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엔카 컴나라 운영자 11.07.22 20:16
(부여=연합뉴스) 이은중 기자 = 백제왕의 후손을 자처하는 일본인이 백제의 고도인 충남 부여군에 100만엔(한화 1천300만원)을 기부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사진은 임성태자 45대 후손인 오우치 기미오(大內公夫) 씨 부부는 2010년 9월 29일 서동축제 명예홍보 대사 자격으로 오우치 문화탐방회 회원 30여명과 함께 익산을 찾았다.
임성태자 자화상
琳聖太子(임성태자)
백제 성명왕(성왕?)의 셋째아들로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의조(義照). 오우치(大內)씨와 도요타(豊田)씨의 시조. 위덕왕과 혜왕의 동생. 문제는 일본서기에만 기록이 남아있고 우리나라 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일본 오우치 씨(大內氏), 토요타(豊田)씨의 일본 입국 선조이다. 일본에 제철 기술을 전파했고, 불교 확산에도 기여했다.
가족관계 부왕 : 성왕 형 : 백제 위덕왕 형 : 혜왕 숙부 : 순타태자(? - 513년, 칸무 천황의 생모 화신립의 선조) 생애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로 위덕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일설도 있다. 임성태자는 일본에서는 토요타(豊田)씨와 오우치(大内)씨 가문의 14대조이다.[1] 일본으로 건너온 뒤 597년 일본 야마구치로 가서 타타라(多多良)라는 성씨를 창설하였다. 그의 사후 타타라씨는 12세기에 오우치(大內)로 성씨를 바꾸고 1557년 오우치 가문의 당주(종손)는 정쟁에 휘말려 할복했지만, 살아남은 아들이 토요타(豊田)로 성씨를 바꾼다. 현재에는 오우치씨와 토요타씨 모두 일본에 존재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지 않아 실존여부에 의심이 제기되어 왔으나, 일본의 번주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성명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공문을 조선 정종 1년(1398년) 7월 조선 정종에게 정식으로 보내면서 알려지게 됐다. 임성 태자는 성왕이 신라의 복병에게 피살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백제의 우수한 문화예술을 일본에 전래[4]하여 일본불교 확산에 기여했으며, 그는 일본에 제철기술을 전파하였다 한다. 코류 사에는 그가 일본에 파견될 때 백제왕에게 하사받았다는 검이 보존되고 있다.[6] 코류 사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석탑이 현대까지 전래되고 있다. 임성태자 이외에도 그의 숙부뻘인 무령왕의 제7황자 순타태자(純陀太子)는 일본에 사신으로 왔다가 아들 법사군(法師君)을 낳고 20대에 요절했다. 법사군은 간무 천황의 생모인 화신립(和新笠)의 선조이다. 화신립은 백제대신 화을계(和乙繼)의 딸이며 고닌 천황의 후궁이었으나, 사후 아들 간무 천황이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아들에 의해 황태후로 추증되고 고야씨로 성이 바뀌었다. 순타태자는 고야씨와 화씨(야마和氏)가의 선조가 된다. 조선시대 일본으로 끌려간 유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는 임정태자(臨政太子)라 나오며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치의 좌경대부가 되어 오우치도노라 불리며 그 후손은 47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제는 실제 오우치가는 31대인 오우치 요시타카대에 멸망.[1]
성왕의 셋째 아들 또는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성왕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사하자 타이완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타타라(多多良)씨를 칭했으며 칠성신 신앙을 비롯해 일본불교의 확산과 제철기술을 전파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쇼토쿠 태자가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료에는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실존인물인지 의심받고 있으나 일단은 실존인물로 보고 있는듯. 조선 정종 1년(1398년) 7월 스오, 나가토, 이시미, 이즈미, 기이의 슈고인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예인지 확인해달라고 공문을 보냈음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오우치가 당주가 된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는 자신이 백제의 후예임을 내세워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권을 누려왔다. 여담으로 오우치가는 1557년 32대 당주 오우치 요시나가(大內義長)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에게 패해 자결하면서 멸망한다. 다만 가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 지금도 오우치, 도요타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 코류지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탑과 백제왕으로부터 받았다는 검이 남아있다고 한다.
쇼군을 갈아치운 일본 최고의 권력 가문, 오우치” 오우치 가문과 조선 왕실의 관계는?
오우치 가문의 한국 방문은 700년 전에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통교기사만 150년간 에 걸쳐 200회가 넘을 정도로 활발하게 조선과 교역했던 오우치 가문. 그들은 특별히 사신을 통해 요청한 것이 있었는데...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정종실록 1년 7월 10일 중에서 14세기 당시 일본을 재패했던 일본 최고의 가문 오우치 일가는 왜 자신들을 백제의 후손이라 주장했는가?
( 일본 야마구치시(市)에 남아있는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의 동상과 루리코사(琉璃光寺) 5층탑)
■ 우리에게 없는 백제 왕자의 기록” 일본에 남아 있는 임성태자의 흔적
(코류사에 남아있는 임성태자가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진 도검 )
오우치 가문에 의하면 임성태자는 성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그의 기록이 없다. 그는 과연 실존했던 인물일까? 일본 곳곳에는 임성태자의 유물과 기록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1400년 전 임성태자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일본 고대 국가 건설의 비밀을 만나게 되는데....
(오우치 가문의 족보와 족보 제일 앞장의 임성태자(琳聖太子) )
■ 임성태자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 597년, 백제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일본 기록에 의하면 임성태자가 백제를 떠난 시점은 597년. 그는 왜 백제를 떠나야만 했을까? 임성태자가 떠난 후 2년간 혜왕, 법왕, 무왕 3명의 왕이 바뀔 정도로 혼란했던 백제. 건국 이래 가장 치열한 정치적 파장이 예고됐던 상황에서 임성태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일본에 남아있는 임성태자 공양탑 )
2009. 6. 8 (월) 23:30~24:15 (KBS 1TV) |
'過去資料函' 카테고리의 다른 글
美國 歷代 大統領 就任式 (0) | 2011.07.27 |
---|---|
아~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를![우리가 잊었던 부끄러운 현실] (0) | 2011.07.26 |
가야 순장소녀 '송현이' 부산 나들이 (0) | 2011.07.16 |
獨立運動家 李承晩 博士의 肉聲錄音 (0) | 2011.07.02 |
韓國 獨島, 明確한 證據 (0) | 2011.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