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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놀라운 고백 電文 **** ★★ 6.25 資 料 室
관천 조회 17 추천 0 2012.07.19. 15:04
이는 소련의 큰 실수였다는 게 衆論(중론)이었다. 소련의 유엔대사 야콥 말리크는 1950년 초부터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하였다. 대만이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아 상임 이사국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말리크가 불참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이 定說이 도전 받게 된다.
조지 워싱턴 대학 리처드 C. 소른턴 교수는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모택동과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스탈린이 미군 개입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안보리 결의 때 불참하도록 지시하였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였다. 6월27일 안보리에 미국이 유엔군 파병결의안을 제출하였을 때 소련 대사 말리크는 뉴욕에 있었다. 스웨덴 식당에서 유엔사무총장, 미국대사, 말리크 등이 점심을 함께 하였다. 食後(식후) 안보리 회의장으로 향하면서 리 총장이 말리크에게 "소련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참석하는 게 좋겠다"고 권하였다. 말리크는 "나는 가지 않겠다"고 잘랐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말리크가 했을 리는 없다.
2005년 정 창 및 존 핼리데이가 共著(공저)한 '모택동 秘話'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말리크도 상부에, 안보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허가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그를 전화로 불러내 '불참'을 지시하였다. 그는 서방군대를 (한반도로) 불러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스탈린의 電文: "한반도를 美中 대결장으로 만들 것"
최근 소련의 안보리 불참과 관련된 중요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2005년에, 러시아의 3大 국립문서보관소 중 하나인 社會政治史(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RGASPI)에서 안드레 레도프스키라는 러시아 학자에 의하여 발견된 스탈린의 편지(문서번호 fond 558, opis 11, delo 62, listy 71∼72)가 그것이다. 이 문서에 대하여 베이징大 역사학부 김동길 교수(한국인)가 논문을 썼다. 편지의 全文은 이렇다.
필리포프(스탈린)가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낸 편지: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메시지(1950년 8월27일)
고트발트에게 아래 메시지를 口頭(구두)로 전달할 것. 요구한다면 筆寫(필사)하여 줄 것.
우리는 지난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과 그 뒤의 사태전개에 대하여 고트발트 동지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안보리에 네 가지 이유로 불참하였다: 첫째, 새로운 중국과 소련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하여, 둘째, 미국이 안보리(상임이사국)에서 국민당 괴뢰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注-모택동이 이끄는) 중국의 진정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셋째, 두 강대국의 불참 때문에 안보리 결의는 정당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도록 그렇게 하였다.
나는 우리가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엮이어 들어가 군사적 名聲(명성)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서 침략자와 暴君(폭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이 한때 생각하였던 것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美 연방합중국이 極東(극동)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에게 得(득)이 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미국 정부가 極東(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로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첫째,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戰線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은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極東의 全지역을 革命化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 귀하도 이해하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할 것이냐 아니냐는 피상적으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우리는 “민주진영은 안보리에 불참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참여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는 당시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국제 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또 다시 안보리에 불참할 수도, 復歸(복귀)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지금 안보리에 복귀하였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간 것은, 미국 정부의 침략적 정책을 폭로하고, 그들이 안보리의 깃발을 이용하여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한국에 침략적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안보리에 참여하여 이를 폭로하기가 매우 쉬워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므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事案(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포프(스탈린)
미국에 ‘프리 핸드’를 주다
스탈린의 이 편지는 충격적인 고백이다. 6·25 전쟁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강요한다. 스탈린은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 불참한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면서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멋대로 더 많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한국전에 개입할 수 있도록 ‘프리 핸드’(free hand)를 주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즉 미국이 유엔군의 기치하에 한국에 참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이 편지에서 스탈린은 자신이 기획하고 일으킨 이 전쟁의 목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하나 없는 게 있다. 김일성이 전쟁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한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이다. 스탈린의 전쟁 목표엔 ‘통일’ 같은 건 들어 있지도 않다. 美軍이 한국전에 ‘묶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도록’ 만들려고 하는 스탈린에겐 김일성이 전쟁에서 이기면 안 된다. 전쟁이 오래 끌어야 하고,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北進해야 하며 그래서 중국 군대가 들어와야 한다.
스탈린의 편지를 읽으면 그가 중공군의 개입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탈린이 이 편지를 썼던 1950년 8월 하순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가 절정에 달하고,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중일 때였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거론되지 않을 때였다.
스탈린은 북한군 총공세의 실패를 예견하였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 실패하도록 유도하였을 것이다. 이는 김일성의 증언이나 소른턴 교수의 주장-스탈린이 북한군의 승리를 방해하였다는-과 부합한다.
美中 이간질이 최대 목표
스탈린은 初戰 때부터 북한군의 早期(조기)승리를 막으려 애썼다는 소른턴 교수의 과격하게 보이던 주장이 스탈린의 편지에 의하여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뒷받침 된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진격하였더라면 7월중에 전쟁을 끝냈을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소른턴 교수는 문제의 著書에서 스탈린이 이런 조기 승리를 막기 위하여 여러 수단을 썼다고 주장하였다.
스탈린은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정부가 極東(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고 했다. 스탈린은 ‘가정해보자’고 했지만 이미 중국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압박을 毛澤東(모택동)에 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파병이 결정된 직후인 1950년 7월2일 중국 周恩來(주은래) 총리는 중국주재 소련 대사 로시친을 불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모택동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인천에 경고한 방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군은 조선 사람으로 변장, 미국에 대항하는 일종의 義勇軍(의용군) 역할을 하려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미 奉天(봉천)지구에 12만 명으로 구성된 3개軍을 집결시켰다. 이들을 엄호하는 데 소련 공군이 협력해줄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북조선의 지도부는 모택동이 두 차례 경고하였음에도 미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한다.”
7월5일 스탈린은 주은래에게 電文을 보내 “우리는 공군력으로 중국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스탈린은 자신이 던진 김일성의 남침이란 미끼를 미국이 물었으므로(파병 결정) 중국을 시켜 함정에 빠진 미국을 치게 함으로써 독자노선을 가려는 모택동을 붙들어둘 수 있다고 자신하였을 것이다. 스탈린이 韓國戰(한국전)을 이용하여 美中을 이간질시킴으로써 중국을 소련진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는 데 대하여는 키신저 등 많은 연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미군이 한국전에 개입할 수 있도록 유엔 안보리에 불참. 미국과 중국을 한반도에서 싸움 붙여놓으면 우리가 편해진다." |
趙甲濟 |
소련의 유엔 안보리 불참의 미스터리
한국전쟁을 둘러싼 미스터리 중 하나는 1950년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 유엔군 파병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사건이다. 소련의 불참으로 미국이 주도한 안보리 결의안이 통과되어 유엔군이 조직되고 한국에 파병될 수 있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더라면 미국은 '유엔과 국제사회가 북한군의 남침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살릴 수 없었다. 오히려 남의 나라 내부 문제에 개입한 침략자로 몰렸을 것이다. 이 결의안 통과는 트루먼 대통령이 그 사흘 뒤 (해공군에 이어)육군까지 파병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련의 불참은 미군 파병을 도운 셈이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미스터리 중 하나는 1950년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 유엔군 파병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사건이다. 소련의 불참으로 미국이 주도한 안보리 결의안이 통과되어 유엔군이 조직되고 한국에 파병될 수 있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더라면 미국은 '유엔과 국제사회가 북한군의 남침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살릴 수 없었다. 오히려 남의 나라 내부 문제에 개입한 침략자로 몰렸을 것이다. 이 결의안 통과는 트루먼 대통령이 그 사흘 뒤 (해공군에 이어)육군까지 파병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련의 불참은 미군 파병을 도운 셈이다.
이는 소련의 큰 실수였다는 게 衆論(중론)이었다. 소련의 유엔대사 야콥 말리크는 1950년 초부터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하였다. 대만이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아 상임 이사국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말리크가 불참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이 定說이 도전 받게 된다.
조지 워싱턴 대학 리처드 C. 소른턴 교수는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모택동과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스탈린이 미군 개입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안보리 결의 때 불참하도록 지시하였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였다. 6월27일 안보리에 미국이 유엔군 파병결의안을 제출하였을 때 소련 대사 말리크는 뉴욕에 있었다. 스웨덴 식당에서 유엔사무총장, 미국대사, 말리크 등이 점심을 함께 하였다. 食後(식후) 안보리 회의장으로 향하면서 리 총장이 말리크에게 "소련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참석하는 게 좋겠다"고 권하였다. 말리크는 "나는 가지 않겠다"고 잘랐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말리크가 했을 리는 없다.
2005년 정 창 및 존 핼리데이가 共著(공저)한 '모택동 秘話'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말리크도 상부에, 안보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허가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그를 전화로 불러내 '불참'을 지시하였다. 그는 서방군대를 (한반도로) 불러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스탈린의 電文: "한반도를 美中 대결장으로 만들 것"
최근 소련의 안보리 불참과 관련된 중요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2005년에, 러시아의 3大 국립문서보관소 중 하나인 社會政治史(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RGASPI)에서 안드레 레도프스키라는 러시아 학자에 의하여 발견된 스탈린의 편지(문서번호 fond 558, opis 11, delo 62, listy 71∼72)가 그것이다. 이 문서에 대하여 베이징大 역사학부 김동길 교수(한국인)가 논문을 썼다. 편지의 全文은 이렇다.
필리포프(스탈린)가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낸 편지: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메시지(1950년 8월27일)
고트발트에게 아래 메시지를 口頭(구두)로 전달할 것. 요구한다면 筆寫(필사)하여 줄 것.
우리는 지난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과 그 뒤의 사태전개에 대하여 고트발트 동지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안보리에 네 가지 이유로 불참하였다: 첫째, 새로운 중국과 소련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하여, 둘째, 미국이 안보리(상임이사국)에서 국민당 괴뢰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注-모택동이 이끄는) 중국의 진정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셋째, 두 강대국의 불참 때문에 안보리 결의는 정당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도록 그렇게 하였다.
나는 우리가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엮이어 들어가 군사적 名聲(명성)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서 침략자와 暴君(폭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이 한때 생각하였던 것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美 연방합중국이 極東(극동)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에게 得(득)이 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미국 정부가 極東(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로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첫째,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戰線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은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極東의 全지역을 革命化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 귀하도 이해하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할 것이냐 아니냐는 피상적으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우리는 “민주진영은 안보리에 불참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참여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는 당시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국제 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또 다시 안보리에 불참할 수도, 復歸(복귀)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지금 안보리에 복귀하였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간 것은, 미국 정부의 침략적 정책을 폭로하고, 그들이 안보리의 깃발을 이용하여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한국에 침략적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안보리에 참여하여 이를 폭로하기가 매우 쉬워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므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事案(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포프(스탈린)
미국에 ‘프리 핸드’를 주다
스탈린의 이 편지는 충격적인 고백이다. 6·25 전쟁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강요한다. 스탈린은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 불참한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면서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멋대로 더 많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한국전에 개입할 수 있도록 ‘프리 핸드’(free hand)를 주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즉 미국이 유엔군의 기치하에 한국에 참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이 편지에서 스탈린은 자신이 기획하고 일으킨 이 전쟁의 목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하나 없는 게 있다. 김일성이 전쟁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한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이다. 스탈린의 전쟁 목표엔 ‘통일’ 같은 건 들어 있지도 않다. 美軍이 한국전에 ‘묶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도록’ 만들려고 하는 스탈린에겐 김일성이 전쟁에서 이기면 안 된다. 전쟁이 오래 끌어야 하고,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北進해야 하며 그래서 중국 군대가 들어와야 한다.
스탈린의 편지를 읽으면 그가 중공군의 개입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탈린이 이 편지를 썼던 1950년 8월 하순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가 절정에 달하고,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중일 때였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거론되지 않을 때였다.
스탈린은 북한군 총공세의 실패를 예견하였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 실패하도록 유도하였을 것이다. 이는 김일성의 증언이나 소른턴 교수의 주장-스탈린이 북한군의 승리를 방해하였다는-과 부합한다.
美中 이간질이 최대 목표
스탈린은 初戰 때부터 북한군의 早期(조기)승리를 막으려 애썼다는 소른턴 교수의 과격하게 보이던 주장이 스탈린의 편지에 의하여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뒷받침 된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진격하였더라면 7월중에 전쟁을 끝냈을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소른턴 교수는 문제의 著書에서 스탈린이 이런 조기 승리를 막기 위하여 여러 수단을 썼다고 주장하였다.
스탈린은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정부가 極東(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고 했다. 스탈린은 ‘가정해보자’고 했지만 이미 중국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압박을 毛澤東(모택동)에 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파병이 결정된 직후인 1950년 7월2일 중국 周恩來(주은래) 총리는 중국주재 소련 대사 로시친을 불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모택동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인천에 경고한 방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군은 조선 사람으로 변장, 미국에 대항하는 일종의 義勇軍(의용군) 역할을 하려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미 奉天(봉천)지구에 12만 명으로 구성된 3개軍을 집결시켰다. 이들을 엄호하는 데 소련 공군이 협력해줄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북조선의 지도부는 모택동이 두 차례 경고하였음에도 미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한다.”
7월5일 스탈린은 주은래에게 電文을 보내 “우리는 공군력으로 중국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스탈린은 자신이 던진 김일성의 남침이란 미끼를 미국이 물었으므로(파병 결정) 중국을 시켜 함정에 빠진 미국을 치게 함으로써 독자노선을 가려는 모택동을 붙들어둘 수 있다고 자신하였을 것이다. 스탈린이 韓國戰(한국전)을 이용하여 美中을 이간질시킴으로써 중국을 소련진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는 데 대하여는 키신저 등 많은 연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 2012-07-18, 0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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