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風景函

大邱 : 壯節公 신숭겸(申崇謙)장군 유적지

bsk5865 2011. 7. 3. 08:53

보낸사람 : 소담엔카 운영자 11.07.03 06:37

 

大邱 : 壯節公 신숭겸(申崇謙)장군 유적지
石山 |  http://cafe.daum.net/enkamom/95QK/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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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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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壯節公 신숭겸(申崇謙)장군 유적지

 

                     [유적지를 찾아서]

                        < 파군재 삼거리에 우뚝 선 신숭겸장군 동상>

 

                <동상 뒤 행적판 그림:신숭겸 장군이  평산에 사냥가서  기러기에 활 시위를 당기는 모습>

 

                      <견훤군사와 파군재 전투에서 독전하는 신장군의 모습>

 

                                                                                                              대구광역시 지묘동526

                          대구지하철 아양교역에서 파계사, 동화사, 갓바위 가는 버스를 이용해서 파군재 근처에서 하차후 걸어서 10분 거리.

                     파계사행 버스 101,101-1 . 갓바위 버스 401. 동화사행 팔공1, 급행1번을 이용.

 

 

유적지 배치 안내도 

                  1:표충단   2:연화대   3: 순절지지비  4: 표충사  5: 표충재  6: 동재  7: 서재  8: 상절당  9: 매판단  10: 왕산  11: 충렬비각   12: 경의문  13: 관리사무소  14: 안내판  입구는  14(안내판)죄측임. 관람료는 무료임.

               해설을 원할경우는 문화유산해설사의 도움을 요청(10:00~18:00.동절기17:00)

 

                        

                 유적지 원경 

                      <신숭겸장군 유적지 원경>

 

                      <표충사 원경>

 

                       <표충재 원경>

 

                        <상절당 원경>

 

                      <유적지 내 신숭겸장군 동상>

 

                      <유적지 입구와 관리사무소 원경>

 

                 

                 [신숭겸 장군의 생애]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었으며 휘(諱)는 숭겸이요, 시효는 장절공이다.

               공의 선대는 전라도 곡성 사람으로 , 뒤에 평산으로 관향을 받았다.

               태어나면서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918년 6월에 장군  홍유,배현경,신숭겸, 복지겸등,4명은 은밀히 모의하여 궁예왕의 포악성에 반기를 들어 궁예를 폐위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하였다.

               

 927년(태조10년)에 견훤 군사가 신라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은후,노략질과 갖은 만행을  저질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평소 동맹관계인 신라를 돕고자 정예 5,000기병을 이끌고 공산의 동수(桐藪)에서 기다렸다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의 경애왕을 도륙하고 평정한후 사기 충천하여 회군하는 견훤군을  만난 고려군사들은  노독과 장기간 강행군으로 지쳐,  싸웠으나 매복된 견훤군사에 포위되어 전멸 지경에 이르러, 왕건은 신장군과 용모,위용이 닮았으므로 신장군이 어의(御衣)와 어차(御車)로 변장하고, 왕건을 피신시킨후 김락 부장과 함께  독전하다가 지금의 파군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한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백제군에게 어의와 두상마저도 탈취한 상태에서 유금필 장군이 알고 있는 신장군의 왠발 바닥에 북두칠성과  같은 사마귀의 무늬가  있음을 알고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단소에 임시로 안장한후  왕건의 능지(陵地)로 지정해둔 춘천 서면 방동리 산 816-1에 매장했다.

              

 전사했던 장소에 원찰(願刹)을 창건하여 지묘사(智妙寺)라 하였고 공의 아우인  능길(能吉)과 아들인 보장(甫藏)을 원윤(元尹:고려 벼슬 이름)으로 삼아 공의 공훈에  보답했다..

 

                *단소(壇所):표충단, 순절지지비각이 있는  장소

                *춘천 서면 방동리:광해주(光海州) 소양강(昭陽江) 비방동(悲方洞)

              "신숭겸장군의 생애"는 표충사지 2집(평산신씨표충재종중) 사적편(史籍編)  

                행장(行狀)에 게시글 인용.

              

 

               [신숭겸장군의 유적지]

              다음은 장군이 순절한 곳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유적지다.

        <유적지 입구.해태 2마리가 유적지를 지키고 있다.  2009년도 제작 .

                  정면 중앙은 관리사무소.  대구직할시에서 1984년 문화재보호구역 확대지정고시에서19필지 37,827평방m로  지정>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하는 한편

       일품전지(一品田地) 삼백무(三百畝)를 하사하여 수호하게 함.

      

 2006년에 편찬한  종중의 표충사지(表忠祠誌) 2집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재산목록 부동산 토지중 산:83,648평,  전.답.대지:26,396평  총계:110,044평으로  되어 있는데 신시가지가 들어서면서 도로에 기부한 면적과 매각한 대지 면적을  합하면  훨신 상회할 것으로 생각된다>

   *무=묘(畝):중국의 주공(周公)이 면적의 단위로 사용했던 것인데 사방100보의

                면적을 1무(묘)라  하였다고 한다.

               

                    <홍살문:  출입구에서 들어가자 우측 표충단 입구쪽에 설치>

 

                    <신숭겸 장군 동상: 2009년에 새로 건립>

 

 

               <표충단>

 

 <연화대(요대): 표충단 내경에 위치한  연화로 조각된 하대 위에 등화석 모양의

 구조물인데,  고려시대 불교의식으로 기름을 태워 밝힌것으로되어 있는데 옛

  해안현(解顔縣)에서 등불에 소요되는 기름을 부담하기로 문헌상으로 되어 있으나 용도가  불분명하다>

 

   <표충단 내경에 400년 정도된 배롱나무로 신숭겸 보호수로 지정됨.

   표충사,표충재,상절당,표충단 경외에 충절을 기리고 피를 뿌린 장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배롱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표충단 동쪽에 있는 순절지지비각(殉節之地碑閣>

  이 비는 1819년(순조 19) 신숭겸의 28대손 신의직(申義直)이 대구 영장(營將)으로  부임했을 때 단을 세우고 비를 세웠다. 또한 1856년(철종7) 순절비 보호각을 창건 하였으며,  1928년 중수하고 1986년에 정부 보조금으로 보수를 하였다.

 

 

 

 

 

                    <400년된 팽나무: 표충재 입구에 있는 왕건나무>

 

        <표충재: 1607년(선조40년)에 지묘사가 폐허가 된 자리에 장절공 사우를 세웠고  1670년에 충렬사 중창을 하고  1672년12월26일.현종13년에 표충사로 사액(賜額). 1871년 대원군의 첩설원사(疊設院祠) 훼철령으로 훼철되어 폐허가 되었으며  1888년 표충재를  창건하였다. 방 2칸과 대청마루로 됨>

 

  *첩설원사훼철령: 동일 인물로 인한 서원과 사당을 어려곳에 설치하여 문중간

   불화와 유지 보수 및 재향에 경비로 인한  민간의 불만등으로 한곳만 존속하게하고  나머지 원사(院祠)는 훼철시킴.

   

1871년 (고종8년) 첩설원사훼철령에 의거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에 있는 태사사를 제외한 덕양서원,표충사,동양서원,도포서원,율리사 는 모두 훼철되었다.

               

                   <재실 >

 

               

  

        <표충재 대청에 걸려 있는 고려 睿宗(1120년)의 주련.

    서도(평양) 팔관회에서 잇었던 일로, 유사에게 장군의 후손들에 대해 묻는 과정에서, 공의 자손들은 개경에 은거해온지라 개경으로 돌아와 신숭겸장군의 고손 경(勁)생활과 가족의 상황을 묻고 주과(酒果)와  능라(綾羅)를 하사하고 사운(四韻)1절과 단가(短歌) 2장을 지었다.

 

 주련  "忠義明千古(충의가 천고에 뚜렸도 할싸"은 사운1절의 한구절이다.>

                  *유사(有司):사무를 맡아 보는 계급)                  

                  *팔관회:신라,고려 국가에서 행하는 종교 의식 행사

                   *사운(四韻):네 글자의 각운(脚韻)으로 된 율시(律詩)

                   *단가: 노래의 한가지로 고려의 가요를 말함

 

       <표충재 대청에 걸려 있는 고려 예종의 주련:사운(四韻)일절(一絶)인

     "사생유일시(死生唯一時):죽음과  사는것은 오직 한때이네)"의 한구절이다.>

                  

                   <동재: 동재와 서재는 1888년 표충재를 신축시 신설.방3칸>

 

 

                   <서재:중앙 방2칸에 양쪽에 제기고(祭器庫)와 부억 배치>

 

 

 

                 

충렬비는  표충재 동쪽에 있는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1607년(선조 40)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공의 외후손으로 이곳 유지를 살펴보고 크게 느끼는 바 있어 영남에 사는 후손들과 협력하여 지묘사 옛 터에 사우를 창건하고 충렬비를 세웠다. 비명은 예조판서 문정공 신흠이 짓고 글씨는 여주목사  김현성이 쓰고,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전자를 썼다.

정조5년(1781년) 비각이 허물어지면서 비가 넘어져 누운 것을 관민이 힘을 다해 모아 다음해 바로 세우고 같은 해에 비각도 개건(改建) 하였다. 고종9년(1872년) 후손들이 힘으로 비각(碑閣)을 중수하였고 1979년에 대구시에서 보수하였다.

보통 비를 밭치고 있는 거북이의 표정은 근엄하지만 이 비의 거북이는 귀엽게 웃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충렬비각 뒷 기저부:유적 탐방차 온 래방객(학생들로 추정)들이 소중한 문화재를  발로 차서 흠집을 만들어 놓은 벽체.  소중한 문화재를 우리 모두가 가꾸고 보호할 책무가 있다.

   관리인이 혼자인 관계상 일일히 감시할수 없어 평상시 비각 출입문을 잠군다고 한다.   항시 탐방객이 관람할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表忠祠 입구문>

 

 

 

                    <표충사(表忠祠> 신숭겸 장군의 향사를 지내는 사당 1988년 신축.

                 내부엔 장군의 영정,위패가 모셔저 있다. 음력 한식때 春享을 지냄 >

 

                   <영정:신숭겸장군의 영정은 雲甫 김기창 화백의 그림이라 한다 .

                    영정과 위패는 1993년에 봉안>

 

 

               

                   <  영정을 모신 사당 내부>

 

 

 

                     <표충사 뒷언덕에 있는 매판단: 표충사 현판을 묻은곳>

 

                 

                   <1993년에 준공한 尙節堂의 대문>

 

 

                   <상절당:  문중회의 장소:강당>

 

                   <상절당 내부에 걸려 있는 춘천 서면 방봉리산 816-1,

                  신숭겸장군 秋享(음력 9월9일)때 촬영 사진>

 

                  <상절당 내부 기물>

 

                   <상절당 상량문: 대들보에 단기 4325년2월20일(서기 1992년)[장군순절후1066년]에  상량>

 

                  < 상절당 우측에 서 있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

 

 

                     <독좌암>

               <獨坐巖: 불로동 이시아포리스 북쪽 不老亭 남쪽에 위치:동수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홀로  앉아 쉬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

            

                  모영재(慕影齋)

                                        소재지 : 대구시 동구 평광동(실왕리) 108

  

 

         이곳은 장절공의 영정각이 있던 곳이다. 장절공의 영정은 본래 지묘사에

   봉안되었었는데 지묘사가 헐린뒤에 대비사(大悲寺)로 옮겨져 봉안되었다가 순조 19년(1819년) 대구부리 김철득의 투장흉계(偸葬凶計)로 절과 함께영정도

  불타 버렸다.

   

그 후 순조 28년(1828년) 지묘동의 선비 최심의 고변으로 자손들이 이를 알고

 관가에 연달아 송사를 한 결과 투장한 무덤 셋을 관가에서 파내고 1832년에

 그 자리에 후손들이 영각 유허비를 세웠다.     

   

 재실은 1930년  신숭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대비사 사지에 세운  것인데

 매년 음 9月 9日에는  신씨문중(申氏門中)에서 享祠(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1966년에 또 한차례 중수(重修)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모영재(慕影齋)는

 영각(影閣)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투장흉계(偸葬凶計): 남몰래 장사(葬事)를 지내는 흉측한 계략

 

  ▶ 고려 태사 장절신공 영각 유허지비(高麗太師壯節申公 影閣遺墟之碑)

 평광동 옛 대비사터에 전사한 신숭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재실 바로 곁에 있는 高麗太師壯節公 申公影閣遺墟碑(고려태사장절공

      신공영각유허비)는 원래의 것이 화재로 없어진 것을 1832년 후손인 承政院(승정원) 都承旨(도승지) 申緯(신정위)가 새로 세워 비문을 찬(撰)했으며

   1848년(憲宗, 헌종 14)에 유림에서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비각을  세웠다. 

                        비각 아래 모영재(慕影齋)가 있다.

 

유허비

 

 

[平山申氏의 由來]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공신 모든 장수들과 함께 황해도 평주(지

 

금의 평산)에 사냥을 갔다가 마침 점심때가 되었는데, 기러기

 

세마리가 하늘 높이 맴돌고 있는것을 보고 태조가 '누가  저기

 

러기를 쏘겠는가?하니 신장군이 나서서

 '

신이 쏘리다' 하였다. 태조가 활과 안마를 내리니 신장군이 '몇

 

째 기러기를 쏘리까?'하니 태조가 '셋째 기러기 왠쪽 날개를 쏘

 

라'하였다.신장군이 태조명한대로  셋째 기러기의 왠쪽 날개

 

를 쏘아 맞히니 태조가 탄복하여 평산으로관향을 삼게 하고 평

 

산신씨(平山申氏)로 사성(賜姓)되여 이곳에 궁위전(弓位田)을 하

 

사 받았으며,  이자리에 태사사(太師祠)가 있고 서원 철폐령에

 

도 전국 주요 47개 남은 서원에 들어 있으며이를 계기로 평산신

 

씨 시조(始祖)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