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죽암 문우곤 15.09.14 17:23
천이공노할 명성황후 弑害犯들- 그 後孫들 110년만에 謝罪 (姜吉成-제공)
옥호루(玉壺樓)에 난입, 황후를 시해했던 범인 48명 가운데 구니도모
시게아키(國友重章)의 손자 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84) 씨와 이에
이리 가가치(家入嘉吉)의 손자며느리 이에이리 게이코(家入惠子 ) 씨,
그리고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 10명 등 모두 12명이
9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진정한 사죄를 하러 왔다. 이제 시작이다"라며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막론하고 사죄나 유감 등 어떤 반응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마저 최근의 우경화 분위기에 밀려 삭제될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씻으러 한국에 갑니다'고 말씀 올렸다"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서 좋은 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느껴왔다"고 말했다.
하기 위해
묘소에서 극진한 정성으로 차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사과의 횟수만 늘어났다"면서 "당신들처럼 진심으로 사죄하는
일본인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자"며 악수를 청하자 가와노 씨는
눈물을 흘리며 최 교수의 손을 잡았다.
베어 황후에게 바치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고종의 의지
때문이었다"며 많은 자객이 일본에 밀파됐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친일파 우범선(우장춘 박사의 부친)을 암살하는 정도에 그쳤다"
고 소개하기도 했다.
사용된 칼을 두 집안에서 발견하는 등 각종 기록과 자료를 속속 발굴
중이라고 밝혔다.
만들었다는 명성황후의 석조상도 발견됐다고 가이 씨는 전했다.
20여명이 한성신보 기자와 직원 등 구마모토 출신이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수웅 감독(다큐서울 대표)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성사됐다. 정 감독이 작년 11월부터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 후손들 110년 만의 사죄'는 조만간
52분짜리 2부작으로 완성돼 SBS와 일본의 한 TV 방송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들을 알게 돼 이렇게 올 기회가
생겼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일본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취지에서 모인 '평화헌법을 살리는 구마모토현민 모임'에서 출발
한 것으로, 활동 도중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알게됐다.
기록하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과 전말 [에조보고서]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를,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때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라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으로서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하기 이전에는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으며, 에조의 보고서는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이전 상관에게 보내진 셈이었다.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인데, 그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학자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
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이 존재한다. 이 능욕설 대목은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하였다는 근거로 여겨지지만,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다.
친북조선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
쓰라 아키라 등이 거론한 바 있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김진명 씨는 주장한다.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번역,
조선일보사 출간)에 잠시 등장한다.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음을 깨닫고, 그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
받았으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뒤 한국과 일본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라며 물러섰다. 막다른 골목
에서 김진명은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에게 보고서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고 귀국한다.
보내었다. 그중에는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고, 그 책을 읽다가
김진명은 ‘능욕’ 장면 중 일부를 발견하였지만, 에조 보고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를 언급한 그 책의 223쪽 주석에 출전이 “국립국회
도서관 헌정자료실 장<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라고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 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
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
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 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1]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사변 직후 바로 작성되어 스에마쓰 법제국장에게 전달된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일본 관련자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쓴것이라 한다.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ㅜ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음부를...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하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곳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이가 한 나라의 황후를 그렇게 대하는가.
이 경우는 고대에도 근대에도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물론 이미 명성황후는 죽은 후였다.여섯 명은 유학파였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진상을 안 러시아 공사관이
곧바로 일본 정부에 알리고 일본 낭인들을 불러들였다.
출처: http://pann.nate.com/b31228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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