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의 고향(故鄕) 마산항(馬山港)
이은상 시인의 가고파의 고향이고 한국대중가요 역사의 산 증인이시고 수많은 히트곡의
작곡가 추미림과 작사가 반야월 그리고 불효자는 웁니다.로 유명한 가수 진방남
이라는 藝道上으로 따로 지어 일컫는 세 藝名의 본명은 박창오 그분의 고향도
마산이라고 하니 마산은 진한 향수를 느끼게하는 藝鄕이고 4.19의거의 發火點
이기도 하니 부모에게 심한 매를 맞는 손주가 가여워서 매를 말리며 달겨들어 와락
품에 껴안는 정이 깊고 사랑이 많은 할머니처럼 포근해서 가고 싶은 고향인가 봅니다.
그래서 역사가 있고 노래가 있는 가고파의 고향 마산항에 들렀는데 4.19로
이어지는 3,15 의거의 자료가 많아서1, 2회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2011/12/6 夜 작성자 명사십리
가 고 파
이은상 作詩 김동진 作曲 이인범 노레
3.15 마산의거(馬山義擧)
1.역사적 의의
1960년3월15일 민주의 깃발을 울리던 그 날!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시위를 일으켰다.3월 15일 1차 의거에 이어,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 되었던 김주열 군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체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격분한 시민들이 다시 2차 의거를 일으켜 싸웠다.
이 항쟁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0여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거나 체포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러한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의로운 투쟁은 전 국민들의
분노와 함께 4 · 19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드디어 4월 26일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게 되었다.자유 · 민주 · 정의가 기본 정신인 3 · 15마산의거는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 · 민족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민족 평화 통일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 도도한 물결은 4월혁명,
부마민주화운동, 6월항쟁, 5 ·18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진행형으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2.발생배경
왜 3.15는 일어났는 가!
국민소득이 1인당 80$(현, 10,000$)에 지나지 않고, 미국의 무상원조와
구호물자에 의존해 겨우 영위되고 있어 나라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정치 또한 부정 · 부패 · 불의가 난무한 가운데 정 ·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해 자유당으로 이적한 국회의원 허윤수의 변절은 야당
도시 마산 시민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줘 그 분노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 했다.
-1950년대말 사회배경-
소득불평등과 경기침체
한국전쟁 이후 빈사상태에 빠진 한국 경제는 서민들의 생존 유지마저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수입된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곡물 가격을 터무니없이 하락시켜 농촌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대부분의 농가에서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소나무 껍질, 칡뿌리,
산나물 등으로 허기를 채워나가야만 했다. 이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도시로 빠져 나오지만, 공장의 일자리도 이농민들을
수용하기에는 현저히 부족하여 실업률은 23.4%에 달하게 된다. 또한 소수 특권층
중심의 매판기업이 경제권을 독점함으로써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켰다.
-1950년대 말 마산의 정치배경-
이승만 독재정권 장기집권의 야욕
1948년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피선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을 지낸 후, 1952년 자유당을
창당하면서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54년에는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을
고쳐 실질적인 종신 대통령의 길을 마련하기 위한 개헌안을 내놓았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자, 사사오입 논리를 적용하여 부결을 번복하고 통과시킨다. 1956년 3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장기 독재에 대한 국민의 비판통로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1958년 8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야당과 언론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신국가보안법은 59년 1월 15일 자로 발효되었다. 이와같은 강압 정치와 집권
연장에의 야욕은 이후 한층 구체화, 조직화되어 3 · 15 부정선거를 유발하게 된다.
부정부패 만연
8 · 15 광복을 주체적으로 쟁취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외세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에 한국전쟁을 겪으며 권력과 유착한
소수 특권층들은 산업자본가로 전환하였고 원조체제를 적극 활용하여 신흥
재벌로 성장한다. 재벌과 집권당의 정경(政經)유착은 필연이었으며, 심지어
이들 중 22%는 현직정치인이었다.수많은 특혜에 대한 대가로 재벌들은 정치자금에
깊이 관여될 수 밖에 없었고, 자유당은 1백 50억환이 넘는 선거자금을 조성하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민들과는 대조적으로 거의 모든 경제권과 부를 독점할
수 있었던 소수의 재벌들 또한 그들과 뿌리깊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이어온
집권당의 부정부패는 1950년대 굴절된 사회상의 단면이었다.
부정선거 획책
자유당은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지휘 아래 1년여에 걸쳐 치밀하게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전국 경찰의 주요 간부는 모두 맹목적 충성 인물로 교체되었고, 야당의원들에
대해 집요한 분열 공작이 펼쳐졌으며, 정치깡패 등을 동원해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일반 공무원은 물론 교육 공무원들까지 부정선거 운동에 투입되어,
자유당에 투표할 것을 설득 권유하는 담임교사의 가정방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 치료 차 미국으로 건너가자, 1960년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있는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 조병옥 후보는 미국 육군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선거가 한달 남은 2월 15일 심장마비를 일으켜 서거하였다.이에 대통령은
이승만 단일 후보로 당선이 확실해졌고,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 계획은 더욱 구체화 된다.
허윤수 의원 변절
3 · 15 이전의 마산 정국에 가장 큰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은 허윤수였다. 58년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입후보하여 당선한 허윤수 의원은 시민들에게 비교적
신망을 얻어온 보수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자유당 이용범에게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자유당 공천 및 당선 보장과 동양주정 경영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1960년 1월 5일 탈당을 선언한다.이후 1월 11일 자유당에 정식 입당하였으며,
3월 4일에는 동양주정을 인수하였다가 경쟁업체인 무학주정으로 매각하게 된다.
동양주정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대표적인 부패 정치인이자 기업인이었던
이용범의 배후조종으로 부산지검 마산지청장 서득룡과 마산세무서장 서복태까지
개입된 정관경 유착의 표본이었다. 마산 시민들은 자신들이 찍어준 표를 팔아
동양주정을 삼켰다고 격분하였으며, 정치신의를 저버린 허윤수 개인에 대한
증오와 공작정치를 일삼는 자유당에 대한 반감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3.전개 과정
1)3.15 마산의거
-시작과 끝부정선거획책 -
민주당 선거포기 - 1차항쟁(3월13일) - 김주일열사 주검이 되어 돌아오다.
(4월11일) - 2차항쟁(4월11일~4월13일)4.19혁명의
도와선이됨 - 이승만 정권의 종지부
2)시간대별 함성일지
-부정선거 다시 하라!독재 정권 물러 가라!-
3월15일
10시 30분 : 민주당 마산시당부 선거포기선언-
10시 30분 ~ 14시 : 부정선거 무효선언, 오동동 당사에서 가두 방송 -
14시 30분 ~ 16시 30분 :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 30여명 최초 시위
600여명의 군중 불종거리에서 경찰과 대치, 투석전 전개(민주당
간부 정남규, 강경술, 정경도, 황칠규, 정진철 등 강제연행)-
17시 00분: 남성동, 부림동, 창동가두 시위종결/
마산시청 개표장으로 모일 것을 약속-
18시 30 분:마산 무학초등학교에서부터 마산의료원에
이르는 연도에 수천명 시위군중 운집, 경찰과 투석전 전개-
20시 00분: 시위 군중속으로 난입하던
소방차 전주와 충돌, 마산시 일원 정전으로 암흑-
20시 10분: 마산시청 앞, 남성동 파출소 앞 경찰 발포경찰 최루탄발사에
이어 칼빈총 난사김영호, 김효덕, 김영준 총탄 사망, 김주열 최루탄 맞고 사망-
21시00분: 북마산 파출소 시위 군중에 경찰 발포마산시청, 남성동 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앞 경찰 무차별 발포로 8명 사망부상자 수십명 발생 및 수백명 체포 구금-
21시 30분 북마산 파출소 전소완월동 소재 민의원 허윤수 거주 집 습격, 전파-
23시경 : 완월동 소재 남전 마산지점 습격, 유리창과 정문 파괴-
23시 30분경 : 해산
4월 11일
11시00분 : 김주열군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
17시00분 : 시위 시작. 남성동, 불종거리, 오동동파출소 앞 등 시내 일원 시위 계속
19시00분 : 시:도립마산병원 앞 30,000여명 운집.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창원군청 앞 시위 및 기물파-
20시30분 : 마산경찰서장 짚차 전소. 마산경찰발포. 2명 사망
4월12일
10시 ~ 16시 30분 :마산고등학교, 마산상업고등학교, 마산공업고등학교,
마산창신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 마산성지여자고등학교,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
마산간호고등학교 3,000여명의 학생들이 시민 1만여명과
시내일원에서 시위, 도립마산병원에 집결 시위 후 해산-
19시00분 : 시민 1만여명 경찰서 앞 집결 시위 23시 해산
4월13일
-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200여명 시위
4.꺼지지 않는 불꽃 3.15
-3,15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긴것은 무엇인가.-
-정의의 마산,민주의 마산 남녘의 서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마산은 굴절된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는데 큰 몫을 다해 왔기에 언제나 선구적인 모습으로
부각돼 왔었다. 지난 1899년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과 함께 일제가 기도한
상권 탈취에 항민들이 똘똘 뭉쳐 필사의 투쟁을 벌임으로써 그들의 야욕을
깡그리 분쇄시키고야 말았다. 이러한 자주 정신은 1919년 3월 10일 추산활사장에
열린 독립만세 시위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 때 의분에 찬 민중들의 핏빛 함성이
4대 의거로 손꼽히는 삼진의거를 촉발 케한 진원지가 되어 민족자존의 터전으로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이렇게 민주혼을 일깨운 의거 정신이 청년 학생들의
혈관에 뜨겁게 계승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10월 부마항쟁으로
치달아 유신정권마저 타도해 민주실천의 고장으로서 위상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자주 정의의 맥을 이어온 우리 고장 마산은 늘 깨어있는
정신, 모두를 포용하는 열린 마음, 굽힐 줄 모르는 올곧은 목소리, 꺾이지
않는 정의로운 몸짓으로 진취적 기상을 키워왔기에
영세 불멸의 민주성지로서 오늘도 찬란한 광휘를 발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3.15-
어느 시대 어떤 정치상황을 막론하고 역사의 진행 모습은 이해 상충 집단 간의
갈등과 충돌, 반목 투쟁을 거쳐 화해와 용서, 재통합의 국면을 맞는 것이
보편적 흐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 속에 내재한 진실 규명작업이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근대사라는 큰 틀 속에서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상을 조명해 볼 때 3 · 15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대응이었으며 요청이었다. 3 · 15 의거가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입에
재갈이 물리고 침묵을 강요당하면서 일반적으로 폄하, 무시당한 질곡의
공간은 분명 3 · 15의 유배공간이었다. 이제 3 · 15의 고귀한 정신을 당당히
되돌려 놓는 올바른 자리매김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무다.따라서
3 · 15는 어두웠던 한 시대를 청산하는 마침표가 아니라 밝고 희망찬 2천년대 새역사
창조의 원동력이자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한 민주화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의 공유에 그 참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궁극적
목표의 귀결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며 그것은 곧 정의와 진실이 지배하는
사회, 원칙과 순리가 엄존하는 성숙된 민주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준엄한
역사적 소명의식에 준거하고 있음을 가슴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 순국 선열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