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函

62年前 내가겪은 6.25를 回想해 봅니다

bsk5865 2012. 1. 12. 09:57

보낸사람 : 소담엔카 운영자 12.01.12 07:10

 

62年前 내가겪은 6.25를 回想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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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전 내가겪은 6.25를 회상해봅니다★

(이글은 필자가6.25전쟁 60주년을맞아 回考集에 수록된 글의 일부입니다)

 

나는 1950 6 25북한 김일성 군대불법 남침을 똑똑히 보고체험(體驗) 한바 있으며 어린 나이에 피난길에 나섰던 사람이다. 나의 이 피난살이가 어찌 나만이 겪은 고난(苦難)의 피난살이 였겠는가만, 6.25전쟁이 어떻게 발발하였는지 잘모르는 세대에게는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認識)시켜주고, 또한 일부 6.25가 북침이라느니 하는 어처구니 없는 망발(妄發)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역사의 증인(證人)이되고, 경고(警告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장황(張皇)한 글을 쓰는 바이다.

 

적치하(敵治下) 3개월반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어언 60년이란 세월! 어이 그리 무심(無心) 이 흘렀갓는고 ? 야속(野俗)한 세월(歲月)아 말이나 좀 해다오 !!

 

나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으로 38선으로부터 직선거리 1km 정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기에 “민족의 비극” (民族의悲劇) 바로그날 1950 6 25 김일성 북한군의 불법남침 (不法南侵) 사실을 내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비극적 민족상쟁(民族相爭) 와중에, 당시19세인 내가 적치하 3개월 반동안 당햇던 고초(苦楚) 뜻하지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하고 살아온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어언60년이 흘러 이제79세의 늙은이가 되었으니 ()맺힌 인고(忍苦)의 세월을 누구에게서 보상(報償)받으랴!     중략....

 

나는 의용군에 나가지 않으려고 산과 들역으로 숨어다니고 할머님께서는 손자 의용군에 끌려갈세라 노심초사(勞心焦思), 전전긍긍(轉轉兢兢) 하시던 그모습 !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은 어찌 이다지도 불행(不幸)한 세상에 태어나시어 그렇게도 고생들만 하시고 돌아가셨겟는지, 할머니는 피난나간 손자들을, 어머니는 아들을 보시지 못하시고 어찌 눈을 감으셨을까! 자꾸만 눈물이난다.      중략...

 

여하간 이것도 잠시 11월말경부터 UN군의 전세는 더욱 불리하게 되었 는지 며칠째 정찰기(偵察機) L19기가 38선상공을 계속 비행하면서 붕붕대니 민심은 점차 술렁

거리기 시작했다. "피난을 가야지" "피난 가도 소용없다" ! 의견이 분분한가운데 당시 당국인 경찰에서는 잠시 작전상 후퇴(作戰上後退)이니 며칠만 있으면 다시 수복(收復)한다고 민심을 안심 시킴으로써 나역시 이렇게생이별이 될줄은 꿈엔들 알었으랴 !

 

몇일간만 개성 사돈집에 갔다오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할머니과 어머니 께서마련 해 주시는 쌀 다섯말을, 나 세말 동생 두말씩 나누어메고 학생복 차림으로 떠나온 것이 1950 12 9일인데 고향떠난지 어언 60년이 흘렀으니 세월의 무상(無常)함이랴 !

 

 

1991년초 KBS 2TV에서 6개월간 인기리에 방영(放映)되었던 3일의 약속”의 저자 재미동포 정동규씨와 똑같이 나또한 그저 며칠있으면 돌아가려니 마음 가벼히 생각했던 것이었다.

 

 

고닯았던 핀난(避難))살이

 

집 떠나던 1950 12 9일 앞서 언급햇드시 이미 禮成江강 철교(鐵橋)는 끊어져  있었고, 자그마한 쪽배하나를 얻어탔는데 초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어느덧 강상류로 부터는 집채만한 성엣장 (얼음 덩어리)이 떠내려 오면서 뱃전을 때릴때면 아찔 아찔 겁이났으나, 사공의 기지(機智)로 요행이 예성강을 무사히 건너서 토성(土城) 해주와 토성간, 철로와 도로(토해선)의 종점인 삼거리 어귀에 이르럿으나 눈앞에 펼처진  관경은  먼지 자욱히 휘날리며 후퇴하는 UN군과 한국군의 지친모습!     중략...

 

 

그때 서울사람들이 한참 피난을 떠나는 때라서, 역시 지게를지고 끊어진 한강옆에 임시로 가설된 부교(浮橋)(고무다리라 햇음)를 건너가 서울 피난민들의 짐을영등포역 까지 운반해 주면 힘은 좀들어도 적지않은 돈벌이가 되었다. 그때 한강 부교에서 학생복 입은 지겟꾼 나말고 또 있었을까?

 

# 요즘 학생들 아마도 빈몸으로 한강에서 영등포까지 걸어가라고하면 미쳣냐?고 할것이다

 

여하간 시골에서 자라 지게라면 이골이난 나였건만 어느날의 피난짐.. 고리짝 두개를 싣고서 일어서려니 얼마나 무거웠던지! 지게작대기에 의지해 힘겹게 일어날수가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그 고릿작엔 꽤나갑진 귀중품들이 들어 있었나 보다, (60년이지난 지금까지 그 골릿작을 지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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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쩌겟는가 ? 운반해 준다고 언약을 했으니 진땀을 흘리면서 쉬고 또 쉬며 노량진을거쳐 영등포역에 이르니 이건 정말 난리더군! 기차 객실안에는 콩나물 시루 같이 옴짝달삭 할수없이 꽉꽉차고 문짝이며 기차방통 위에까지 타고 있지 않는가! 나중에 들으니 방통 위에 탓던 분들 가운데 tunnel을 지날때 기관차 (機關車)의 연기 로 인해 희생된 분도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중략...

 

1.4후퇴6.jpg

이중에는 내가지게로 운반해던 피난민 짐봇다리로 꽤나 있을것이다. 영등포역

 

나는 당시 미군부대 노무자를 알선하는 회사 “평화 공사”(平和工社)라는 인력시장(人力市場)에서 그날 그날 차출이되어 일할곳이 정해지는데, 요즘 말로하면 3D업종이었다. 인천항 부두에서 미군용 드럼통 굴려 차에싣기, 외항(外港)에 정박중인 미 수송선박까지 수륙양용 전차를 타고 포탄상자(砲彈箱子)등을 하인천역 방통차내에 적재하는일, 또 어느날은 미군이 운영하는 송도 채석장(採石場)에서 돌운반등, 막노동으로 하루 하루의 삶을 이어나갔지!.    중략....

 

밥을 지어먹을 솥이나 밥그릇이 있을리 없으니 밥은 미군깡통으로 솥을대용(代用) 했는데 밑바닥 쌀은타고 중간은 죽이고 위에는 날쌀이라... 이것이 소위 삼층밥인데 그나마 밥을 먹을수 있는것만도 다행이었다. 반찬이라야 소금이나 간장이면 족하고 어찌 어찌 된장이나 고추장이 생겨서 먹노라면 부자(富者)가된 기분이었다. 중략....

 

# 이도 잠시 나는 징집(徵集)연령이 되어 1952 6 25 소집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함으로서 기나긴 피난 살이는 일단 끝을맺고, 또다른 6.25의추억 전쟁(戰爭)터에서, 생사(生死)를건 전투(戰鬪)가 휴전 (休戰)이되는 1953년 7월27일까지 이어젓다. 중략....

 

그렇나 우리 실향민(失鄕民)들에겐 6.25전쟁 발발 60년이되는 지금까지도 전쟁(戰爭)은 끝나지 않았으며, 고향을 기리는 실행민들의 한맺힌 피난 살이역시 우리 피난 1세대들이 직접 “고향땅을 밟는 그날”이 언제 찻아올지 모르는 현실이 안타갑기만 하다. 60년을 이어온 남북대결의 끝 통일(統一)의 길은 요원(遙遠) 하기만 한데 세월(歲月)은 너무 야속하기만 하구나!.

 

# 예날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조조(曹操)의詩) 각동서문행(卻東西門行)에 이르데 "호사귀수구 고향안가망" (孤死歸首丘. 故鄕安可忘) 여우도죽을때는 태어난 언덕쪽 으로 머리를 돌리거늘, 어이 고향을 잊을 손가 ! 라 하였거늘, 나또한 어느덧 80세 산수(傘壽)을 바라보니 새삼 이 글귀가 예사(例事) 롭지가 않구나. 오늘도 예성강엔 변함없이 그 "성애짝"이 떠내려가고있겟지...

 

~ 두고온 아우들아.. 아롱거리는 산천들이여.. 무사히 있어다오! 기다려다오 ! 지난 60년의 歲月이 너무 恨스러워 눈물로 이글을 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