過去資料函

50년 맞은 5·16 <上>… JP, 그날을 말하다

bsk5865 2011. 5. 23. 08:47

보낸사람 : 演好마을 운영자 11.05.22 23:45

 

50년 맞은 5·16 / JP, 그날을 말하다 / 감사의 차원에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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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맞은 5·16 <上>… JP, 그날을 말하다]

                     박정희 소장이 그랬어… "서울은 네가 맡아라, 외곽은 내가 손써놨다"

 혁명 교감 - 2월에 군복 벗으니 슬프데… 대구 박 소장 만나서 말했지
"서울에서 조직 상당히 했다" 며칠 후 박 소장이 올라와
미국도 움직였다 - 지도자로 박병권 거론됐는데
CIA 쪽에서 먼저 손 잡아… 장도영 장군과도 접촉했더군
거사 전날밤 - 인쇄소에서 혁명공약 찍는데 경찰관 2명이 올라와요
'제발 가라, 쏠 수밖에 없다' 빌었더니 다행히 그냥 가데
혁명계획서 - 경제기획위·중앙정보부 등 목숨 걸고 만든 밑그림
장도영 장군한테 보여줬는데 끝끝내 안 돌려줘

 

지난 8일 오후 서울 신당동(옛 청구동) 자택. 샌드위치로 점심을 끝낸 김종필 전 총리는 조금 쉬었다가 거실에 앉아서 손님을 맞았다. 아직도 오른팔이 조금 불편한 듯했으나 안색은 밝았고 중저음의 탁하고 굵은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검정바지에 청색 스트라이프 셔츠 그리고 연한 회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손님들에겐 커피를 내오게 했고 본인은 콜라 잔을 앞에 놓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지난 8일 인터뷰에서“의치 때문에 발음에 불명확하다”고 양해를 구하면서도 일인다역을 하듯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며 3시간 동안 1961년 5월 16일과 그 전후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때로는 격정이 밀려오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5·16' 전날 밤,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박 소장의 신당동 댁에 있었어요. 혁명공약을 마지막으로 손보다가 저녁 11시가 좀 넘어 내가 '갑시다, 사전에 들통이 나서 6관구 사령부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소, 그러나 30사단·33사단·제2해병여단 전부 예정대로 한강 인도교로 향하고 있으니 박 소장은 6관구에 가서 정리를 해주시죠, 저는 필요한 것을 전부 인쇄할 테니 내일 아침 5시에 광명인쇄소 앞에서 만나죠, 방송국에 같이 가십시다' 했죠. 박 소장의 지프를 같이 탔어요. 뒤에는 한웅진 준장과 내가 탔지요. 화신상회 옆에서 나는 내리고 박 소장과 한 준장은 영등포 쪽 6관구로 갔어요."

제발 돌아가라, 쏠 수밖에 없다

―나중에 신민당 유진산 당수의 사무실이 그 광명인쇄소 옆에 있었죠.

"직원들이 인쇄 준비를 하고 기다리더군요. 내가 그랬죠.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 공갈을 해서 마음이 내키지도 않은데 인쇄를 했다고 하시오.'직원들이 20명쯤 있었는데, 원고를 턱 내주니까 '혁명공약? 혁명취지문?' 읽더니 얼굴들이 하얘져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요."

―인쇄는 무사히 마쳤군요?

"나는 2층에서 바깥을 경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경찰관 2명이 화신상회 쪽에서 올라와요. '어? 뭔데 이 시간에 불 켜고 인쇄하나 잠깐 들어가 보자', '사고도 아닌데 뭐 들어갈 필요가 있어?' 하면서 둘이 옥신각신해요. 인쇄소 안에 이낙선 김용태 이학수(인쇄소 사장) 등이 함께 있었는데, 나하고 이낙선이 권총을 갖고 있었어요. 내가 속으로 빌었어요. '도리 없다, 당신들이 들어오면 쏠 수밖에 없다, 제발 그냥 가달라.' 그런데 정말 그냥 가더군요."

경남 진해의 저도 별장에 여름휴가를 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뒷모습)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5·16'을 3개월 앞두고 정군(整軍)운동 끝에 예편했는데 박정희 소장과는 언제 혁명에 대한 첫 교감을 가졌습니까?

"군복 벗고 집에 가니(1961.2.15) 슬프데요. 이걸로 내 군 생활이 끝나는구나. 이틀 후 대구로 박 소장(2군 부사령관)을 만나러 갔어요. 송요찬 육참총장 등 13명이 옷 벗고 있다, 나도 옷 벗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군운동만 갖고는 안 되겠다고 했더니 박 소장이 피식 웃어요.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야 하면서요. 박 소장은 이미 만군 출신 장군들을 만나고 있었던 겁니다. 여차하면 들고 일어나자는 겁니다. 내가 '서울에서는 조직을 상당히 했습니다' 했더니, '어 조직을 하고 있었어? 어디서?'하고 물어요. 30사단, 33사단, 그리고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6군단, 육군본부, 1군 사령부 내 동기생들과 상당히 깊숙이 얘기되고 있다고 하자, 아무 말 않고 조심하라고도 않고 '으음 알았어' 하더군요. 며칠 후 박 소장이 서울로 올라왔어요."

거사 한 달 전 박 소장 첫 소개

―박 소장이 '혁명 지도자'로 결정된 건 언젭니까?

"동지들이 지도자는 누구냐고 자꾸 물어요. 아직 밝힐 수 없다, 때가 되면 여러분 모인 자리에 오실 거다, 지금은 모호한 상태로 놔둬라, 했죠. 9기생 강상욱 중령의 장인이 소유한 5층 건물이 충무로에 있었는데, 옥상에 29명이 모였어요. 거기에 박 소장을 모시고 가서 궁금하던 그분이 바로 이분이다, 했죠. 그게 1961년 4월 7일입니다. 박 소장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날이에요."

―다른 지도자는요?

"처음엔 박병권 장군도 논의됐는데, 그분은 군대 내 족청(조선민족청년단) 지도자였어요. 당시 서울에 와있던 미 CIA의 크레퍼(가명) 대령이 족청과 먼저 손을 잡았어요. 또 장도영 장군과도 접촉했고요. 장 장군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으니까 태도가 애매할 수밖에 없었죠. 우습게 됐어요. 혁명에 대해 장 장군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게 계산한 흔적이 있어요."

―박병권 장군에게도 제안했습니까?

"아니요. 그분은 크레퍼하고 접촉했는데 족청도 움직임이 상당히 활발했어요."

―그들은 어떤 방향이었습니까.

"뒤집는 쪽이었지요."

쿠데타라 해도 상관없다

―장도영 장군과는 5·16 전에 어떤 관계였습니까?

"혁명을 한다고 하니까 '계획서가 있느냐'면서 박 소장에게 달라고 하더래요. 내가 만든 게 있긴 있었습니다. 그러나 '뭘 믿고 주느냐, 그러다 일망타진된다' 하고 반대했어요. 박 소장이 '장 장군과 나는 남이 모를 만큼 깊은 사이야, 날 믿고 줘' 해요. 하는 수 없이 드렸죠. 그러면서 '3일 후에 반환받아 주십시오' 했는데 결국 끝끝내 내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무슨 내용인데요?

"혁명이니 뭐니 자극적인 어휘는 안 들어가고 대신 혁명 후의 정부 조직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죠. 계획서는 경제개발을 위주로 했어요. 장면 정부와 다른 점은 경제기획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부 조직을 만들었어요. 나중에 경제기획원이 됐죠. 또 국민운동본부도 있었는데 이것은 새마을운동으로 발전됐고 그리고 중앙정보부가 있었어요. 이것들이 주요 골자요."

―5·16은 쿠데타입니까, 혁명입니까?

"학자들은 쿠데타는 같은 세력끼리 뒤엎는 것이고, 레볼루션(혁명)은 밑에 있는 세력이 위를 뒤엎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5·16을 폄하하기 위해 쿠데타라고 하는데 나는 그때도 그랬어요, 쿠데타건 레볼루션이건 우리나라를 근원적으로 변혁하고 발전시켰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거사 정보가 미리 새나간 경우는 없었나요?

"정보는 난무하고 있었어요.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가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족청이다, 박병권이다, 미국이다, 아무개다, 하도 많이 돌아다니니까 놔두었어요. 무슨 소문이 나면, 믿을 수 있는 거야 그거? 그저 돌아다니는 소리 아니야? 지들이 들고일어나면 어떡헐 텨? 뭐 그런 취급을 받았어요."

이집트 혁명이 '5·16'의 교과서였다

―군사혁명 때는 인쇄, 요인 체포, 중요기관 접수 같은 절차가 있을 텐데, 어디서 배웠습니까?

"매뉴얼은 없고, 이집트 혁명(1952년) 때 나세르가 나기브와 함께 정부를 장악하고, 나중에는 나기브를 쫓아내잖아요. 내가 그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어요. 또 케말 파샤(1923년 청년 장교들과 함께 터키 혁명을 일으킴)에 관한 것도 뽑아서 읽었죠."

―5·16의 핵심은 박정희입니까 김종필입니까?

"핵심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나는 돕는 일을 한다, 내가 군복을 벗을 때도 그런 심정으로 벗었던 것이고요."

―박정희는 떠받들어졌다, 실제로 5·16을 기획하고 집행하고 성사시킨 사람은 김종필이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중앙 일은 네가 해라, 박 대통령이 그랬어요, 서울은 네가 맡아라, 네가 주가 되라, 나머지 외곽은 내가 하마, 이미 손써놨다, 이것이 합쳐진 것이지요."

 

☞5·16

1961년 5월16일 새벽 3시, 2군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육사 출신 장교들이 장면 정권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 혼란 등을 이유로 병력을 동원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장·사병 3700여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고 혁명공약 6개 항을 발표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 근무했던 김종필 중령은 박 소장을 도와 5·16의 기획·진행·뒷마무리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박정희 사후 30년… 이제 그를 역사화(歷史化)하자
  • 김민주(alswn      2011.05.12 20:07:49

전쟁직후 폐허상태 세계최빈국, 봄이면보릿고개. 길에는거지들, 깡패득실 치안엉망, 절망적이던시절 박대통령의 5.16혁명은 구국의 결단이며, 축복이었다. 박통의 새마을운동, 경제개발5계년계획, 중화학공업육성, 산림녹화, 고속도로건설등..우리도 할수있다는 자신감..박통께서 일구신 밑거름이 오늘날 우리가 풍요를누린다. 박통은 하늘이내리신보배. 5000년역사이래최고의 성군이시다

몇일후면 5 16 그날이 다시돌아옵니다. 앞으로 그분같은분이 다시한번 오신다면....우리가 살다보면 괜히 트집잡고 딴지걸고 모호한사상으로 자기이익과 자기과시하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고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든 깍아내리고 독재정권이니 무고한사람들을 압제했다느니 등등 거품물지만...그분은 대한민국을 이정도 위상으로 기반을 만드신분입니다.곁에서많은조력을주신종필씨도건강을...

[50년 맞은 5·16 <上>… JP, 그날을 말하다] 만삭 아내 배 만지며 "오늘 실패하면 총살된 얼굴 볼 거요… 유복자 잘 키워주오"          입력 : 2011.05.12 03:01

김종필 전 총리는 지난 8일 인터뷰에서“의치 때문에 발음에 불명확하다”고 양해를 구하면서도 일인다역을 하듯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며 3시간 동안 1961년 5월 16일과 그 전후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때로는 격정이 밀려오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권총 차고 집 나서는 순간

'5·16' 바로 전날 오전 9시쯤. 김종필 중령은 부인 박영옥(박정희의 질녀)씨의 배웅을 받으며 "마지막 될지 모르는" 길을 나선다. "청파동 집에서 나오는데, 그 사람이 울지도 않아요. 하도 기가 막히는지. 집사람이 심부름을 잘했어요. 동지들 만나는데 연락 같은 것을 해주곤 했죠. 그때 집 사람이 임신 일곱달째예요. 배가 이렇게 나왔는데, 내가 그랬거든. 신의 가호가 있으면 또 만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총살된 아주 볼품없는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저녁 실패하면 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놓인다. 당신 배 속에 있는 놈이, 자고로 유복자는 사내라고 하니, 남자일 거다, 네 아버지가 허투루 죽지 않았다, 긍지를 갖도록 잘 키워라. 그리고는 배를 좀 만지다가 나왔죠. 그 사람이 잘 울지도 못해요. 멍하니 있어요. 우리 집이 숙명여대 정문 앞인데, 밑에 철길 있는 곳까지 내가 내려오니까 그때야 그 사람이 길 한복판에 서서 울고 있어요." 또 김 중령은 5·16 기본계획을 혼자 만들었다고 했다. "누구한테 보여줄 사람도 없었어요. 같이할 사람도 없었지만 조심하느라 그렇기도 했지요. 밤늦게 쓰고 나면 마누라에게 남기지 말고 태우라고 했어요."

 

박 대통령이 험한 얼굴로 노려보다가 조금 풀어지더니‘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거야

―지난날 박정희 대통령에게 마음속으로 섭섭한 것 없었습니까?

"나도 인간이니까 섭섭한 것 많지요. 예를 들어 내가 만든 정보국 요원들이 와서 우리 집 네 귀퉁이에서 24시간 감시를 해요. 내가 참다못해 박 대통령에게 가서 '각하 저를 의심하십니까. 제가 나세르고 각하가 나기브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하고 소리를 질렀죠. '제가 반역할 것으로 봅니까. 무슨 감시를 시킵니까. 섭섭합니다' 했죠. 박 대통령이 험한 얼굴로 나를 이렇게 보다가 조금 풀어지더니 '어이 뭐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거예요. …허허허."

 

(※1952년 이집트혁명 때 자유장교단의 리더였던 자말 나세르는 무하마드 나기브 장군을 영입하고, 1953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후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기브가 물러나고 1956년 나세르가 대통령이 됐다. 김 전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그걸 오해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네요. 둘러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요, 그분은 솔직하잖아요."

―5·16 때부터 박 대통령이 김 전 총리를 어떻게 불렀습니까.

"지금까지 라디오나 TV를 보면 '종필아―' 그랬다는데, 이름 그대로 부르는 일은 절대 없었어요. 당의장, 의장 같은 직책이나 '임자' 이렇게 불렀지."

―우리 전통에도 조카사위한테 말 놓는 법은 없었지요.

"그래요. 그런데 방송에서 '어이 종필이' 한단 말이야. 에이 고약한…."

―예의를 갖췄군요.

"개인적으로도 여러 가지가 있거든요. 그렇게 함부로 못했어요."

[50년 맞은 5·16 <中>… 젊은 장교들의 整軍운동, 그리고 JP] 중정 요원 20명 이끌고 장도영 계엄사령관 잡으러 갔지 그가 말하더군 "왜 이제 왔어?"

입력 : 2011.05.13 03:00 3·15

선거 부정 - 방첩대가 주로 한 짓인데 투표용지 통째로 바꾸고는 110% 달성했다고 자랑
整軍운동 - 송요찬 총장에게 말했어 "그만두고 나가십시오" 그 다음날 사표 내더군…
헌병대에서 700명 동원해 박정희 뒤 캐겠다고 하기에 결국 나도 옷 벗었어
5월 16일 새벽 - 의정부서 대포 끌고 오는데 미군 헌병들이 있는 거야 무술병사로 제압하라고 했지 그런데 손 흔들며 보내주더군

12일 오후 김종필 전 총리를 다시 만났다. 다음 달에 돌이라는 외증손자를 안고 있었다. 첫 인터뷰가 게재된 후 안부 전화를 수십 통 받았다면서 즐거워했다. 김 전 총리는 이전 인터뷰를 보완하고 새 내용을 추가했다.

◆계급장 뗀 군복

―5·16 당일 군복 입고 다녔습니까?

"권총 차고 반(半)군복 입었지."

―반군복이 뭡니까.

"계급장 뗀 군복이니까 반군복이오."

―권총은요?

"콜트 45구경. 물통처럼 시꺼먼 권총 있어요."

―젊은 장교들의 정군(整軍)운동이 5·16으로 귀결된 셈인데, 명분이 뭐였습니까?

"3·15 부정선거로 국가가 흔들렸어요. 4·19가 일어나고 학생들이 생명을 내걸었잖아요. 군인들도 적잖이 책임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내보내야 한다 해서 정군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그 당시 장군들을 '똥별'이라고 불렀다면서요.

"정군 대상으로 추려진 장군들은 전쟁 중에도 공병들의 불도저·GMC(트럭)를 빼돌렸고, 전방 진지에서 소나무 베어 후방 제재소에 팔아먹고, 병사들 휴가 보내면서 또 빼먹고 그랬어요. 우리가 다 알거든요. 별을 달고 도대체 독도법(지도 읽는 법)을 몰라요. 5만분의 1 지도에서 간격이 몇 개면 거리가 얼마다 하는 것을 몰라요. 이런 사람들 전부 옷 벗고 나가라, 하는 것이 정군이에요. 그게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죠."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정군운동을 하면 군 수사기관이 가만있었습니까?

"처음엔 CIC(방첩대)에 잡혀 갔어요. 이소동 방첩대장이 '그만큼 했으면 됐다. 그만하라'고 해요. 난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겠다'고 했어요. 그땐 분위기가 그랬어요. 내가 '나를 가둘 게 아니라 참모총장을 만나게 해달라' 했어요. 며칠 후 껌껌한 저녁에 송요찬 참모총장이 오라고 해요."

―묶여서 갔습니까?

"아니요. 당당하게 군복 입고 갔지요. 연병장에는 동기생들이 모여들고 있었고요. 송 장군이 '도대체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물어요. '다 아실 텐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만두고 나가십시오' 했지."

―중령이 중장에게 참….

"안색이 영 달라지데요. 한참 있더니, '나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어. 그러나 갑자기 그만두라면 되나. 여유를 좀 줘야지. 나도 생각이 있어' 하는 거예요. 내가 '하루 이틀 자꾸 시간 끌면 결심이 흐려져 안 됩니다. 오늘 결심하시죠' 했어요. '2·3일 여유를 줄 수 없나. 내 자네들 요구를 들어줄게' 하더군요. 안 된다고 했어요. 결국 그 다음 날 사표 냈어요."

12일 오후 서울 자택에서 다시 만난 김종필 전 총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5·16얘기를 나누던 끝에 수백 가지가 넘는다는 이탈리아 피자에 대한 얘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내가 옷을 벗은 진짜 이유

―왜 유독 송 장군이었나요?

"이유가 있었어요. 3·15 선거 때에도 송 장군이 참모총장이었는데, 선거가 끝나고 육군본부에 들어서서 당당하게 큰소리로 '나는 110% 달성했어' 하는 겁니다. 아주 완벽을 기했다는 거지. 110%가 말이 됩니까."

―3·15 부정이 어느 정도였는데요?

"방첩대가 주로 한 짓인데, 천장에 붓두껍을 매달아 놓고 찍었거든. 병사의 손이 야당 후보로 향하는지 여당으로 향하는지 알 수 있단 말이야. 야당 쪽으로 가면 웬 놈이 붓두껍을 매단 위에서 뭐라고 하는 겁니다. 여당 쪽 찍으라는 거지요. 전원 찬성표로 미리 찍어놓고 따로 투표를 시킨 다음, 그 투표지는 몰래 다 태워버리기도 했어요."

―김종필 중령도 송 장군과 함께 전역했습니까?

"아니요. 참모총장이 먼저 나가고 나는 방첩대에서 석방됐는데, 해가 바뀌어 헌병대에서 나를 또 잡아갔어요. 정월달이라 엄청 추운데 다 떨어진 모포 2장만 줘요. 그 담요에 허연 이들이 왔다갔다했어요. 이를 악물고 헌병감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요. '나는 현역 장교다, 잘못이 있으면 군법회의에 회부해라' 그랬어요. 헌병감 조흥만 장군이 왔더군요. '별로 좋은 소식은 가져오지 못했다'면서 '수뇌부는 네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네 뒤에 네가 존경하는 누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분에게 여파가 미치지 못하게끔 네가 옷 벗고 나가라' 그래요. 나는 '못하겠다' 버텼죠. 그랬더니 'CID(범죄수사대)에서 700명을 총동원해 박정희 장군의 뒤를 캘 것이다. 그분이 다시 당할 텐데 그래도 좋으냐' 그래요. 얼마 뒤 내가 헌병감을 만나서 '박 장군에게 부당한 일이 없을 것이란 보장을 해라. 내가 그만두겠다' 했죠. 헌병감이 '나를 믿어라' 그래요. 내가 옷을 벗은 것은 1961년 2월 15일이고, 정식 예편발령은 3월 15일에 났어요."

◆혁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어

―송 장군의 다음다음 후임이 장도영 장군이군요. 5·16 혁명공약도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고요. 장 장군과 박정희 소장은 인연이 깊나요?

"나이는 박 대통령이 6살 위입니다. 그런데 장 장군이 박 대통령 보직을 봐 드렸어요. 9사단이 대구에서 창설될 때 첫 사단장이 장 장군이었는데, 그때도 박 대령을 참모장으로 데려갔어요."

―5·16 직후 장 장군 명함이 많았죠?

"그분은 혁명에 대해서 불분명한 태도였는데도 호신(護身) 차원에서 직책을 5개나 가졌어요. 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장관, 육참총장, 계엄사령관 등이에요. 자기가 하겠다니까 박 소장은 그냥 놔두었고요."

―왜 장 장군을 몰아냈습니까?

"그때 군대 내 상당수가 이북 출신이었어요. 장 장군이 자꾸 이북 출신 장군들 포섭하고, 집에서 안 자고 서울 중앙청 총리 집무실 옆 별실에 기거하면서 헌병 배치하고 그랬어요. 자기 주변에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죠. 박 소장이 신경 안 쓰는 사이에 장 장군은 최고회의 핵심들을 60%가량 손아귀에 넣고 군·행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어요. 안 되겠다, 이러다간 박 소장 결딴난다, 내 생각대로 해야겠다, 결심했죠."

―어떻게 했습니까.

"중앙청으로 갔어요. 먼저 중앙정보부 요원 20여명이 헌병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장 장군 사무실로 쳐들어갔어요. 그 앞에서 '죄송합니다. 댁에 동행해야 하겠습니다' 했죠. 그런데 장 장군이 앉아 있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왜 이제 왔어?' 그래요. 그게 1961년 7월 2일 밤 11시쯤입니다. 약식 군법회의도 형식적으로 거치고, 미국에 가기를 희망하니까 미국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박 대통령도 알았습니까.

"보고 안 하고 했습니다. 박 부의장이 놀라 가지고 '왜 그렇게 했어?'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혁명을 수행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했죠. 그 후 박 부의장이 최고회의 의장이 됐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숭고했던 순간

―피 흘리는 무력 충돌은 어떻게 피했습니까?

"일이 되려고 했던 거지요. 의정부에서 서울 가는 길목에 미 1군단 헌병들이 6명씩 보초를 서고 있어요. 의정부 방면에서 6군단 포병들이 중포(重砲)로 무장하고 새벽에 서울로 들어가는데 그들이 저지하면 큰일인 거예요. 내가 그랬죠. '무술하는 병사를 10명쯤 스리쿼터(4분의 3t 트럭)에 싣고 선두에 세워라. 미군 헌병들이 막으면 그들을 스리쿼터에 납치해서 데리고 와라. 절대 총 쏘면 안 된다.' 근데 막상 초소 앞을 지날 때는 훈련 가는 것으로 알았던지 통과 수신호를 해주어서 무사히 서울까지 들어올 수 있었어요. 무슨 일이든지 일이 되려면 그래요."

5·16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모처럼 맞은 망중한(忙中閑). 해변 휴양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상의를 벗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이 왼팔을 들어올려 뭔가를 설명하자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환한 미소로 듣고 있다.
―5·16은 일생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6·25 때도 5·16 때도 모두 생명을 내던지고 일을 했어요. 나중에 무슨 비난이 오건 말건 이건 해놓아야겠다 하는 것이 5·16이었습니다. 한일회담도 그랬어요. 요즘 서울 남산공원을 천천히 걸으면서 '요행히 그런 고비들을 넘어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나도 늙었나 봅니다. 5·16이란 6·25전쟁에서 살아남은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위해 두 번째로 죽음을 각오하고 덤볐던, 어떤 의미에서 숭고했던 순간이에요."

―'김종필 전 총리'하면 일반 국민에겐 '영원한 이인자'라는 인상이 깊습니다. 본인은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일부러 비켜간 것입니까.

"박 대통령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정말로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도와드리는 사람이 있어야겠다 생각했어요. 나는 그런 자세로 시종일관 도와드렸어요. 그 이상 다른 거 하려고 안 했어."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으로 3일 연속으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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