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函

[南侵62周] 이 民族과 나라를 지켜준 한 外国人 !

bsk5865 2012. 10. 11. 09:54

보낸사람 : 엔카 컴나라 운영자 12.10.11 02:26

 

이 民族과 나라를 지켜준 한 外国人 ! * (받은 메일 中에서 ) |◈...자 유 게 시 판

chkms |  http://cafe.daum.net/yooin32/6rkh/24050 

 

 

이 민족과 나라를 지켜준 한 외국인 ! 

그 는 누구인가 ? 

 

2012년은 6.25 南侵 62주년이다.

  

6.25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駐韓美軍이 철수하고- 韓美동맹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美國은 연150만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 우리를 구해주었던가?

 

美 군부는 <한국은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곳>으로 판단하고 주한미군을

1년전에 철수시켰었다.

 

그런데 왜 軍隊를 다시 보내 5만4000을 죽게 하는 血戰을 벌인 끝에 '알지도 하는

조그만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 을 공산침략으로부터 구출했던가?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 

 

우리 역사상 한민족 전체의 운명이 단 한 사람의 외국인에 의해 결정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맥아더 장군이라고?  

아니다,

맥아더를 한국 戰線으로 보낸, 즉 美軍의 참전을 결단했던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다.

 

 6월24일 미조리 인디펜던스

1950년 6월24일 트루먼 대통령(당시 66세)은 週末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을때...

딘 애치슨국무장관이 걸어온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UN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설에 의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트루먼은 전화를 받고 돌아오면서 매우 격앙되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한다.

3차大戰의 서막이 오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는것 같았다고 한다

 

정오 직전-무초 대사가 보낸 電報가 그에게 건네졌다.

<공격의 양상으로 보아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임이 분명해졌다>

그는 ...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트루먼은 말했다.

“하나님께 맹세코 그 자들이  代價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러스크 국무차관은 “5년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국으로서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이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匕首(비수)가 될 것이다”고 했다.

 

셔먼 해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해공군만으로도  남침을 저지할수

있다면서 육군의 투입을 반대했다

 

트루먼은 -도쿄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최대한 빨리 한국측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할 것,

미 공군력의 엄호 아래   駐韓美國人을 철수시킬 것.

 

제7함대는 필리핀으로부터 대만 해협으로 전개하여 중국의 공격에 대비할 것 등..

이날 회의는 미군을 사용한  한국 방어를 결의하고 밤 11시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빠져 나갔고, 대통령은 함구령을 내렸다

 

“육군도 보내라” 다음날(서울 6월26일, 워싱턴 6월25일) 트루먼 대통령은. 

두 번째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전 개입 결정이 공식화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을 돕기 위해 海, 空軍力을 사용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다음날은 .-6월27일- 북한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뉴스가 일제히 나갔다

 

오전 11시30분 의회 지도자들,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40명의 요인들이

백악관 西館 각료실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트루먼은 -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전쟁을 지도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의회가 --별도로-- 전쟁 결의안을 낼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上下院 합동회의도 이날 315 대 4의 압도적 표차로 징병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결의 했다.

 

 UN 안보리는. 1950년 6월30일 새벽 3시 美 국방부는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의

電文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해공군뿐 아니라- 육군이 투입되야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타이밍이 핵심이다

 지체 없는 명확한 결정을 바란다.

"프랑크 페이스 육군장관이 백악관으로 전화 건 시각은 새벽 4시47분... 페이스 장관은

맥아더가 우선 2개 사단의 투입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트루먼 그는 한국으로   지상군을 파병하는 결정 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일본에 원자탄 투하하는 결정보다도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모택동 무슨 짓을 할까, 러시아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라고 썼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결정하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파병된다

3년간 戰場에서 -5만명이 죽고 -10만명 이상이 다쳤다

 

우리 역사상 한국인의 운명이 외국인 단 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이 경우가

처음이었다

당시 美軍部는, -한국은- 미국이 싸워서까지 보호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이란

판단을 내려 놓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의 파병 결정은 극히 예외적인 조치였다

 

그는 陸士에 들어가고 싶어 했었다. 1차 대전이 터지자 -나쁜 視力을 속이고

자원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포병장교로 용감히 싸웠다. 

 

그런 트루먼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른다는 19세 이상 成人 인구가 15%, 약500만명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트루먼을 기억하게 하는- 공원 이름이나 거리 이름이 없다

 

트루먼 동상은 -판문점 근방- 잘 안 보이는 곳에 하나가 있을 뿐이다

 

서울 번화가나 -대형공원에 동상을 건립하고- 트루먼 거리 하나쯤 명명하여 그분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에 늦고 작으나마- 오래오래 기렸으면 합니다

본 내용에 대하여 -많은 분들께 알리는것도- 애국의 길이요  보은의 일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