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間島)는 옛날 왕검(王儉) 단군(檀君)이 고조선을 건국하면서부터 백두산(白頭山)과 송화강(松花江) 및 흑룡강(黑龍江)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다.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는 모두 만주 일대를 지배한 대국이었으며 특히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라 하여 영산으로 여겨왔다.
고려(高麗) 때에도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등 만주 서남부 일대는 우리 민족의 영토였으며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한 윤관(尹瓘)이 1108년 여진족(女眞族)을 몰아내고 설치한 동북 9성 가운데 공험진(公險陳)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간도 땅은 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우리 민족의 영토로 확실한 역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시대 초기까지 간도는 주변국 사이에 놓여있는 완충지대 정도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간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1616년 만주에 청나라가 건국된 후 나라의 기틀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인의 유입이 빈번하고 이로 인해 양국간에 군사적·외교적 마찰이 일어나면서 부터이다. 당시 간도 지역은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고, 주민들도 국경을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생활의 편의에 따라 유동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청나라는 1627년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지역에 일종의 완충지역인 공광지대(空曠地帶)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1689년 청(淸)과 러시아 간에 조약이 체결되어 흑룡강 상류지역이 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이 되었다. 청이 완충지역으로 설정해 두었던 간도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러시아가 흑룡강 연안으로 남하하면서 이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후 1709년부터 청은 백두산 일대의 산세와 지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710년 조선인 이만건(李萬建) 외 8명이 국경을 넘어 청나라 사람 5명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관계는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청(淸) 제국 제4대 황제 성조(聖祖)는 목극등(穆克登) 일행에게 명을 내려 1712년 서쪽으로는 압록강과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한다는 정계비(定界碑)를 백두산 분수령에 세우게 된다. 결국 이 때 서간도 1만9천여㎢의 영토가 청나라 땅인 양 되어버렸고, 토문강(土們江)을 경계로 한 동쪽의 북간도 지역만이 조선의 땅으로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정계비에 언급된 지명에 대한 해석마저도 엇갈려 양국 영토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淸)은 옛 종주국 행세와 오만한 태도로 토문강(土們江)이 두만강(豆滿江)이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조선측 토문강감계사(土們江勘界使) 이중하(李重夏)는 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우리 국토는 한 치도 줄일 수 없다고 강하게 항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청나라는 토문강(土門江)-도문강(圖們江)-두만강(豆滿江)은 같은 발음임을 예시하며 동일한 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토문강은 중국의 여러 지도에도 송화강의 상류로 표시되어 있는 점을 증거로 제시하며 두만강과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강이라고 맞섰다.
[중국 전요지(全遼志)에는 토문강의 이름을 토문하(土門河)로 적고 있으며 송화강의 원류라고 밝혀 놓았고, 정약용의 조선강역지(朝鮮疆域誌)에도 토문강은 송화강의 상류로 표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규장각(奎章閣)에서 찾아낸 백두산 정계비도(定界碑圖)에도 토문강원이 송화강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이후 조선과 청은 간도 지역의 영유권에 대한 몇 차례 회담을 가졌지만 끝내 간도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말았다. 분쟁은 러·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만주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수단으로 1909년 간도협약을 맺고 우리 땅 간도를 중국에 넘겨버리고 만다. 중국이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합법적인 한국 영토인 간도를 영원히 자국 속령에 두기 위한 속셈에 있다.
현재 간도 지역을 포함한 동북삼성(東北三省)에는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이들 조선족에게 그들의 정체성이 남한 및 북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있다는 내용의 세뇌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동북삼성(東北三省)에 대한 자국의 통제력을 지속시키고 간도를 계속 자국 속령으로 두기 위해서는 남,북한 민족통일을 분쇄하고 북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훗날 북한 내에 친중 쿠데타를 유도하여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킨 후에 북한 전역을 접수하고 중국의 북한 강점에 대한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한국 외교통상부는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중국의 고구려사(高句麗史), 발해사(渤海史) 왜곡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사실상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묵인하고 있는 입장이며, 중국 외교부 간부와 구두합의를 통해 한국 측에서 중국에 더이상 간도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의식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영토 문제는 대개 100년이 지나면 시효가 만료되는 것이 국제법의 통례라고 한다. 따라서 간도영유권 문제는 향후 6년 후인 2009년에 100년을 맞기 전에 우리도 공식적인 입장을 국제사회에 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외교부는 중국에 대해 사대주의 형식의 굴욕 외교를 펼치면서 일제 치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본거지였고 지금은 조선족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광활한 영토 간도(間島)를 되찾는데 전혀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간도는 가까운 장래에 동북아시아의 중심기지로 부각될 기회의 땅이자 희망의 땅이다. 우리 민족은 '간도의 꿈'을 다시 키워야 한다. 간도를 정당한 권리 없이 점유하고 있는 중국에 대하여 그동안 간도영유권을 주장할 기회가 없었더라도 이제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주장을 펼쳐야 할 시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간도 문제에 대한 중국 측의 입장을 살펴보자. 첫째, 중국은 간도 문제를 날조론·허구론으로 설명한다.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과 간도의 지리적 위치, 조선인 거주시기, 간도 문제 발생 요인 등 소위 간도 문제 전반이 날조라는 것이다.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이 원래 중국 고유의 명칭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서 의도를 가지고 만든 명칭이라고 하여 연길(延吉)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간도 문제를 조선인이 위조하여 외교적으로 사기 친 것이라고 본다. 1712년 목극등(穆克登)이 세운 정계비(定界碑)가 소백산에 있었는데 개간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조선인들이 정계비를 옮겨 중국에게 영토를 요구한 국제 외교 사기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712년 백두산 정계비 설치, 1885년 을유감계담판, 1887년 정해감계담판, 1909년 간도협약 등의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허구적인 날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중국의 간도 날조론, 허위론에 대해 한국의 간도(墾島, 艮土, 閑土, 間島) 이해는 주로 역사적인 의미 부여에 치중하여 언어학적, 민족적, 지리적, 역사적인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서 중국의 위압적인 자세와 우리의 퇴영하는 자세가 어느새 압록강 지역을 관습상의 국경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주은래(周恩來) 중국 전 총리는 만주족(滿州族)이 빠르게 흥기하여 백두산 이동에서 요하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면서 조선인을 동쪽으로 밀어넣어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이동으로 밀리게 하였다고 설명했다.
조선인의 간도 거주 시기에 대해 중국 자체의 연구에도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고대 시기까지 소급하는 경우와 '원말(元末)명초(明初) 이주설', '명말(明末)청초(淸初) 이주설' 등이 있지만, 최근 중국은 정책적으로 조선인의 이주를 19세기 중엽 이후로 규정한다. 그러나 '재간도일본총영사관문서(在間島日本總領事館文書)'에 의하면, 조선인은 동북지역인 고토(古土)에서 살면서 만주족(滿州族)처럼 쉽게 한족(漢族)에 동화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한족보다도 먼저 동북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둘째, 중국은 관대정책론 혹은 방임정책론으로 간도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간도가 원래 중국의 영토인데 조선인이 불법 이주한 것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간도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한·중 양국의 국경은 기본적으로 청천강(淸川江)과 대동강(大同江) 사이를 오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압록강이 중국과 고려의 국경이 된 것은 금(金) 태조로부터 시작되고, 명대에는 두만강 일대에 행정기구를 두고 관할을 통치하였으므로, 16세기에 이미 중국과 조선 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기본적으로 국경이 형성 확정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간도 문제 발생에 좋은 빌미가 된 것은 한·중 변경의 상당부분을 공지(空地)의 비군사 지역으로 삼았고 조선의 요구에 관대했던 자소(字小·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사랑해주는 것)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조선인은 중국인과 달리 황무지 개간세 및 기타 잡세도 납부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국이 관대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경선이 명확하게 설정되기 이전에 양국사이의 완충지대는 복수주권(multiple sovereignty) 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무조건 자국령으로 삼고 조선인에게 관대정책을 베풀었다고 하지만, 조선인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힘의 억압이지 관대정책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영유권 결정에 있어서 선점과 행정권 행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중국 자료인 광서조동화록(光緖朝東華錄)에서도, 중국인이 한번도 개간을 하지 않은 곳에 조선인이 이미 대단히 많은 면적을 개간하였고 함경도 자사(刺史)가 지권을 발급하고 등록하여 그 지역을 조선령으로 간주한 것을 발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간도 문제 연구자인 나이또[內藤虎次郞]는 한국동북강계고략(韓國東北疆界攷略, 1906년)에서 조선인이 간도지역을 중국인보다 먼저 개척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碑文).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의 글귀가 보인다.]
셋째,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의 유무효론이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설정한 것에 대해 중국은 정계비 유효론과 무효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이 양국의 변경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조선인의 말을 듣고 백두산 절반이 조선에 속하는 정계비를 세워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청나라 성조(聖祖) 황제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계비는 변경을 조사한 심시비(審視碑)에 불과하다고 한다. 양국의 대표가 참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조약이라 볼 수 없으며, 정계의 함의도 없기 때문에 단순히 기념물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정계비로 보려는 이유는 정계비문상의 토문(土門)이 어디인가의 논란을 제외한다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이 확인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백두산 정계비를 심시비(審視碑)라고 보는 이유는 정계비문의 '동쪽으로 토문'이라는 내용에서 토문이 어디인가의 논란을 처음부터 차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간에 공식적인 담판기록이 없고, 비석에 대청(大淸)이라는 청나라 국명만 있고 조선이라는 국명이 없는 점 등도 양국의 국경비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 스스로가 상반된 견해를 주장하는 이유는 정계비문의 '서(西)로는 압록, 동(東)으로는 토문'의 해석여하에 따라 양국의 영토범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중국은 1887년의 국경담판이 최종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였지만, 조선 대표 이중하(李重夏)가 토문강(土門江)과 두만강(豆滿江)의 동일성을 인정했다고 하면서 양국이 합의에 이른 것처럼 설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담판 시 청조(淸朝)의 강압이 있었다고 보고, 1888년 5월 16일에 교섭 통상사무 독판 조병식(趙秉式)이 위엔스카이[袁世凱]에게 새롭게 국경담판을 열어야 한다고 통고하기도 하였다.
한·중 국경담판의 내용에 대해 양국이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국경담판이 최종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는 양국이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한·중 양국 사이의 이견 없는 공개적인 국경담판은 역사적인 미해결 과제로 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넷째는 국제법적 해결론이다. 중국은 간도 문제에 대해 현상유지를 고집하겠지만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통해 국제법적인 검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연구 중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논리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근현대 변경분쟁을 해결할 법리원칙을 5가지로 제시하였다.
중국의 5가지 법리원칙(①관습선 존중 ②비밀협약 불승인 ③일방적 변경선 불인정 ④중앙 전권대사 체결 조약만 인정 ⑤미해결 문제는 양국이 협상)은 한국이 간도 문제에 적용하여 새로운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①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한·중간의 전통적인 관습선이라고 주장하지만 양국 사이에 어떠한 분쟁도 없으려면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적인 각종 요인을 고려하여 양국이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
② 조선은 간도지역에 행정기구 설치, 관리 파견, 부세 징수 등을 하였는데 중국이 그 지역을 전부 중국의 영토로 주장하며 국경선을 획정하는 것에 대해 한국(통일한국)은 동의할 수 없다. 또한
③ 일본이 불법적으로 행사한 외교권에 의해 한·중간의 국경문제를 제3자인 일본이 1909년 중국과 체결한 간도협약을 한국은 승인할 수 없다.
④ 양국 중앙정부의 전권대사가 체결한 것이 아닌 변경선 조약은 인정할 수 없다면 1712년 설정된 백두산정계비는 재논의의 여지가 있다.
⑤간도문제가 제기되는 것으로만 보아도 이는 역사적으로 미해결된 영토문제이자 변경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평화5원칙에 입각하여 양국이 평화롭게 국경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협상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여러 국가와 변경을 접하고 있어서 개별적인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국제법적 논리를 적용하고 있으므로 중국의 모순을 잘 활용하면 간도문제에 대해서도 좋은 방법을 제공받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한·중간의 영유권 분쟁인 간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적이고 학제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영유권 분쟁의 최종 결정이 '영토 취득 및 상실과 관련한 국제법의 일반 원칙'에 따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제3자 중재기관이나 국제사법기관의 시각에서 사안을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유권 분쟁의 판결을 받은 유사 판례를 비교 검토하여 간도 문제에 대비한 전략적 적용을 고민해야 하고 국제사법기관의 법리를 극복할 수 있는 법리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 중국의 영토 취득 관행을 분석하여 중국 논리를 재활용 하고 1962년 북한과 중국의 비밀 변경 조약이 한반도 통일 이후 '현상유지·정유물 유보 원칙(uti possidetis 원칙)'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검토하여야 한다.
[1909년 간도협약 당시 일본 측이 만든 지도.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豆滿江)이 아닌 별개의 송화강 지류로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조선과 청의 국경인 토문강은 두만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줄곧 주장해온 중국에 대한 중요한 반박자료가 된다.
이 지도는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土門江)’이라는 이름을 명기해 놓았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 적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의 다른 이름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두만강 북서쪽에 토문강 표기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답사도' 에 명기된 지명들.① 토문강 ②두만강 ③정계비를 세운 백두산 ④ 압록강. '토문강'을 ②로 보았던 간도협약의 체결 내용과 달리 일본 역시 ① 이 토문강임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 정부는 패전 이전에 일제가 체결한 모든 조약이 무효라는 공식 선언을 했다. 따라서 일제가 조선의 영토인 간도를 청나라에 팔아넘긴 간도는 이제 합법적인 우리 땅으로 돌아와야 한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지도로 추정되는 도성팔도지도(都城八道之圖). 함경북도편에는 간도지역이 우리 영토로 분명히 기록돼 있다. 특히 이 지도에는 토문강(土門江)과 두만강(豆滿江)을 분리, 명기해 청나라와 일본의 간도협약의 바탕이 된 `토문강은 두만강이다'라는 중국 측의 억지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다.]
▲ 이 지도에는 토문강(土門江 사진 왼쪽 두번째 붉은원)과 두만강(豆滿江 사진 오른쪽 붉은 원)을 분리, 명기해 청나라와 일본의 간도협약의 바탕이 된 `토문강은 두만강이다'라는 중국 측의 억지주장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다. 왼쪽에 백두산이 보인다.
해설; 박선영 포항공업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