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語雜物函

德川家康,|■.....日本歷史와 이야기

bsk5865 2011. 6. 28. 14:24

 

유덕인 |  http://cafe.daum.net/yooin32/I4iS/115 

 

일본의 마지막 바쿠후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 1603~1867]의 창시자.
개요
본명은 도쿠가와 다케치요[德川竹千代].

 

초기생애
지금의 나고야[名古屋]에서 동쪽으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 무사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방 무사가문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내전 속에 살아 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이에야스의 유년시절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아버지는 연형합종(連衡合從)의 그물에 빠져들어 끊임없이 전투에 참가해야만 했다.

 

그가 2세였을 때 동맹관계의 변화로 인해 어머니는 영원히 그의 가문과 결별하게 되었고, 7세 때에는 군사적 상황이 어려워져 어린 이에야스는 슨푸(지금의 시즈오카 시[靜岡市])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강력한 가문인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인질이 되어야 했다.

 

슨푸에서의 훨씬 안정된 생활 속에서 그는 군사·행정 기술을 익혔고 특히 매사냥을 즐기게 되었다. 1550년대 후반에는 결혼하여 첫아들을 낳았고 이마가와 씨를 위해 군대를 통솔함으로써 군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슨푸에서 보낸 몇 해 동안 그는 일신상으로는 편안했지만 늘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1549년 측근의 가신(家臣)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가문이 몰락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의 지도력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서부의 강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젊은 도쿠가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향인 오카자키로 돌아가 생존해 있던 친척과 가신들을 수습하여 가문의 영주(領主)가 되었다. 몇 달 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를 맺는 한편 이마가와 씨의 무능한 신임(新任)영주를 오랫동안 잘 달래 슨푸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뒤 몇 년 동안 다른 가문들과 싸우는 일이 없게 되자 그는 자기 영지(領地) 내의 반란세력이었던 불교 종파들을 분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자신의 소규모 군대의 지휘체계를 개선하고 행정관을 임명했으며, 과세·소송·치안 절차를 규정하고 시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60년대 후반 이마가와 씨가 몰락하자 이에야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그결과 1570년에는 본거지를 작은 연안도시인 하마마쓰[浜松]로 옮기고 이곳을 자신의 영지 내의 상업적·전략적 요지로 개발했다. 그는 유력한 무장인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의존해 계속되는 내전의 역경을 이겨내는 한편 서서히 영토를 확장하여 1580년대 초반에는 강력한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이때 오카자키를 비롯하여 하코네[箱根]의 산간지방까지 펼쳐진 비옥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영지로 두게 되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부하의 습격을 받고 상처입은 몸으로 자결하자 노부나가 휘하의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신속하게 노부나가의 죽음을 설욕한 뒤 노부나가가 이룩했던 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부각되었으며 두사람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으나 승부는 결정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중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의 맹세를 했고 히데요시는 만족하여 이에야스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1580년대 후반 히데요시가 일본 남서부의 다이묘들에 대해 영향력을 넓혀나가는 동안 이에야스는 착실히 자신의 기반을 강화해나갔다.

 

그는 가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영지의 농업생산성을 높였으며 행정의 신뢰성을 향상시켰다. 1586년 이에야스는 영지의 방비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히데요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좀더 동쪽에 위치한 슨푸, 즉 그가 인질로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호조 씨[北條氏] 정벌
1589년 히데요시는 하코네 산지동쪽에 대규모 영지를 가지고 있던 다이묘 가문인 호조 씨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기로 결심했다. 호조 씨가 이를 거부하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대규모 육·해군을 동원하여 해변에 위치한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에 근거를 둔 호조 씨의 군대를 봉쇄했다.

 

끈질긴 지구전과 포위전 끝에 호조 씨는 식량부족으로 끝내 항복했다. 히데요시의 권유에 따라 이에야스는 하코네 서쪽의 5개 연안지방을 반납하는 대신 동쪽에 있는 호조 씨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에야스는 어촌인 에도[江戶 : 지금의 도쿄] 가까이에 있던 작은 요새와 농경지에 수천 명의 가신들과 그들의 군사장비 및 식솔들을 신속히 이주시켰는데, 이곳은 교토[京都] 근처에 있던 히데요시의 근거지에서 걸어서 한 달 가량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1590년대에 이에야스는 서부 일본에 근거를 둔 몇몇 유력 다이묘들과는 달리 실패로 끝나버린 히데요시의 2차례에 걸친 조선 침략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동쪽에 있는 새 영지로 옮겨가게 된 것을 계기로 삼아 군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자신의 영지가 가능한 한 안전하게 방비되도록 했고 정예군은 영지의 외곽과 주요 접근도로에 배치하고 가장 세력이 약해 위험이 없는 군대를 에도 가까이에 배치했다.

 

한편 에도 부근의 대규모 농경지를 자신이 임명한 관리의 직할하에 두도록 함으로써 에도 성(城)에 사는 주민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식량이 보급되도록 했으며 균일한 과세를 위해 토지조사를 세밀히 실시했다. 또한 모든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농민반란의 가능성을 감소시켰으며 장인(匠人)과 상인들을 에도 성으로 불러모았다.

 

성을 확장·개축하고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주민들의 원활한 식수보급을 위해 토목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1598년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이에야스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군대와 가장 생산성 높고 잘 정비된 영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자 유력 다이묘들 사이에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에 가장 강성하고 존경받던 이에야스는 권력투쟁 속에서 동군(東軍)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00년 가을 교토에서 북동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에 있는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승리를 거두었다.

 

천하통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패자(覇者)가 된 이에야스는 그 패권을 영속시키기 위한 조치를 신속히 취했다.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는 행정적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군사적 이득을 굳건히 다졌던 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다이묘들에 대한 대폭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의 적대적 다이묘들로부터 영지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다이묘들의 근거지 가까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했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충성스런 가신들을 위해 중부 일본의 거의 전역을 직할지로 만들었다.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뒤에는 여러 해에 걸쳐 다이묘·궁중세력·승려·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감독기관을 두었다.

 

당시 실권은 없으나 의례적인 권위는 가지고 있던 황실은 그동안 이에야스에게 그의 세력을 반영하는 직책명을 수여해왔는데, 마침내 1603년 쇼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 최강의 다이묘인 이에야스는 천황의 이름 아래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

 

2년 뒤 정식으로 은퇴한 그는 에도를 떠나 옛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이때 쇼군의 지위를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줌으로써 이 지위가 도쿠가와 가문의 세습적 특권임을 확고히 했다.

 

쇼군 시절이나 은퇴 후에나 그는 외교문제에 있어 전권(專權)을 휘두르기를 좋아했다. 당시 중국의 명(明)조는 붕괴 직전에 있었으므로 해외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주로 중국을 상대해왔던 일본은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등의 무역 요구와 네덜란드나 스페인 등의 포교(布敎) 요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무역을 병기, 상업적 이득, 그리고 폭넓은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1612년 외교사건의 발생을 계기로 그는 선교사들을 자신이 힘들여 만들어놓은 정치체제에 도전하는 위협적 요소로 보기 시작했다. 그뒤 2년 동안 선교활동을 중지시키고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탄압했으며 후계자들 역시 30년 동안 이에야스의 반(反) 그리스도교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결과 일본 내에서 그리스도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무역도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을 인사이동시키고 수년에 걸친 정치개혁을 통해 입지를 강화시켰으나 다이묘들에 대한 경계를 계속 늦추지 않았다. 1604~14년에는 아들 히데타다로 하여금 다이묘들을 동원해 에도 성을 증축·개축시키는 일을 벌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석재와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수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인원이 수년 동안 끊임없이 동원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에도 성은 넓은 해자(垓字), 높은 석벽(石壁), 나무로 된 긴 흉벽(胸壁), 큰 문루(門樓), 곡식과 동전이 가득찬 넓은 내화(耐火)창고 등이 그물처럼 엮어져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성이 되었으며 주변 주택에서는 다이묘들이 인질생활을 했다. 이제 에도는 장인·상인·관리·노동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도시·항구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남은 정적들의 제거
이러한 대규모 공사(工事)를 통해 이에야스는 더욱 강성해진 반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했던 다이묘들은 훨씬 가난해졌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가문의 강성한 군사력이 절대적 정치권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의 기반이 굳건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비록 히데타다가 쇼군이 되긴 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정통성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사카 성[大阪城]에서 성장한 히데요리는 점차 추종 무사들을 모아들여 도쿠가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14년까지 히데요시를 따랐던 세력들이 대부분 죽자 이에야스는 마지막 정적인 히데요리를 별 위험없이 제거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진영의 오랜 긴장상태가 지속된 뒤 이에야스는 군대를 동원해 산발적이고 특기할 것 없는 싸움을 2차례 치른 끝에 마침내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고 히데요리 등 성의 실력자들을 제거했다.

 

그는 도쿠가와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영지를 배분한 뒤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이듬해인 1616년 병사했다. 그는 100여 년 동안 무사들이 이루려 했으나 실패한 일, 즉 자신의 가문들을 영원한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일본 전역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해냈다.
 

'日語雜物函' 카테고리의 다른 글

日本史 후딱보기  (0) 2011.07.20
[オピニオン]韓哲鏞と朴勝椿  (0) 2011.07.03
豊臣秀吉|日本歷史와 이야기   (0) 2011.06.28
日本 歷史의 時代區分  (0) 2011.06.28
歴代の内閣総理大臣  (0) 2011.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