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養常識函

[日人團結親切] 일본인의 단결심과 친절성의 유래

bsk5865 2012. 9. 26. 20:52

보낸사람 : 이정기 12.09.26 17:25

 

일본인의 단결심과 친절성의 유래

 

조선이 당쟁과 쇄국으로 일관할때 일본은 개항과 통상으로 서구과학문물에 신속히 접하여 아시아에서 기회선점을 하여 세계열강에 진입했다.

 
명치유신(明治維新) 협화(協和)

2011/10/1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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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유신(明治維新)

 19세기 후반 봉건체제인 에도 바쿠후(강호막부 또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천황 친정체제로 중앙집권 통일국가를 이루어 아시아 최초로 서양문물을 도입하여 일본자본주의 근대화의 기점이 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의 과정을 말한다.

*명치유신을 간략하면

1.메이지 유신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1853~1889년으로 잡는다. 에도막부말기인 1853년에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구로후네)을 이끌고 와서 개항을 요구하게 됩니다.
2.막부의 다이로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개항의 필요성을 느끼고 1854년 덴노와 조정의 윤허없이 독단적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게 됩니다.

3.막부가 조정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처리를 진행한것과 외세에 굴복하여 불평등조약의 개항을 하게된 이 두가지로 인하여 264년간의 에도막부(도쿠가와 막부)에 반기를 든 서남단의 조그만 두 한이 존왕양이(왕을 섬기며 서양을 배척함:조선의 쇄국정책과 동일)를 내걸고 반막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원래 존왕은 막부도 전통적으로 왕을 섬겨왔으므로 반란의 명분이 존왕으로는 부족하므로 양이를 덛붙인것입니다. 

4.이이나오스케는  세이 대옥일으켜 1859년 존왕양이파의 지도자 요시다 쇼인 등 100여명을 처형해버리니 이로서 반막부 운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됩니다.
5.1860년 3월에 이이 나오스케가 에도성 사쿠라다문 앞에서 암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존왕양이파를 중심으로 하는 도막파와 막부 간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6.1862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교토에 상경하게 되면서 이를 호위하기 위한 낭인 집단이 구성되는데 이 중에 일부가 신센구미(신선조)의 모태가 되기도 합니다.
7.존왕양이파의 대표적인 한(번)은 사쓰마한과 조슈한으로 초반에는 조슈세력이 덴노의 지지에 힘을 얻어 막부세력과 대결을 펼쳤으나 조슈의 독주를 경계한 사쓰마가 막부세력에 붙으면서 1864년에 금문의 변 사건이 발생하여 조슈세력은 교토에서 축출당하게 되었고 1차 조슈정벌로까지 이어집니다.
8.이로써 막부 세력이 우세해지는듯 했지만 서로 사이가 나빴던 사쓰마한과 조슈한이 도사한의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동맹을 맺어 삿쵸(사쓰마-조슈)동맹이 성립되면서 상황은 역전되기에 이릅니다.
9.한편 사쓰마한은 가고시마만에서 1863년 사쓰에이 전쟁(사쓰마 vs 영국함대)을 일으켜 패하고(영국은 막부를 멀리하고 사쓰마와 친해지지만),

10.조슈는 1864년의 시모노세키포격사건(조슈 vs 4개국 연합함대)을 일으켜 패전을 겪으면서 서양의 과학무기에 역부족을 느끼고  이전까지의 양이를 버리고 친이(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드림)개항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11.결국 사쓰에이,시모노세키의 두 전쟁에 패하고 나서야 서양에 굴복하여 전항1.2.와 같이 막부의 이이나오스케의 페리제독과의 독단적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동의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12.막부의 다이로 이이나오스케가 덴노의 조정을 거치지않고 불평등조약을 독단적으로 체결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부하가 상사에게 264년만에 반기를 든것인데 문호개방,서양과학문물도입의 선각자적 개념은 막부가 먼저 가진것이었으나 권력탈취의 일종의 어이없는 쿠데타적성격을 남쪽 두 한이 일으킨 셈입니다.

13.당연히 상사인 도쿠가와 막부는 일개 부하인 서남단의 조그만 두 한을 괴멸시키고자 했으나 평소부터 왕실에 공물을 바치고 친숙하게 지내와서 왕의 신임을 받은 두 한은 일찍부터 지리적으로 서양해상항로의 접안 항구에 위치하여 서구문물을 가장먼저 접하는 시대감각의 선지적 영향도 있었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굴복한 도자마 다이묘에 속한 사쓰마한과 조슈한은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차별을 받았다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는데 마침내 불평등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조정과 왕의 칙허없이 독단적으로 했다는 구실을 내세워 반기를 든  두 한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264년의 장기집권반항에다가 천왕도 원래의 왕권을 더욱 강건하게 세워주겠다는 두 한의 신하가 생겨났으니 반겨 맞이하게 된것입니다. 막부는 왕의 마음이 자기로 부터 벗어났고 전국적인 도막세력의 확산에 당해내기가 역부족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정부인 막부에 반기를 드는 역적을 두고 볼수가 없어 극악무도한 막부친위세력인 신센구미가 생겨났으니 이가 바로 애국투사의 정신으로 찬사를 받는 전통적 역사 가치관과 문학적소재가 된것입니다. 

14.말하자면 지금까지 정식정부인 도쿠가와 막부에게 대항해오는 서 남단의 조그만 두 한에게 다이로 이이나오스케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두 한의 반란인사 100여명을 처형하게 되니 264년 막부집권에 반기를 든 두 한에게 전국적으로 한(번)들이 동조를 하여 전쟁에 가담하게 되니 이가 바로 보신센소(무진전쟁)입니다. 결국 막부군이 패하여 신정부군(반란군)의 전사자만 7751위를 배향했습니다.

15.또한 무사(사무라이)들의 특권을 전부 뺐으려는 신 정부군에 무사들이 항의하여 일으킨 전쟁이 세이난센소(서남전쟁)입니다.

서남전쟁은

1)신정부군 병력7만명,사망6400명.

2)신정부군에 반기를 무사들인 반란군(이제는 상황이 역전)의 구 사쓰마번 무사병력3만명,사망6800명.

3)정부의 세이난센소 군사비는 4100만엔으로 당시의 세수는 4800만엔이었으니까 그 규모를 알수있는데 이로 인해 대 인플레션이 발생했습니다.

16.이렇게 세 차례의 진통을 겪는데 이가 바로 앞뒤가 뒤바뀌는 주객전도의 변환시대가 된것입니다. 말하자면 왕의 신임을 얻은 반란군은 존왕양이의 기치로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존왕친이로 급선회(즉 급선회한 정책은 막부가 선시행한 동일정책임)하였다. 권력장악의 수단은 유치하였으나 일본근대화의 뜻은 웅대하여 신속히 실천에 옮기는 실행력이 대단하여 왕권복위, 입헌군주, 중앙집권, 세제와 군제일원화,재벌탄생,자본주의발전,서양식교육도입을 눈부시게 빨리 추진한것이 명치유신의 성공으로 이루어져 일본발전의 일대 도약의 서막이 펼쳐지게 된것입니다.

*보신센소(무진전쟁) 이야기
북해도 항구 하코다테는 개항시절부터 참으로 이야기가 가득한 곳이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고료카쿠공원이다. 이곳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북방의 수비를 견고히 하기위해 축조한 일본 최초의 서양식 성곽이 있다. '고료카쿠'는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막부가 만든 5각형의 성곽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막부종말의 종지부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보신전쟁의 4차전인 하코다테전쟁은 막부군의 1천여명의 무사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기 때문이다. 막부가 무너지고 유신시대에 돌입하는 배경인 셈이다.공원에는 지금도 오각형의 형상을 한 성곽터가 그대로 남아 있고, 각 계절을 장식하는 수목들이 가득한 고료카쿠공원으로 모습을 바꾸어 하코다테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공원 내의 전망타워인 '고료카쿠타워'에서는(최대높이 107m)오각형의 공원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시설로 하코다테 전쟁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무진전쟁(戊辰戦争:보신센소)에서 존왕파(尊王派)인 정부군의사쓰마한(藩:살마번)조슈한(長州藩:장주번)출신의 번사(藩士)들이 주체가 되어 명치유신을 성공적으로 주도했으며,일본제국이 천황의 지위를 확립하는 중앙집권 입헌군주국이 되고,또한 이 전쟁에서 전사한 정부군 전사자 7,751위는 배향되었다.

 

하고다테전쟁에서 불리한 여건으로  항전을 거듭하던 막부군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결전을 앞두고 정부군 사령관인 구로다 기요타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해상 국제법’이라는 귀중한 책을 보내면서 이 책은 일본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책으로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때 꼭 필요한 책이니 부디 잘 보관하기를 부탁하면서 결전에 임하게 되었다. 구로다는 죽음을 앞두고도 일본의 장래를 걱정하며 귀중한 책을 보내준 에노모토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새로운 일본건설을 위해 같이 일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다.

에노모토는 항전을 하다가 구로다에게 항복을 하게 됐다. 전쟁에서 패한 수장은 할복 자살하는 것이 일본의 전통이지만 에노모토는 이를 택하지 않고 구차하더라도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생존의 길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에노모토는 감옥에 수감된 죄인이 되었고 구로다는 의롭게 맺은 우정을 살려 에노모토 구명운동을 펼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석학 후꾸자와 유키치구로다의 구명운동에 동참하여 일본정부를 설득하였으며 이로 인해 3년후 에노모토는 석방되어 일본 근대화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에노모토구로다와 함께 홋카이도 개척에 힘쓰다가 구로다의 천거로 초대 러시아 공사로 발탁되었다. 에노모토가 러시아에 체류한 4년 동안 러시아의 실체를 조사해서 일본정부에 수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그의 이같은 정보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에노모토는 러시아에 있으면서도 조선정책에 관심을 갖고 조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자신의 제자이면서 직속부하인 하나부사 요시모토 서기관에게 전수시켰다. 그는 하나부사를 초대 조선공사로 추천했고, 하나부사는 6년동안 외교적 능력을 발휘해서 일본의 조선 침략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구로다 기요다카는 1875년 강화도 앞바다에 일본군함 운양호를 몰고 와서 무력시위를 벌인 후에 조선정부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다. 후일에 총리대신까지 되었지만 그는 평생을 홋카이도 개발에 전념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구로다는 60세 되던 해에 사망했는데 장례위원장은 그를 은인겸 친구로 사랑했던 에노모토였다. 하코다테 전쟁의 두 주인공이 조선침략의 원흉이 된셈이다.

 

#두 내란의 전쟁에서 존왕파(尊王派)가 승리하여, 전후(戰後)에 사쓰마한(藩:살마번)과 조슈한(長州藩:장주번)출신의 번사(藩士)들이 주체가 되어 메이지이싱(명치유신)을 성공적으로 주도했으며, 일본이 천황의 지위를 확립하는 중앙 집권국가가 된후 청일,러일전쟁승리로 일본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완성하여  한일합방으로 조선을, 타이완(대만)과 베트남을 장악  만주사변으로 청나라를 점령하고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장악한후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걸고 진주만을 선제공격하였으나 패전하고말았다.

명치유신초기에

때  덴노(천황)도 서양은 싫다는 뜻을 비쳐 양이(서구배척)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두 전쟁에 패한 후로는 덴노도 두 한의 이중적인 면모인 존왕친이로 급선회한 왕정복고 친서구 과학문물도입 개항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결국 양이(서양 배척)는 막부타도구실에 불과했고, 막부타도가 실현된 후로는 친이(친서양)으로 돌아섰는데, 친이는 막부와 동일한 정책입니다.(후세의 역사평가는 개항으로 통상을 서둘러 서양과학문물 도입의 신속한 실천력과 아시아지역 기회의 선점과 부국강병의 추진력에 있어서 구세력과 신세력간의 역동력의 차이로서 신세력이 왕의 지지를 얻어 왕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근대화를 신속히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강력한 삿쵸동맹의 압박과 막부 세력의 쇠퇴를 느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막부의 일본 통치권을 천황에게 되돌려 준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여기서 막부는 반란군에 항복을 한 셈이며, 요시노부는 신정부가 구성되더라도 자신이 그 중심에 서서 실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한가닥 희망을 가졌지만 신정부가 구성된 후에는 반란군은 요시노부를 비롯한 막부 세력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신정부군과 막부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위에 언급한 보신센소(무진전:1868~1869년)이라고 하며 신무기로 무장한 메이지 신정부군에 의해 막부군은 패퇴하여 결국 쇼군 요시노부는 에도를 넘겨주는 대신 신정부군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요시노부는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막부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를 메이지 유신이라고 하며 서구문물도입으로 부국 강병책이 일약 실현되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일대 단결의 장으로 총집결하게 되어 단결심이 강하고 친절한 국민성의 오늘에 이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