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길시 前 성남 분당중 교장
가미카제로 출격하기 전날 '고향 노랠 부르고 싶다'고 했다
바로 아리랑이었다
일본 시골 여관에 덩그러니 걸린 그의 빛바랜 사진
남의 전쟁에 청춘을 묻은 그에게 아리랑은 무엇이었을까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여행을 다녀왔다. 한결같이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들 속에, 인연처럼 만난 사연 하나가 가슴에 애련하다. 지란(知覽)이라고 하는 작은 시골마을의 오래된 여관 복도에 65년 동안 걸려 있는 한국사람 사진 한 장.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沈壽官)' 도요지와 도자기를 보는 것이었다. 일정에 시간 여유가 있어 관광안내소에 상담을 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란이란 곳을 추천해 주기에, 그 자리에서 관광지도 한쪽 구석 맨 위에 올라 있는 도미야여관(富屋旅館)이란 곳에 전화로 예약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도착한 지란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어, 여관부터 찾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한국인 손님이 길이나 헤매지 않을까 문밖까지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날 손님이라고는 우리 부부 둘밖에 없는, 오래된 조그만 여관이었는데, 현관에서부터 특공대(特攻隊)와 '호타루(반딧불이)'에 관한 액자와 문구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관은 오래전, 한 한국사람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임을 안 주인 도리하마 하쓰요씨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란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자살공격으로 악명 높은 특공대 기지가 있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도리하나 도메)가 이 집에서 식당(食堂)을 하고 있었는데, 특공대원들이 외출 나오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중에는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한국명 탁경현)라는 이도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이 없던 그의 어머니는 아무도 면회 오는 이가 없었던 그와 모자(母子)처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그는 출격하기 전날, 작별 인사를 할 겸 찾아왔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오늘이 마지막이니 내 고향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눈물을 감추려는 듯 모자를 앞으로 당겨 얼굴을 가린 채 그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한 서린 목소리로….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burbuck@chosun.com
이튿날 그는 출격했고, 태평양에 몸을 던진 그날 밤, 그가 앉아 있던 방에는 거짓말처럼 반딧불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이후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러 해 전에 일본에서 '반딧불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의 어머니는 식당 일을 계속하며,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혹시라도 그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유족들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다고 한다.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잊혀져가고 있는데, 사진만 저렇게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유족을 만나든지, 그의 고국으로 사진이라도 전해주고프다며…. 지금은 식당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자기와 딸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하쓰요씨는 우리의 식사 시중을 들어주며 아린 얘기들을 끊임없이 가슴에 채워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에 걸려 있는 여러 사진들 사이에 빛바랜 낡은 그 사진 한 장이 애처로이 걸려 있었다.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되었을 그 사진이, 이국(異國)의 시골 한구석, 가족은 고사하고 같은 피의 한국사람들조차 발길 하지 않는 이 조그맣고 오래된 여관 벽에 65년이나 걸려 있어야 하다니…. 꽃다운 청춘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희생이 된 것도 서러운데…. 가슴이 미어졌다.
역사의 구렁텅이에서 '가미카제'라는 일제의 총알받이로 나갔던 그를 누구는 친일파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울며 마지막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노래였을까.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꽃다운 청춘을 묻고, 그 영혼조차 긴 세월을 이국의 구천(九泉)에서 떠돌아야 했으니…. 암울했던 그 시대에 어찌 억울한 영혼이 그 하나뿐이랴! 울음을 삼키려 고개 숙이고 부른 그의 아리랑이 오늘도 나의 가슴을 울린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