過去資料函
보낸사람: 소담 엔카 운영자 13.02.03 15:34
朝鮮王陵의 10가지 秘密(비밀)★|★....일반 게시판
★朝鮮王陵의 10가지 秘密(비밀)★
조선왕릉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다.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선왕릉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10가지를 들여다본다.1. 조선왕릉은 왜 서울 경기에 몰려 있을까?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 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다.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 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2. 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조선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 혔다.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 기 때문이다.3. 조선왕릉 은 왜 거의 도굴이 안 을까?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 이 없다.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 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 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4. 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 못한 까닭은?왕릉은 당대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중종의 두 번째 계비 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하지만 문정왕 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 이다.5. 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 인 셈.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6. 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중종 시대 (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이 아닌가.전문가 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다고 말한다.7. 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해 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 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 으로 간다고 생각했다.8. 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왕릉에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다.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으뜸 을 뜻했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시) 봉분에 는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가져왔 다고 한다.9.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황제릉?고종은 1897년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대한제국)라고 선포했다.경기 남양주시 홍 릉과 유릉은 황제릉으로 조성됐다.홍·유릉은 정자각(평면이 '丁'자 모양) 대신 중국 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능의 석물도 코끼리, 낙타 같은 낯 선 동물을 배치했다.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반면 홍·유릉의 석물은 황 제의 위용을 드러낸다.10. 서삼릉에는 왕족의 공동묘지가 있다?세 왕릉이 있는 서삼릉(고양시)에는 왕자, 공주, 후궁의 작은 묘 46기가 모여 있어 공 동묘지를 연상시킨다.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도시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묘와 원(왕 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들이 서삼릉으로 쫓겨 왔다.'공동묘지' 옆에는 왕족의 탯줄 을 보관하는 태실 54기도 있다.원래 태실은 전국의 명소에 묻었는데 일제가 서삼릉으 로 몰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