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風景函

大邱, 桐華寺. 把溪寺 紀行

bsk5865 2011. 6. 14. 21:22

보낸사람: 엔카 컴나라 운영자 11.06.14 15:24

 

大邱, 桐華寺. 파계사 기행|◈..
학헌 | http://cafe.daum.net/yooin32/6rkh/14836 

 

몇 달만에 대구에 갔다.

미리 연락을 했더니 친구들이 나와 만났고 밥도 같이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김정의 회장이 약전골목에 있는 한식당으로 안내해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송대완 사장이 운전을 해서 바로 동화사로 갔다.

초여름 날씨에도 경내는 시원했고, 몇 해만에 찾아가니 전에 미쳐 몰랐던 사실도 몇가지 알게 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모시고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 쪽에 약사여래불이 자리하고 있다. 

대개는 가운데 부처님을 좌우로 보살들이 협시하는데 동화사에서는 현세불인 석가모니불과

다른 부처들이 나란히 있어 색다르게 느껴졌다.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極達) 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고 이름했는데 흥덕왕 7년(832)에 심지(心地) 왕사가 중창을 할 때 겨울인데도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고 있어 동화사(桐華寺)라 개칭했다고 전한다. 그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사전(祖師殿) 안에는 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조사님들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뜻밖에도 속성이 성산(星山) 이씨가 한 분 있어 놀랐다.

조사 명단에서 첫번 째로 나오는 이 분은 인악(仁嶽)대사(1746~1796)로 성산 이씨 23세손

의소(義沼)라고 기록돼 있다.

 

 

 

 

 

  이 동화사에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僧軍)의 총사령부가 위치했다고 한다.

유정[惟政, 1544~1610]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 유정()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사명당은 전쟁후 1604년(선조 37)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담판하여 강화를 맺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회담한 유일한 조선인이나, 아쉽게도 당시의 회견록은

일본에 보관돼 있지 않아 자세한 회담 내용을 알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동화사에 오면 통일약사대불 [桐華寺統一藥師大佛]을 빠뜨릴 수가 없다.

 

 

 

          1992년 노태우대통령 시절에 건립한 약사여래 대불 건립에는 우리 39동문들도

        몇사람 찬조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재섭 동문이 1억원, 당시 대구지검장을 했던     정성진 동문의 경우도 액수는 작지만 이름이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상으로 동화사를 뒤로 하고 파계사로 향한다.

  

   파계사(把溪寺)는 팔공산(八公山)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동화사(桐華寺)의 말사로

  804년(애장왕 5) 심지()대사가 창건하고, 1605년(선조 38) 계관()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스님이 삼창하였다.

 

    

                                 파계사 현판 글씨는 서예가 一中 김충현 선생의 필치다.

 

 

 

현존 당우로 2층 누각인 진동루(), 법당인 원통전(殿), 적묵당() 등이 있고,

부속암자로 현니암() ·성전암(殿) ·금당암() 등이 있는데, 성전암은 경북 3대 도량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전암에는 1955년부터 성철 스님이 10년 동안 철망을 치고 동구불출하며 수도하신 곳으로 유명하다. 문화재로 보물 제1214호 파계사 영산회상도()가 있다.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원통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파계사에는 영조()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스님은 농산()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고,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 최씨에게 현몽하였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를 받아 쓰라고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이는 지방 유림()의 행패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는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것이다.

 

 

                 250년된 아래 느티나무를 '영조임금 나무'라고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서늘한 그늘에서 한참 더위를 식히고 대구로 돌아갔어도 동문들과 저녁모임 시간에 늦지 않았다.

          엔카 컴나라
http://cafe.daum.net/yooin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