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이 물밑에서 논의되던 시기
일본은 한 명의 특사를
박정희에게 보낸다.
고토 마사유키...
일본 육사의 박정희
선배이며 일본정계와
재계를 연결하던
최고의 우익 로비스트이자
다혈질적인 기질로
스스로를 쇼와 시대
최고의 사무라이라고
자칭하던 자이다.
거한의 체구와 특유의 거친 말투
그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어떤 상대도 협박하여
설득시키고야 마는 사람이였다.
고토의 임무는 단 한가지였다.
731부대에서 기인하는 미도리 제약회사의 신기술을
이전하는 댓가로 독도를 뺏아오는 것.
이 고토를 보냄으로써 독도문제는 해결됐다고
보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정계에 팽배해졌다.
고토는 술을 먹으면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였다.
죠센진토 이우 모노와 곤죠가 타리나이
조선 놈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근성이 없어.
이런 고토가 드디어 박정희와 독대하게 되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고토였다.
"장군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별로 없소..
아마 조용한 생도였는 모양이군요."
"당신이 나에 대한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오늘 내가 여기에서 당신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본론을 이야기 하시요."
"역시 듣던 대로시군요.
아뭏튼 장군.
바보같은 놈들이 다케시마 같은 하잖은 문제로
우리의 발목을 붙잡을려고 하오.
조국을 부흥시킬려면 무엇보다
의약관계의 최신기술이 필요할 것이요.
내일 당장 신문을 이용해 선전하시요,
일본의 최신 기술을 이전 받기로 했고
공장도 지을 거라고 말이요.
그러면 민심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요.
그리고 다케시마 같은 것은 바보 같은 놈들에게
고기나 잡으라고 주어버립시다."
"이봐 당신,
나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이요.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요.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내 조국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요.
그것이 독도이던 돌 한덩이던 내 조국의 것이라면
나는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요.
군인인 내가 조국에 할 수 있는 것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소."
순간 박정희의 기세에
이 거한의 고토는 기가 질리고 만다.
수많은 야쿠자들. 수많은 정치깡패들을
상대하면서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움을
고토는 이 작고 깡마른 체구의
사나이에게서 받은 것이다.
"장군 흥분하지 마시요.
장군의 조국에 대한 충정은 나도 이해를 하오.
하지만 작은 것을 보느라고 큰 것을 보지 못한 다면
그것도 장군답지 못한 것 아니요. 대의를 보시요.
자칫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소."
"이봐
당신 아까부터 자꾸 나에게 훈계할려고 하는데
그 태도를 나는 용서하지 못하겠소.
당신도 사나이라면 나와 술 한잔하며
사나이답게 이야기를 합시다.
서로 술이 취해 싸움이 된다면
덜 맞은 자의 말을 따르기로 하면 될 것 아니겠소
어차피 당신은 나와 싸우기 위해서 온 사람 아니요."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고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와 부하들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아시오.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덕분에 우리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요.
사나이로서 이 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소.
선생. 돌아가서 전하시오.
다들 목숨을 걸고 조국을 부흥시켜
일본 못지않는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볼려고 하는데
계집애같이 앵앵거리지 말자고 말이요."
이 말을 들은 고토는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면전에서 자신에게
계집애처럼 앵앵거리지 마라고 말하는
박정희의 눈빛에서 사나이의 진짜 미학을 찾았다는
유쾌함과 비장함이었다고 한다.
동경으로 돌아온 고토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이, 장군은 조국을 위해서 죽기로 했다고 말했소.
당신들 면상을 보아하니 어느 누구도 죽을 각오를 하고
다케시마를 찾을 수는 없겠어.
돌아가서 마누라 엉덩이나 두드리든지 아님
긴자의 네상들이나 안고 한잔하자고...해산..해산..."
박정희가 암살되던 날.
아카사카의 한국 술집에서 술을 먹고 있던 고토는
술에 취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고 한다.
빠가야로...조센진토 이우 야쓰라와 쇼가나인다나..
지분의 오야붕을 고로시테 도우 스룬다요..
오야지토 잇쇼쟈나이가요...아...
다노시미가 낫구낫데 시맛다요..
메오사멧다 조센토라가 고노 고미타라케노
사루도모오 미코토니 깃데 후쿠슈스루...
고레가 밋다갓다요..빠가야로..
사이고노 사무라이가 신다요..신지맛다요...
병신들...조선 놈이라고 하는 것들은 어쩔 수가 없구나..
자신들의 두목을 죽여버리면 어쩌냔 말이야..
아버지와 같은 것이잖아...아...
즐거움이 없어지고 말았구나..
눈을 뜬 조선 호랑이가 이런 쓰레기 같은 원숭이들을
훌륭하게 단 칼에 베어 복수하는...
이것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병신들...
놀라운 수출과 경제발전으로 일본과 경쟁하였으며
핵으로 힘을 가질려고 했던 박정희의 꿈은
마지막 사무라이가 죽고 말았다는
고토의 울부짖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사랑하던 손녀를 교통사고로 잃은 충격으로
자살한 고토가 마지막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박정희가 써준 우국충정이라는
친필휘호가 든 수석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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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약으로 간도지방은 분실되었지만
백두산은 틀림없는 우리민족의 영토였다.
하지만 남침했다 혼이 난 김일성을 도와준 중공은
1950년 말에 이르러 참전 댓가로
백두산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57년 주은래는 참전 댓가로
백두산 영토 250킬로미터를 중국에 지불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58년 천문봉에 기상대를 설치하고
60년에는 백두산 전역을 장백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한다.
이것에 북한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주은래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독대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의 국경수비대원들과 일부 조선 주민들의
불법 월경으로 긴장상태가 조성되어 양국 간에
시비가 벌어진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니
조치를 취해 주시요."
이 말에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동무들이 원한다면
우리는 평양도 나누어 가질 수 있소.
양국 간에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혁명적 동지애뿐이며
남조선에서 미제가 물러나는 날
우리는 진정 하나가 될 수도 있소."
그리고 68년 12월부터 69년 3월까지 중국 측은
전 백두산 지역에서 북한의 국경수비대와 일반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결국 김일성은 북위 42도선을 경계로 백두산을
중국에 할양할 것을 승인하고
"조중우호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것이 심지어 조선의 영토이든 바다이든
피로 나눈 혁명적 동지애로 맺어진 조중우의보다
위에 설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로써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양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