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語雜物函

豊臣秀吉|日本歷史와 이야기

bsk5865 2011. 6. 2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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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秀吉|■.....日本歷史와 이야기

유덕인 | http://cafe.daum.net/yooin32/I4iS/116 

 

개요
본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 하시바 지쿠젠노가미[羽柴筑前守]라고도 함. 16세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시작한 일본통일의 대업을 완수했고, 해외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죽을 때까지 최고위직인 다이코[太閤:1585~98]를 지냈다.

 

초기생애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 집을 떠나 지금의 시즈오카 현[靜岡縣]인 도토미 구니[遠江國]로 가 다이묘[大名]의 한 가신(家臣)의 시종이 되었다.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일본의 세력자인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아시가루[足輕:보병]가 되었는데 쾌활한 성격과 세련된 매너 그리고 총명한 두뇌로 인해 사무라이로 발탁되었다.

 

노부나가가 1568년 중부 일본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을 때 히데요시는 몇몇 주요전투에 참전했다. 1573년 9월 2명의 강력한 다이묘를 패퇴시킴으로써 오미 구니[近江國] 나가하마[長浜]의 영주가 되었고 따라서 하시바 지쿠젠노가미라고 불렸다
.
 

 

1577년부터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산인-산요[山陰山陽:中國地方] 지방의 정벌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빗추 구니[備中國]를 침공했다. 그는 하리마 구니[播磨國]의 히메지 성[姬路城]에 진을 치고 다카마쓰[高松]의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포위공격했다.

 

1582년 노부나가는 자기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고 할복자살했는데,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와 휴전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처단함으로써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오다 씨[織田氏]의 가신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 씨의 영주로 노부나가의 손자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2명의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1583년 히데요시는 2명의 가신 중 1명을 패퇴시키고 할복자살하게 했으며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킨 뒤 그해 오사카[大阪]에 큰 성을 지었다.

 

이어 그는 200년 이상이나 끌어온 내전상태를 종식시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노부나가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정벌에 나섰다. 1584년에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을 옹립하고자 했던 강성한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전투를 벌였으며 승부가 분명하게 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은 동맹관계를 맺었다.
 

 

1585년 간파쿠[關白]에 임명된 이래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리게 되었다. 그뒤 정적(政敵) 모리 데루토모와 휴전을 하고 일본 서부의 시고쿠[四']와 규슈[九州]를 정벌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을 간혹 받기도 했다.

 

1590년 이에야스의 원조 아래 간토[關東]와 오우[奧羽] 지방을 복속시킨 뒤 다이묘 연합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이 연합은 전국을 장악하는 정부를 구성했다.

 

체제 개혁
우선 그는 농부·상인·승려의 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가타나가리레이[刀狩令]를 내렸다. 이어 일본 전역에 널려 있는 불필요한 성(城)을 철거시키는 시로와리[城割] 같은 조치를 취했다. 또한 사농공상제(士農工商制)를 도입하여 무사·농민·장인·상인의 계급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신분 차이를 명확하게 했고, 봉건사회의 신분체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각 계급으로 하여금 도시나 마을에 살도록 했다.

 

한편
겐치[檢地:토지측량]를 실시해 조세 징수를 고르게 하여 통일정권의 기반을 굳혔으며 교통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로검문소를 철폐했다. 또한 광물자 원 개발의 장려로 화폐의 주조가 원활해짐으로써 교역이 촉진되었다.

 

일본 전역을 정복한 히데요시는 간파쿠의 지위를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한 간파쿠'를 뜻하는 다이코가 되었다. 이어
조선침략을 준비했는데 최종목표는 중국·필리핀·인도의 정복이었다.

 

그러나 1592년에 처음 침공한 조선반도의 정복도 여의치 못했는데 이는 일본의 원정군 규모가 조선침략을 완수할 정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의 잠정적인 휴전을 파기하고 1597년 제2차 조선침략에 나섰으나 조선전투의 불리한 결과에 크게 상심하여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히데요시의 정실(正室)은 후사를 낳지 못했으며 측실이 아들을 하나 두었을 뿐인데 이 아이는 히데요시가 죽을 당시 6세에 불과했다. 2년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1603년에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세웠다.

 

평가
히데요시는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혼자 공부하여 시를 지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하며 노[能] 연기도 잘 했고 선사(禪師)인 센 리큐[千利休]에게서 다도(茶道)를 열심히 배워 종종 다도회를 베풀고 솜씨를 자랑했다. 그가 추진해온 전국통일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의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