을 맞으면 어떻게 할 거냐” 하면서 일본 야당의 반대도 있었지만 그동안 조선인의 숙원이었던 차별대우를 풀어주는 차원에서 “금지해 왔던 창씨개명을 허용해 주면서 명실상부한 내선일체를 완전히 실현하는 것”으로 조선인들을 먼저 달래 놓기로 하고 조선인 징병령을 통과시켰다고 하

네요.

 

직장생활을 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창씨개명 허용안을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종친회 어르신들을 비롯한 식자층은 젊은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조선 전체가 창씨개명 논쟁의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지요.

 

조선인만 다니는 고등보통학교도 중학교로 교명 변경도 허용해 주는 등 나름대로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해 주려는 조치도 취해졌지만, 이에 대한 댓가로 조선의 많은 청년들은 징병법에 따라 일본의 정규군에 편성되어 총알받이로 죽어 가야 했습니다.

 

 

징용은 20세 이상의 남자를 크고 작은 노동 일에 동원하려고 징발해 가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남자만 징용 데려 갔지만 나중에는 여자도 징용으로 데려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당시에 일본 여자만 국민 등록이 되어 있어서 조선인 여자들은 징용으로는 못 데려 갔다네요.

 

여자 정신대는 군복 공장이나 무기 제조 공장 등에서 일하는 직공들의 자발적인 명칭이었는데, 1944년부터는 의무적인 강제 명칭이 되어 버렸지요.

또 학생 근로 정신대 같은 것도 생겨 났습니다. 중학생이라면 일본인, 조선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제히 공장 일을 도와 줘야 했습니다. 1944년만 해도 야간이나 주말에 학교로 불러 공부도 시키고 했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못했다고 합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중학생들은 모두들 공장에서 일하다가 전쟁이 끝났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8월 18일 학교로부터 “수학증명서(修學證明書)”란 걸 받아서 일본인 학생들은 일본으로 돌아 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종군 위안부는 일본 어느 법령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업종입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크고 작은 전쟁 때마다 반드시 챙겨서 가는 단체입니다. 물론 비공식이지요. 일종의 민간 위탁 사업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오리발이지요.

 

 

일본 여성으로 이루어진 종군 위안부가 우리나라에 처음 상륙한 것이 청일 전쟁 때이지요. 그리고 몇 년 후 노일전쟁 때 또 한 팀이 들어 왔구요. 대부분 일본으로 돌아갔다지만 일부가 남아서 영업을 계속했는데 이들이 우리나라 성매매업의 효시가 되지요. 예전의 기생들은 이들과 완전히 다른 업종이지요. 본래 우리나라는 성매매도 성병도 없는 청정한 나라였습니다.

 

1930년대에 관동군이 증강되면서 만주사태, 중일전쟁 등이 발발하였는데 이 때 일본군은 대규모의 종군 위안부가 필요하였지요. 징용이니 정신대니 하는 것이 법제화되기도 전이니 비공식적으로 조선총독부에 조선도라지꽃 2만을 주문하였고 당장 1만을 먼저 조달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사 이래 없던 형태의 사람 모집이어서 그런지 초기에 이 모집 업무를 자원한 사람 중에는 거짓말이나 유괴 등으로 위안부를 모집하다가 경찰서에 입건되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네요. 그러자 일본군의 체면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여 “모집 책임자 인선에서부터 각별히 주의를 하고 지역 경찰과도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해 달라”는 특별 통첩도 보내는 등 법석을 떨었습니다.

 

통상 병력 1개 소대(25-38명) 당 1명 꼴로 위안부 규모를 유지했는데, 처음에는 “병사 1명당 제한시간 30분”이라든가 “위안부 근무 1일 12시간 이내” 등의 규칙이 어느 정도 지켜졌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 규칙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일본, 조선, 만주, 대만 여성을 상대로 위안부를 모집해 갔지만 전쟁 지역이 확대되자 위안부 모집 지역도 버마,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로 확대되었습니다. 말이 좋아 “모집”이지 거짓말로 속여서 데려온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는 유럽의 식민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욕심으로 일본군을 도와줘야 한다면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이 종군 위안부 모집에 더욱 앞장섰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요.

 

 

일본인 여성의 경우는 징용이나 여자정신대 갔다가 봉급을 몇 배 더 준다는 종군 위안부에 자진해서 온 경우도 많다지만, 조선, 대만, 태국 여성들은 일본 자체 법령 미비로 징용으로는 못 끌어 가니 거의 대부분이 위안부 모집업자의 농간으로 속아서 온 것이지요.

 

비공식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물의가 자주 발생하자, 1944년도에는 공식적으로 신문 광고까지 내어 종군 위안부를 모집하였습니다. 위안부 광고만큼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조선일보, 동아일보만 빼고 전 신문에 일제히 모집 공고가 났습니다.

 

10월 27일자 매일신보 광고를 보면 18-30세 사이의 건강한 여자면 다 가능하다고 하였고, 희망자는 종로구 낙원동 조선여관 3층에 허 씨를 찾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허 씨라고 하는 사람은 조선인 여자였다고 하니 어째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예전에는 일본 정부가 “1945년 6월부터 종전 때까지 마지막 3개월 봉급을 당시에 지급 못한 것 빼고는 책임질 사항이 없다”면서 발뺌하는 와중에서도 종군 위안부 모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부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대신 사과를 하는 일이 간간이 있었는데요.

 

요즈음에는 일본 국내 선거운동 차원에서 지방의 시장까지 나와서 “사과는 할만큼 했다”, “일본만 그 짓 했냐”면서 거꾸로 큰소리치며 관련 국가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침략하고 있으니 참으로 분통이 터지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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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