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軍의 뿌리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중심으로 중경(重庆)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를 조직했다. 이 때 광복군은 불과 삼십 여 명... 그 자리가 중국 양자강의 상류를 끼고 있는 안개 속의 도시 중경이다. 당시 중국은 쟝졔스(蒋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이 중화민국을 세우고 실질적으로 중국을 대표하고 있었다.
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 광복군을 창설한다고 했을 때 당연히 그 나라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법! 윤봉길 의사의 샹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군 장성들을 폭사시킨 사건에 크게 감동받은 쟝졔스는 <대한 광복군> 설립을 허락해준다.
그것만이 아니다. 쟝졔스의 중화민국 정부는 한국광복군에게 무기도 주었고 군복도 공급하고 훈련도 시켜주고 식량을 비롯한 모든 군수 보급품 대주고 적지만 월급도 주었다.
쟝졔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의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1941년 11월 광복군에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을 요구하였다.
이는 중화민국 측이 광복군 창설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한다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제약이 있었다.
① 광복군은 중국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단지 명의상으로만 통수권을 가진다.
② 광복군은 한국이나 한국변경에 근접한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반드시 중국군과 연합해서 행동하여야 하며, 이를 위하여 광복군의 중국내 군사훈련은 해당지역의 중국군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③ 중일전쟁 종결 이전에는 설혹 광복군이 한국내로 진격하여 들어가도 별도의 협정이 체결되기까지는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한다.
④ 중일전쟁이 끝난 뒤 광복군이 한국 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 안에 있을 경우 광복군의 운영문제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정책에 의해 처리한다. 즉 광복군은 중화민국 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만 했다. 한국광복군이 창설된지 1년 여 기간이 지나고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미국과 일본 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즉각 반응하여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이는 매우 잘 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 말로만 하는 선전포고가 전부였다! 광복군 창설 이후 일본 패망까지 5년 동안 광복군과 일본군과의 전투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전무했다! 1942년 5월 평소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김구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김원봉이 주도하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한국 광복군 편입이 결정되었다.
쟝졔스의 중화민국은 '조선의용대'에게도 무기 군복 등 모든 면에서 지원해주었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고, 광복군 편제하 기존의 4개 지대는 통합하여 제2지대로 편성되었다.
이 때 조선의용대 대원들 중 김원봉을 따라서 광복군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김원봉을 따르지 않고 마오져뚱의 군대 펑더화이가 지휘하던 팔로군을 따라서 '태항산'으로 가버린 병력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기를 주고 군복을 주었던 쟝졔스를 그렇게 배신하고 마오의 군대로 들어갔다. 사상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렇게 가버린 사람들까지 광복군 명단에 다 포함시키자 사실상 광복군 대열에 한 번도 서있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포함해....
이 때 광복군 역사상 숫자가 가장 많았는데 그래봤자 삼 백 수 십 명! 당시 일본군 점령지역인 화북지방에는 한인들이 약 20만 명에 달하였지만 광복군의 병력 초모활동의 결과 모여든 모든 병력이 단 한 번도 400명을 넘지 못했다.
그렇게 모인 광복군은 무엇을 했나? 주로 활동한 분야가 병력 모집이었고 대일선전포고와 민간인들에게 항일전에 나서라는 선전, 담벼락에 항일 선전문구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1940년 9월 17일 창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적이 없었다. 미군이 진주만 기습공격을 당한 이후로 태평양 전쟁이 벌어져 여러 섬에서 미군이 수 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싸울 때 광복군은 일본군에게 총 한 방 쏘지 않았다. 전사자 부상자 단 한 명 도 없었다.
이 부끄러운 독립운동 역사! 이 부끄러운 독립운사를 가리기 위해 국사책에서 얼마나 시시콜콜 조그마한 사건들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지... 정작 가장 큰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말이다. 광복군의 깃발을 내걸고 일본군과 단 한차례의 전투도 없었음!
당시 중국 땅에 나가있던 일본 군대를 관동군이라 불렀다. 관동군이 많을 때는 125만 명!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필리핀 버마 말레이 등 남방전선으로 많은 병력을 빼냈어도 여전히 중국 땅에 관동군 70만 명 이상!
거기에다가 일본은 만주국 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세웠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꼭둑각시로 앉혔는데 그 만주 국군이 약 40만! 관동군과 만주국군, 도합 110만을 훨씬 넘는다!
무기체계를 보아도 많은 숫자의 항공기, 탱크, 대포, 기관총, 소총... 차량들과 통신시설... 뱐자이 돌격하던 잘 훈련된 보병들... 일본 관동군은 쟝졔스의 군대를 압도했다. 쟝졔스 피해 도망다니던 마오져뚱 군대 정도는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일제의 압제에서 독립시킨 군대는? 불과 삼 백여 명의 광복군이 아니다!
단 한 차례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적이 없는 형식적인 편제상의 군대 광복군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미군! 맥아더! 미군이 이 나라를 해방시켰다. 한국 국사 교과서는 이 중요한 부분을 더럽게 부정직하게 얼렁뚱땅 덮어버렸다.
우리 대학 다닐 때 좌파 주사파들은 당시 우리나라에 진주했던 미군을 '점령군'이라 부르며 적대시 한다.
한 편으로 다른 질문을 해보자. 일본군의 학살과 압제로부터 중국을 해방시킨 군대는? 장졔스의 국민당 군대? 마어져뚱의 공산당 군대? No! .... Never! 그렇다면 ... 누구?
역시 미군! 맥아더! 미군이 아니었으면 결코 일본 관동군 몰아낼 수 없었다.
1942년부터 1945년 해방 될 때까지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제 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았다. 일본군에게 아무런 위협도 아니되었던 광복군의 부사령, 군무부장...
2019년 6월 6일, 현충일에 대한민국 대통령인 문재인은 이런 김원봉이가 국군의 뿌리라며 독립훈장을 주고싶다고 했다.
1919년 3.1 운동이 터졌고 그 이듬해 1920년 만주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 그 청산리 전투의 주역 이범석 장군이 이 광복군 참모장이며 제2 지대장을 맡았는데... 이범석도 아니고, 북로군정서의 김좌진도 아니고,
맑스 레닌주의 공산주의자, 중국 내륙에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웠던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란다. 6.25 일으켰을 때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은 북한의 3대 실세였다.
그들은 모두 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범죄자들이다. 그 전범 중의 하나 김원봉이가 국군의 뿌리란다. 후에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죽은 김원봉이가 .국군의 뿌리란다
광복군 제3지대가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0b1320b
요약
북간도에 거주하던 민족주의자들은 1919년 대한군정회를 조직해 3개 대대에 약 1,100여 명의 병력을 갖추었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이미 독립군부대를 편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구별해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간부들은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총사령관 김좌진 등이다.
1920년 김좌진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전투 등 5차례의 전투를 단독으로 수행했으며, 어랑촌 전투 등 2차례의 전투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와 공동으로 수행했다. 1921년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일본군을 피해 모인 여러 독립군단체들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으나 1921년 자유시사변으로 해체되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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