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진실을 우리 청소년들에게 바르게 (김시라님 메일)▤=▶
김성운 조회 31 추천 0 2016.06.18. 16:14 http://cafe.daum.net/kso195/P0p4/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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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진실을 우리 청소년들에게 바르게 알리고 싶다!’
-鄭淳台-
6·25전적지를 홀대하는 대한민국
3년 전, 낙동강교두보 방어전의 핵심지역이었던 靈山(영산)전투의 현장을 답사를 위해 경남 함안군 칠서면에서 5번 국도를 타고 낙동대교를 건너 창녕군 靈山面(영산면)에 진입했다.
우선, ‘영산지구전적비’가 세워져 있다는 ‘靈山호국공원’부터 찾아 나섰다. 靈山(영산)이라면 그 이름 자체가 신령한 산 혹은 神佛(신불)을 모시어 제사 지내는 산이란 뜻 아닌가? 영산호국공원 앞 샛강인 南川(남천) 위에 조선 정조 때(1780년) 영산 백성들이 축조한 무지개다리(萬年橋·만년교)가 걸려 있다.
만년교 주위에 한꺼번에 만발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봄꽃들과 어우러져 그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호국공원의 진입로이기도 한 만년교는 흙발로 그냥 밟고 지나가기에 죄송한 보물 제564호이다. 만년교를 건너면 ‘임진왜란 호국충혼탑’과 ‘3·1절기념탑’이 보인다.
그러나 ‘영산지구전적비’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행인들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반응들이었다. 안내판조차 없었다. 작은 판자에 화살표시(→) 하나에다 ‘영산지구전적비’라고 써놓으면 될 일이었다.
마침, 만년교를 지나가는 村老(촌로)가 호국공원 동쪽 평지에 돌출한 고지(235m)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산지구전적비는 저 위에 있다”고 말했다. 꽤 가파른 계단을 올라 235고지 위에 있는 영산지구전적비에 참배했다. 영산지구는 6·25전쟁의 낙동강교두보 방어전투 당시 북한군의 공세를 美 제24사단과 美 제5해병연대 등이 결사방어로 저지한 격전지이다.
235고지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영산∼부곡∼밀양∼삼랑진으로 이어지는 79번 국도와 영산∼창녕읍∼대구로 달리는 5번 국도가 내려다보인다. 밀양과 삼랑진은 경부선 기차가 경유하는 주요 역이다. 당시 대구에는 제8군사령부와 육군본부가 있었다. 敵이 밀양이나 삼랑진을 점령하면 낙동강교두보는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게 되어 있었다. 그럴 경우, 美軍은 부산항에 집결, 일본으로 철수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영산지구 전투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美軍(1950년 9월)/ 출처: 군사편찬연구소 刊 <韓國戰史> |
영산지구의 瞰制(감제·Command & Domination)고지인 235고지를 내려와 釜谷(부곡) 쪽을 답사하기 위해 79번 국도로 접어드려는 순간, 수상한 플레카드 하나가 나붙어 있었다. 거기엔 ‘창녕이 낳은 통일일꾼 ○○○ 교수의 국제정세와 한반도의 선택과 평화협정 강연회’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통일일꾼’, ‘평화협정’은 북한정권과 從北(종북)세력의 상투적인 말이다.
북측이 주장하는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은 주한미군의 철수이다.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從北세력과 결합해 남한을 먹겠다는 것이 북한의 셈법인 것이다. 종북집회의 플래카드는 금방 눈에 띄고, 6·25전쟁 전적지를 알리는 안내판은 보이는 않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實相(실상)이다. 6·25전쟁의 진실을 어떻게 하면 우리 후진에게 잘 알릴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6·25전쟁의 현장》을 집필하게 된 첫 번째 동기이다.
여성의 유방처럼 彎曲部(만곡부)를 이루며 南流(남류)하던 낙동강은 영산∼南旨에 이르러 니은(ㄴ)자 모양으로 크게 꺾어져 東流(동류)한다. 영천 서쪽 15km인 낙동강 彎曲部(만곡부)의 중심에 위치한 박진고지(창녕군 대곡리)에 ‘박진지구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 박진지역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낙동강을 도하하여 최후의 공세를 벌이던 적과 미군이 2주간 사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당시, 북한군 최정에 부대인 제4사단이 (1950년) 8월5일 야간에 나루터를 이용, 은밀히 기습 침투함으로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8월11일에는 영산읍까지 침공하였다. 북한군은 일거에 부산을 함락시키기 위해 박진나루(낙동강을 말함)에 가마니 등으로 水中橋(수중교)를 만들고, 각종 차량과 병력 등 주력을 침투시킴으로써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유엔군은 대구·마산 등지에 있던 예비병력을 이곳에 집중시킴으로써 詩南里(시남리)· 大鳳里(대봉리)· 成士里(성사리)에서 대혈전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8월19일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혀 적을 강 너머로 완전 격퇴했다. 이곳에서 美 제24사단· 제2사단· 해병 제5연대가 보여준 百折不屈(백절불굴)의 투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이니…>
당시의 영산읍은 인구 감소로 현재 영산면으로 되어 있다. 수중교는 도하작전 시 병력·차량· 탱크·대포 등을 수송하기 위해 江의 수면에 가설하는 다리이다.
대한민국과 人共의 경계선이었던 구절치 고개
6·25전쟁을 전후하여 敵의 제2전선이 형성되었던 지리산과 더불어 빨치산 근거지로서 쌍벽을 이뤘던 곳이 전북 淳昌郡(순창군)의 回文山(회문산)이었다. 꼭 10년 전, 필자는 호남의 향토사연구가 崔洵植(최순식·故人)옹과 함께 회문산을 답사하기 위해 전북 정읍시 七寶面(칠보면)의 九節峙(구절치) 고개를 넘었다.
구절치 옆으로는 섬진강의 강물을 역류· 낙하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칠보발전소가 보인다. 6·25전쟁 시기, 칠보발전소는 빨치산의 공격으로부터 반드시 死守(사수)해야만 했던 1급 국가기간시설이었다. 구절치 너머의 山內面(산내면)은 빨치산이 지배하는 소위 ‘인민공화국’이었고, 구절치 이쪽 칠보면은 우리 공권력이 통하던 ‘대한민국’이었다. 崔옹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빨치산의 보투(보급투쟁·생필품 약탈)에 견디다 못해 구절치를 넘다가 빨치산에게 붙잡혀 날창으로 학살당한 山內面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머슴이 완장을 차고 옛 주인의 배에다 죽창을 박아 넣는 아수라장의 시절이었거든요.”
지금 구절치는 번듯한 포장도로지만, 그때는 장작 수송용 트럭 한 대가 간신히 지나다닐 만큼 좁고 험한 산길이었다. 55번 지방도로를 타고 산내면을 지나 순창군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 ‘오봉휴게소’라는 간판이 붙은 시골 가게가 있었고, 그 옆 빈 터에 널찍한 평상 하나를 놓고, 그 위에 村老들이 모여 앉아 담소하고 있었다. 崔 선생과 필자는 노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修人事(수인사)를 차린 뒤 80대 노인에게 물었다.
— 여기가 1951년 봄에 주민들이 경찰대에게 학살당한 삼밭마을입니까?
“그렇소만…”
— 왜, 그런 끔직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전투경찰 10여 명이 이곳 民家에서 밥을 시켜 먹고 있다가 빨치산의 급습을 받아 전멸한 사태가 발생했소. 나중에 전투경찰대가 이곳 빨치산 하나를 생포했는데, 이 마을의 通匪分子(통비분자)가 전투경찰대원들의 위치를 알려 주어 기습했다고 자백했당게요. 그 보복으로 전투경찰대가 몰려와 우리 마을 사람을 39명이나 죽여 부렀소. 눈치 빠른 통비분자들은 경찰대가 넘어오기 전에 죄다 산으로 튀었으니께. 억울한 양민들만 그렇게 당한 거라우.”
그런데 옆에 있던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저런 얘기를 하는 저 영감도 실은 빨치산 동조자였다”고 슬쩍 귀띔해 주었다. 그때는 공산주의의 實相(실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목소리를 드높이던 이념 과잉의 시대였다. 전투경찰대와 대치해 陣地(진지)를 굳힌 빨치산들은 赤旗歌(적기가)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했다. 원래, 적기가는 英國 노동당의 비공식적 黨歌(당가), 아일랜드 노동당의 공식 당가였는데, 이것이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으로 번진 것이었다.
<민중의 기, 붉은 깃발은 / 전사의 시체로 쌓았노라 / 시체가 가시고 굳기 전에 /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 / (中略) / 비겁한 놈아, 갈려면 가라 /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
빨치산이 軍警을 조준사격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회문산
광복∼6·25전쟁 시기의 빨치산이나 좌익의 다수는 그들 나름으로는 공평하게 나눠 먹는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라는 虛妄(허망)에의 정열을 불태웠다. 그들이 그때 ‘역사의 줄’을 잘못 섰다고 해서 오늘의 잣대로 그들의 사람됨을 경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더욱이 배우는 과정에 있는 청년들의 날선 이념은 나이를 먹을수록 부드러워지게 마련이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칼 포퍼(1902∼1994)는 “젊어서 마르크스 주의자가 되어보지 않은 자는 바보요,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 주의자로 남아 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그때 좌익들이 憧憬(동경)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오늘은 김일성 3代를 신격화하는 소수의 사회주의 귀족들만 특권을 누리고, 절대다수의 民草(민초)는 밥을 굶고 있다. 그들은 지금 ‘거짓의 공화국’, ‘가난의 왕조’에 살면서도 앵무새처럼 “남부럽지 않다!”고 외치고 있다.
나쁜 것은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 虛構(허구)인 것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일성사상 운운하는 우리 사회의 從北들이다. 1980∼2000년 시기에 學內 운동권을 지배한 그룹은 NL파(주사파·김일성주의)로서 지금 우리 사회의 선출직 또는 고위직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심지어는 大權을 노리는 사람까지 있다.
그런 자라면 우선 轉向(전향)선언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향선언을 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가 신용할 수 없을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용납해서도 안 된다. 위에서 거론한 칼 포퍼도 15세 때 칼 마르크스에게 심취했다가 17세에 전향해, 反전체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철학을 펼쳤다.
지도상 玉井湖(옥정호) 바로 남쪽인 회문산 가는 길은 정읍 쪽에선 지형상 상당히 까다롭다. 옥정호 東岸(동안)인 山內란 곳에서 55번 지방도로를 12km 달리면 雙置(쌍치)란 곳이 나온다. 쌍치에서 21번 국도를 15km 쯤 달리면 龜林(구림)이란 지역이다. 구림에서 72번 군도를 5km 쯤 가면 안정리 삼거리. 여기서 좌회전해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회문산자연휴양림’의 매표소에 이른다.
회문산전적비 비문 전경 |
매표소를 지나 700m 쯤 오르면 헬기장이 있고, 여기서 차도가 끊긴다.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회문산의 최고봉인 회문봉(837m)이고, 그 뒤로는 장군봉(837m)과 깃대봉(775m)이 좌우에서 侍立(시립)해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삼거리 쪽으로 조금 내려와 ‘6·25양민희생자 위령탑’을 참배한 뒤, 빨치산 전북도당사령부를 복원해 두었다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빨치산사령부’ 입구엔 6·25전쟁과 그 전후 시대의 참상을 돋을새김[陽刻]한 동판이 나붙어 있었다. 빨치산 대원이 우리 軍警(군경)을 향해 소총을 정조준하고 있고, 그 아래엔 난리통에 떠도는 민초들의 피난 행렬과 학살당한 양민들의 시체가 무더기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처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것들을 만들어 두었을까? ‘2000년 6월25일 회문산 자연휴양림’의 명의로 제작된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본 시설은 이곳 회문산에 있던 빨치산 전북도당사령부를 재현한 것으로서, ○○을 어지럽히고, 양민을 ○○하는 등 비인도적인 ○○을 자행하였는 바, 국군의 토벌작전으로 ○○하여 지리산 남부군과 합치기 전에 처절한 생활상을 표현하였다.>
○○부분은 누군가에 의해 뾰족한 쇠뭉치로 찍혀 글자가 완전히 사라진 부분이다. ○○의 부분은 ‘치안’, ‘학살’, ‘만행’, ‘도주’란 낱말을 차례로 넣으면 문맥이 통할 것으로 보였다. 누구의 짓일까? 책임회피를 노린 교묘한 수법처럼 보였다.
30평 남짓한 ‘빨치산 전북도당사령부’의 아지트 내부로 들어갔다. 아지트 입구에는 밀랍인형의 빨치산 보초가 바깥의 군경을 향해 총부리를 겨냥하고 있다. 道黨(도당)위원장실에는 빨치산 두목이 책상에 앉아 부하에게 뭔가 자상하게 지시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아지트 내 내무반에는 부상 대원을 치료하고 있는 가녀린 여성 간호대원의 모습, 소총을 손질하는 대원의 모습, 침상에 누워 책을 읽는 지식청년풍 대원의 모습 등을 實物大(실물대)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런 利敵(이적)시설들을 누가 누구의 돈으로 누구를 위해 만들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히지 않고 있다. 從北 성향의 교사들은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을 聖地(성지)처럼 탐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곳이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의 역사관을 오염시키는 소위 ‘해방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6·25전쟁의 현장》을 집필하게 된 두 번째 이유이다.
《6·25전쟁의 현장》을 쓰기 위해 필자는 지난 5년간 전국의 주요 전적지를 거의 빠짐없이 답사했다. 그럼에도 아직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기회가 나는 대로 답사를 계속해 원고를 보완해 나갈 생각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지역의 6·25 전적지도 답사해 이 글의 완성도를 높일 것이다.
휴전회담 이후 2년간 고지쟁탈전에서 守勢에 몰린 까닭
감명 깊었던 곳은 남북관계가 험악했던 2016년 4월, 8일간 GOP(남방한계선)의 동쪽 끝인 高城(고성) 통일전망대로부터 임진강 하구에 위치한 烏頭山(오두산) 통일전망대까지 248km(155마일)의 답사였다. 현재의 휴전선은 3년 1개월 2일(1128일)간 계속된 6·25 전쟁의 ‘최종 성적표’이다. 이 ‘성적표’를 확인하기 위해 필자가 민간인출입금지 지역인 최전방을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은 육군본부 軍史硏究所(소장 韓卨 육군 준장)의 협조 덕택이었다.
필자가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했던 4월4일 14시를 전후해, “으르렁! 쿵! 쾅!∼” 거리는 대포 소리가 이곳의 산과 바다를 계속 흔들어대고 있었다. 적의 해상도발에 대비한 우리 군의 저지훈련이었다. 북한이 남한을 향해 “核단추를 누르는 데는 1∼2초면 족하다”고 협박하던 상황에서도 고성 통일전망대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등 가족끼리의 관광객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전망대에 오르면 DMZ(De-militarized Zone·비무장지대)의 秘境(비경)이 다가온다. 문자 그대로라면 군대의 주둔이나 무기의 배치, 군사시설의 설치가 금지된 지역을 말하지만, 현재 피아 모두 DMZ 內 자기 쪽 GP(초소)에 상당한 병력과 공용화기 등을 배치해 두고 있다.
1953년 7월27일 停戰協定(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군사분계선(MLD)을 중심으로 각각 2km씩, 동해안에서 서해안에 이르는 248km의 지역이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남북은 모두 GOP를 前方으로 추진시켜 현재 원래 폭(4km)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는 곳이 많다.
필자의 1일차 답사의 제1목표는 군사분계선 북쪽에 위치한 敵 OP(관측소)인 ‘351고지 관찰’이었다. 美軍들은 351고지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고지가 “마치 배의 닻처럼 생겼다” 하여 그 이름을 ‘앵커 힐’(Anchor Hill)이라고 불렀다. 351고지를 관찰하기 위해 답사차량에 秘標(비표)인 노란색 깃발을 달고 고성 통일전망대 서쪽 8km에 위치한 717OP로 이동했다.
717OP에 오르면, 북한 땅이 되어버린 351고지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다. 10여 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던 351고지는 月飛山(월비산·469m) 동쪽 2km 지점에 위치한 동부전전의 최북단 돌출부로, 동해안지역으로 침투하는 敵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瞰制高地(감제고지)다. 또 그 인근에 강릉∼원산을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있어, 교통의 요지이다.
351고지는 휴전협상 막바지에 북한군에게 피탈되었다. 국군 제5사단으로부터 351고지를 인수한 국군 제15사단은 1953년 6월2일 휴전협상 타결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북한군 제7사단의 공세로 탈취당했다. 하지만 거기서 더 이상 전선이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38선 이북의 양양과 낙산사, 속초와 설악산, 그리고 거진·간성 지역을 우리 영토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보면 동해안 지역만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운 모습으로 북쪽으로 돌출해 있다. 동해안의 38선상 어항인 강원도 양양군 基士門里(기사문리)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의 거리는 약 80km, 최북단의 폭은 7∼8km정도로 좁아지지만 이곳이 6·25 전쟁에서 탈환한 38선 이북의 땅이다.
휴전협상이 개시된 1951년 7월10일부터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27일까지 2년간의 전쟁 양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高地 쟁탈전이었다. 양측은 휴전협상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전면공세를 자제하면서 회담에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제한공격에 주력했던 것이다.
1950년 7월14일~25일까지의 전황. 그해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사령부에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을 이양했다. 7월17일 국군 8사단이 경북 영주 지역을 탈환했지만, 서쪽 지역에서는 북한군의 남하가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7월25일, 대전과 전주가 북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
그러나 고지쟁탈전의 인적·물적 손해는 너무나 컸다. 조그마한 고지 하나의 쟁탈전에 피차 수천∼만수천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수만∼수십만 발의 포탄이 소모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중공군은 1952년 여름에 길이 250km, 폭 20∼30km의 땅굴진지를 완성해 방어력을 크게 강화시켜 놓고 있었다.
고지쟁탈전의 폐해를 절감한 美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고지쟁탈전을 지양하고, 중·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작전으로 北上하고 39도선 부근의 고저 혹은 元山(원산)에 미군이 상륙하는 작전도 병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은 워싱턴의 意中(의중)을 살핀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만약 그때, 밴플리트의 계획대로 대규모 北進(북진) 작전과 상륙작전을 병행해 원산을 점령했더라면 휴전선은 원산∼멸악산맥∼해주, 혹은 원산∼마식령산맥∼예성강 하구인 延安(연안)을 잇는 선으로 北上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351고지, 469고지(월비산)뿐만 아니라 斷腸(단장)의 능선, 수도고지, 지형능선, 화살머리고지, 불모고지, 네바다 전초고지, 베티고지 등의 중동부전선의 많은 고지를 상실했다. 351고지를 바라보면 지원국과 被지원국의 입장이 항상 同行(동행)할 수 없다는 역사적 진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최근, 남북관계가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각종 무력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특히 김정은 공산집단은 核실험에 몰두,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 무자비한 계획도 획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트럼프는 한국 안보의 무임승차론을 들먹이며,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의 속셈이 “돈(주둔비)을 더 내라”든 어떻든, 미국 유권자의 다수가 이런 트럼프를 대통령 후보로까지 만들었다는 데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북한의 核 위협을 동맹국의 ‘찢어진 핵우산’에 의지하기보다 우리 자신이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결단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조약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언명한 바 있다. 전성기(19세기) 大英제국의 수상이었던 팔머스턴卿은 “국제정치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이익이 있을 뿐”이라고 갈파했었다.
이미, 미국도 돈 드는 ‘세계경찰’ 역할에 지쳐 있다. 그런 미국이 新먼로주의로 흘러간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문제는 北의 도발에 대한 우리의 대비책이다. 필자가 《6·25전쟁의 현장》을 집필하기로 결심한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피의 능선에서 바라본 斷腸의 능선
다음 답사지는 강원도 양구군 月雲里(월운리)에 위치한 ‘피의 능선’ 전투의 현장이었다. ‘피의 능선’ 전투란 1951년 8월18일부터 9월5일까지 美 제2사단과 국군 제36연대가 수리봉(983m) 등의 고지群을 공격해 북한군 제12· 제27사단을 격퇴했던 전투다.
피의능선 전투 전적비 앞에 세워진 안내문/정순태 촬영 |
18일간 계속된 ‘피의 능선’ 전투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 인명손실이 컸다. 세로 5km, 가로 4km의 능선에 피아 합쳐 무려 36만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국군과 미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326명, 부상 2032명, 실종 414명이었다. 북한군에서는 1만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이 고지쟁탈전은 피아 2만여 명이 죽거나 다친 혈전이었다. 이때 한 종군기자가 이곳을 피로 얼룩진 稜線(능선)이라는 뜻에서 ‘피의 능선’(Bloody Ridgeline)이라 보도해 지금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부산 해운대에 출발하는 31번 국도는 필자가 자주 드나드는 秘境(비경)의 길이다. 이 길은 경북 영양과 봉화의 경계에 솟은 日月山(일월산)과 강원도의 太白山(태백산)을 거쳐 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의 포위공격으로 와해된 縣里(현리)전투의 현장인 五馬峙(오마치) 고개(인제군 상남면), 현재 제3군단사령부(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가 위치한 縣里(현리), 북류하는 內麟川(내린천)과 남류하는 麟北川(인북천)이 만나 昭陽江(소양강)을 이루는 合江里(합강리) 등 남한 땅의 속살을 거쳐 ‘피의 능선’에 이르는 것이다.
답사 2일차 14시, 양구군 東面 月雲(월운)저수지 바로 남쪽 東面橋(동면교)에서 백두산부대(육군 21사단)의 崔鳳均(최봉균) 상사와 만났다. 그가 손수 운전하는 군용 지프를 타고 험한 군사도로를 돌고 돌아 ‘피의 능선’ 중 제1봉인 983(수리봉)OP에 올랐다. ‘피의 능선’은 731·983·940·773고지 등이 동서로 이어지는 橫隔室 高地群(횡격실 고지군)을 말한다. 필자의 답사 며칠 전, 그 주봉인 수리봉(983)고지에서 6·25전쟁 때의 전사자의 유해 28구가 발굴되었다. 수리봉 OP에서는 철책선 너머로 금강산에 이르는 31번 국도와 북류하는 南江(남강)이 바로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펀치볼 일대 전경/정순태 촬영 |
수리봉OP 전방 11km에 ‘斷腸(단장)의 능선’의 主峰(주봉)인 931고지가 정면으로 보인다. ‘단장의 능선’은 남에서 북으로 894· 931· 851고지 등으로 이어지는 縱隔室(종격실) 능선이다. DMZ 일대는 야생화가 自生(자생)하는 꽃밭이다. 특히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꽃말을 지닌 벌노랑이가 핀 DMZ 일대는 노란색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60여 년간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DMZ는 세계적 생태보고를 이루고 있다.
‘단장의 능선’은 1951년 9월12일∼10월15일 전투에서 美 제2사단이 탈취했으나, 휴전 직전에 북한군에게 빼앗겼다. ‘단장의 능선’이란 지명은 전투 초기에 한 종군기자가 대대구호소에 들렀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라고 고통스럽게 부르짖는 부상병의 모습을 보고, 931고지 일대를 ‘Heart Break Ridgeline’라고 명명했던 데서 유래한다.
고지쟁탈전에서 아군의 강력한 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적은 後斜面(후사면)의 준비된 땅굴진지로 대피했다가, 아군의 공격개시와 함께 포격이 중지되면, 적은 다시 前斜面(전사면)의 땅굴진지로 이동하는 방법으로 전투력을 보존했다. 이는 산악지역에서 공격 시 火力의 우세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피의 능선’에서 내려와 東面橋(동면교)와 돌산령 터널을 거쳐 20km 거리인 亥安面(해안면)으로 이동했다. 해안면은 6·25전쟁 때 공산군의 보급기지였는데, 我軍이 피의 능선 공격 시 攻取(공취)한 곳이다. 해안면은 1000m 이상의 험한 산들로 빙 둘러싸인 盆地(분지)로, 미군들은 ‘펀치볼’(Punch bowl)이라 불렀다.
펀치볼지구 전투 전적비/정순태 촬영 |
북쪽 고지인 加七峰(가칠봉·1242m)에서 내려다본 해안분지가 마치 花菜(화채)를 담는 둥그런 그릇인 펀치볼을 닮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가칠봉 後斜面(후사면)에 있는 제4땅굴을 답사했다. 펀치볼의 시래기는 맛있다. 짙은 안개가 낀 아침의 펀치볼은 물이 가득 찬 호수처럼 보인다.
“초연이 지나간 깊은 계곡- 이름 모를 비목이여”
답사 3일차 아침, 양구군 동면 都沙(도사)에서 460번 지방도로를 타고 50여km 거리의 화천군 동촌리 ‘평화의댐’을 향해 출발했다. 평화의 댐에 이르는 460번 지방도로는 험준한 산 허리를 오르내리는 S字길의 연속이었다. 騎馬民族(기마민족)의 피를 들끓게 하는 자작나무의 숲이 자주 눈에 띄었고, 미세먼지 제로의 청정지대에서 심호흡을 즐길 수 있었지만, 解凍期(해동기)의 落石(낙석) 위험지구로 곳곳에서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평화의 댐’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 북한이 금강산댐을 터뜨려 水攻(수공)을 하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돔 지붕도 찰랑거릴 만큼의 홍수가 난다”고 하여 국민성금을 모아 완공시켰던 안보用 댐이다. 물론, 이때 야당은 평화의 댐 건설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나 10년 후에도 공사가 끝내지 못했던 북한의 금강산댐이 공사부실로 갑자기 균열이 생기자,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이미 완공된 ‘평화의 댐’의 높이를 서둘러 더 높이는 등 크게 보강했다.
‘평화의 댐’ 지역의 北漢江(북한강)은 1952년 4월부터 1953년 7월의 휴전 때까지 국군 제2군단과 美 제10군단의 戰鬪地境線(전투지경선)이었다. 휴전 1주일 전까지 격전지였던 바로 이곳 북한강변의 언덕 비탈에 碑木公園(비목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화약연기(硝煙·초연)가 휩쓸고 간 깊은 계곡에서 전사한 병사의 돌무덤을 쌓고 그 위에 그의 착검한 소총을 거꾸로 꽂고, 소총 개머리판에 그의 깨진 철모를 올려놓은 곳이 바로 비목공원이다.
碑木(비목)는 죽은 이의 身元(신원)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나무碑다. <비목>의 작사자는 1960년대 중반, 최전방 소대장(소위)으로 근무했던 한명희(詩人·1939∼) 씨다. 비목의 글씨는 그때 이미 10여 년 세월의 비바람을 먹고 풍화되어 있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가곡 <비목>은 작곡가 장일남(1932∼2006)이 곡을 붙여 1969년 처음 발표되었다. 조국을 위해 전사한 무명용사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표하는 이 노래는 곧 국민애창곡이 되었고, 고교 음악교과서에도 실렸으며, 1996년부터 매년 6월6일 현충일을 전후하여 열리는 이곳 비목문화제의 주제곡이 되었다.
꺼먹다리 위에서 바라본 화천수력발전소
꺼먹다리 전경/정순태 촬영 |
비목공원에서 460번 지방도로를 20km 쯤 南下해 九萬里(구만리)의 ‘꺼먹다리’와 그 건너편 화천수력발전소, 화천댐, 破虜湖(파로호)를 둘러보았다. ‘꺼먹다리’는 1945년 화천댐 준공과 함께 건설된 다리다. 다리의 상판 부분이 검정색 콜타르를 먹인 목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꺼먹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6·25전쟁의 격전지에 위치했고, 그때의 상흔도 간직해 6·25전쟁 영화의 단골 촬영지이기도 하다. 현재는 통행불가.
화천발전소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대륙 침략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완공된 수력발전소이다. 발전용량은 10만 8000kw이다. 1951년 5월, 용문산전투에서 승리한 국군 제6사단이 패주하는 중공군을 60km 거리인 화천저수지까지 추격했다. 화천저수지(훗날 파로호로 명명됨)로 퇴로가 차단된 중공군은 我軍(아군)의 집중포화에 수천 명이 저수지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필자는 파로호 부근 식당의 식탁에 오른 장어구이 요리를 차마 입에 댈 수 없었다. 파로호의 장어는 유별나게 살찌고 크다.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18일부터 20일까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龍門山(용문산)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제63군 휘하 187·188·189사단)의 공격을 美 공군의 화력지원을 받아 격퇴시킨 전투다. 용문산 전투에서 제6사단은 사살 1만7000여 명, 생포 2000여 명의 戰果(전과)를 올렸다.
화천수력발전소까지 차지한 이 전투는, 훗날 美 육군사관학교의 전술교범에도 방어전과 추격전의 모범사례로 평가되었다. 대첩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저수지를 방문하고, “오랑캐를 격파했다”는 뜻의 破虜湖(파로호)라는 휘호를 남겼다. 그로부터 화천저수지는 파로호라 불리게 되었다.
화천수력발전소 남쪽 구만교를 다시 건너 북한강 北岸(북안)을 끼고 461번 지방도로를 4km 쯤 달려 ‘물과 감성의 고을’ 華川邑(화천읍)에 진입했다. 화천읍에서 北漢江(북한강)에 걸린 화천대교를 건너 407번 지방도로를 5km 쯤 南下해 居禮里(거례리)에 도착했다. 필자가 굳이 이곳을 찾은 것은 6·25 남침전쟁을 앞두고 春川(춘천)을 공격목표로 삼은 북한군 제2사단(사단장 李靑松 소장)이 배치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노인회관에 들렀더니 마침 7~80대 할머니 10여 분이 모여 있었다. “6·25 전쟁 때부터 거례리에서 살아온 분이 계시냐?”고 물었지만, 모두 휴전 이후 이곳에 이주해 왔다고 말했다.
필자는 407번 지방도로를 타고 다시 1km쯤 남하해 현재 화천군과 춘천시의 경계인 38선상의 화천군 사북면 양통리를 둘러보았다. 길가에 6·25 전쟁 전 남북한의 경계선인 ‘38도선’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38도선 앞에 서면 춘천 전투(1950.6·25.∼6.28)에서 국군 제7연대(연대장 林富澤 중령)와 116포병대대(대대장 김성 소령)의 선전으로, 병력의 절반을 잃고 敵 제2사단장직에서 해임된 李靑松(이청송)이 생각난다.
小土古味里의 칠성사단 앞에서 만난 심일 소위의 半身像
양통리로부터 407번 지방도로와 5번 국도를 타고 12km 쯤 북상하면, 上西面 小土古味里(상서면 소토고미리). 이곳 7사단(칠성부대) 정문 앞에서 14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황영중 소령을 기다렸다. 약속 시간보다 20여 분 먼저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6·25전쟁 발발 수 시간 후에 敵 자주포를 화염병과 수류탄으로 파괴한 故 沈鎰(심일) 소위의 半身像(반신상)을 발견하고 깊은 감회에 젖었다.
심일 소령 반신상 앞에서의 필자 |
192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심일 소위는 서울大 사범대학 2학년을 중퇴하고, 1949년 육사 8기로 졸업, 육군소위가 되었다.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57mm 對전차포중대 제2소대장으로 춘천전투의 제1선에서 싸웠다.
북한군은 소양강 남안으로 포격을 집중시킨 후, 이번에는 SU-자주포 10대를 앞세워 북한강변의 玉山浦(옥산포)로 남하했다. 심일 소위는 북한군 자주포가 57mm 對전차포에 명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괴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주포에 대한 측면 육탄공격만이 이를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심일 소위는 특공組(조) 5명과 함께 화염병과 수류탄을 갖고 자주포가 다가오는 옥산포 길목에 매복했다. 자주포는 커브길을 돌고 소나무숲을 지나 특공조의 전방 30m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심일 소위가 사격명령을 내리자, 은폐하고 있던 아군의 對전차포 2문이 일시에 불을 뿜었다. 철갑탄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면서 敵 자주포의 바퀴인 무한궤도에 명중했다.
그 순간, 심일 소위는 온몸을 날려 자주포 자체 위로 뛰어 올랐다. 이어 적 자주포의 승무원이 전방의 상황을 살피려 헤치를 열고 머리를 내미는 찰나, 손에 들고 있던 수류탄과 화염병을 동시에 자주포 속으로 집어넣고 뛰어내렸다. 2∼3초 후 수류탄의 파열음과 함께 자주포는 화염에 휩싸였다.
선두의 자주포 2대가 파괴되자, 戰意를 상실한 듯 나머지 자주포 8대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주했다. 당시, 대부분의 국군 장병들은 자주포와 탱크가 처음 보는 것이라 서로 구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떻든 심일 특공조의 활약 이후 제6사단 장병들은 북한군의 탱크나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게 되었다.
심일 소위는 그 후 초기 지연작전인 음성지구의 동락리 전투와 무극리 전투, 영천 304고지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웠으나, 1951년 1월26일 영월 북방 마차리 일대에서 수색작전 중 적의 총격으로 전사했다(대위). 1951년 7월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심일 소위의 동생들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 경찰 간부로 근무하던 바로 밑 동생 심민은 순직했고, 둘째 동생은 서울고 재학 중 학도병으로 낙동강 방어 작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서울고는 6·25 전쟁 때 전교생의 40%가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명문이다. 이 숫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명문고 이튼스쿨과 일본의 귀족학교 學習院(학습원) 학생의 참전률 20%에 비해 크게 높다.
황영중 소령은 약속시각인 14시에 맞춰 제7사단 정문 앞으로 나왔다. 黃 소령은 금성전투 당시의 제2군단 비행장과 제2군단 창설기념비 등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현재 제7사단사령부는, 1952년 4월 제2군단이 재건되었던 곳에 자리잡고 있다. 1953년 7월 휴전 1주일 전에 최후의 공세를 감행한 중공군은 소토고미리 북방 8km까지 남하했지만, 격퇴당했다.
소토고미리에서 多木里(다목리)를 거쳐 화천군과 철원군의 경계인 水皮嶺(수피령·862m)을 넘어 초저녁에 金化邑(김화읍)으로 들어갔지만, 初行(초행)인 탓으로 숙소를 발견하지 못해 43번 국도를 15km쯤 남하해 ‘新철원’이라 불리는 葛末邑(갈말읍)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宿食(숙식)을 해결하면서 김화-철원 지구를 답사하기로 작정했다. 갈말읍은 이미 여러 번의 답사로 필자에게는 익숙한 곳이다.
다음날 아침 철원군 갈말읍 태봉로 4거리의 숙소에서 18km 쯤 북진해 43번 국도가 끝나는 용암3거리 초소에서 제15사단의 유승현 중사를 만나 4km 북동쪽의 승리전망대에 올라 휴전선 너머로 북한의 금성군을 살폈다. 승리전망대는 155마일 전선의 正중앙에 위치해 있다. 승리전망대에서 내려와 철원군 근남면 말고개(馬峴) 기슭에 있는 ‘金城(금성)지구전투전적비’를 둘러보았다.
필자의 다음 답사 목표지는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의 DMZ 안에 있는 백마고지와 弓裔(궁예)의 都城址(도성지)였다. 鐵原(철원)을 도읍으로 삼은 泰封國王(태봉국왕) 궁예는 서기 918년 쿠데타에 의해 왕위를 그의 부하 王建(왕건)에게 빼앗겼다.
제6사단의 관계관은 “유엔군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등의 답변으로 필자의 DMZ 내 답사 요청에 난색을 보였다. 3년 전, 필자는 철원군청에서 주관하는 ‘철의삼각지 안보투어’에 참가해 남방한계선 上의 철원평화전망대 위에 올라가 궁예도성지를 관망하고, ‘백마고지전투전적비’가 세워져 있는 무명고지,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을 이미 답사했다.
1975년 3월19일에 발견된 제2땅굴은 차량·야포 등과 함께 1시간 당 3만 명의 무장병을 보내는 것이 가능할뿐 아니라 탱크까지도 통과시킬 정도로 거대한 땅굴이다. 공산지배를 받던 1946년, 철원 일대 주민들의 강제노동과 모금에 의해 건립된 노동당사는 러시아式 공법의 無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철원의 노동당사 내에는 고문기구, 그리고, 그 주위에서 고문 흔적이 역력한 人骨(인골)이 다수 발견되었다.
갈말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12km 남하해 포천군 영북면 夜味里(야미리)를 둘러보았다. 야미리는 포천 → 의정부 → 미아리고개를 거쳐 서울에 1번으로 入城(입성)한 북한군 제3사단이 6·25남침전쟁 직전까지 포진했던 곳이다.
야미리에서 5km 쯤 남하한 광평 ‘38선휴게소’에서 37번 국도로 길을 바꿔 全谷(연천군)까지 100여리를 西進하고 전곡에서 372번 지방도로를 西北進해 38도선 북방 12km인 玉溪里(옥계리)에 이르렀다. 옥계리는 6·25 발발 직전, 북한군 제4사단이 前進(전진) 배치되었던 곳이다.
북한군의 主力이었던 제3사단·제4사단은 서울 함락 직후에 ‘서울 근위사단’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그때 북한군 제4사단은 연천 → 동두천 → 의정부를 거쳐 당시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선인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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