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演好마을 운영자 11.08.16 21:20
우미인초(虞美人草)
초패왕 항우(項羽)가 한고조 유방(劉邦)에게 쫓겨서
해하(垓下)에까지 왔을 때였다
오랜 싸움으로 군량은 떨어지고 장졸들은 지칠대로
지친데다 사방는 한나라 군에 포위된 상태였다.
그런 사정을 안 장자방은 밤이 깊자 계명산에 올라가
초나라 군사들이 있는 진영을 향해 애절하고 곡진한
가락으로 퉁소를 불었다.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고향 생각이 나게 하여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의 계략은 적중했다.
그렇지 않고도 고향생각에 젖어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그 슬픈 가락을 듣고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 둘 한나라 군의 진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항우의 숙부마저
적진에 투항하고 말았다.
넘어간 초나라 군사들이 노래를 부르니
온통 초나라 노래였다.
잠자던 항우가 그 노래를 듣고 한 나라군이 벌써
초나라를 다 점령한 것으로 알았다.
그것이 바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가 나오게 된 유래이다.
이미 천운이 다함을 알게 된 항우는 다음날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의 애비(愛妃) 우미인(虞美人)이 문제였다.
강동을 떠나 6년동안 위태로운전쟁 속에서도
한번도 헤어진 적이 없는 우미인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었다.
항우는 그날 밤 주연을 배풀어 우미인과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렇게 탄식을 했다.
역발산혜기개세 (力拔山兮氣蓋世)
시불리혜추불서 (時不利兮湫不逝)
추불서혜가나하 (湫不逝兮可奈何)
우혜우혜나약하 (虞兮虞兮奈若何)
힘은 산도 뽑을만 했고 기개는 세상 휩쓸고도 남았지
형세 불리하니 오추마조차 나아가질 않네
오추마 같은 것이야 어찌해 본다지만
이것이 그 유명한 해하가(垓下歌)이다.
우미인은 피를 토하듯이 탄식하는
항우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이렇게 노래했다.
한나라가 이미 초 땅에 덮었고
사면은 온통 초나라 노래인데
대왕은 의기조차 이미 잃었으니
내 구차히 살아서 더 무엇하리.
이렇게 노래를 마치자 항우의 옆구리에 찼던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찔러 자진했다.
이별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여인의 갸륵한 용단이였다.
그것을 본 항우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사력을 다하여 탈출에 성공을 한다
드디어 오강(烏江)에 이르렀으나
그는 거기서 주져않고 말았다
고향을 떠날 때 데리고 온 강동의 청년 8.000명을
다 죽이고 저 혼자 살아서 돌아간들
그들의 부모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의 애마는 강물로 뛰어들고
그는 지기 목을 찔러 자진하고 말았다.
그후 우미인의 무덤위에 예쁘고 가련한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우미인의 넋이
꽃으로 화한 것이라 하여 그 때부터
우미인초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우미인초 앞에서 항우의 "해하가"를
부르면 꽃은 바람이 없어도
흐느끼듯 하늘하늘 몸을 떤다고 한다.
경극 패왕별희의 항우와 우희
항우와 우미인(초한지 영화에서)
우미인초(개양귀비꽃)
양귀비꽃 보다작고 아편성분이 생성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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