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養常識函

李承晩의 통쾌한 공산주의 이론 비판

bsk5865 2013. 4. 29. 19:15

보낸사람 : 노을05 운영자 13.04.29 14:29

 

李承晩의 통쾌한 공산주의 이론 비판 ****

 

李承晩의 통쾌한 공산주의 이론 비판

공산주의의 악마성과 사기성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 建國 대통령이 되었으므로 오늘의 한국이 있다!

趙甲濟    

*아래 글은 建國 대통령 李承晩이 1923년,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발행했던 <태평양 잡지>에 게재한 논문이다. 1917년 레닌의 공산혁명 이후 全세계 정치인, 지식인들이 '러시아의 유토피아'를 찬양할 당시,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공산당의 當不當'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유평등주의자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무조건 반대한 것이 아니고 '합당한 것과 부당한 것' '옳고 그른 것'을 간결하면서 정확하게 지적한다. 공산정권 등장 6년째에 발표한 이 논문으로 이승만은 서방진영 최초로 공산주의 모순을 분석, 그 종말을 예고하는 비판자가 되었다. 당시 언어생활의 어법과 문체 등 사료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原文 그대로 전재한다.(뉴데일리 편집자)

原文: <1.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이라. 모든 사람의 재산을, 토지 건축 등 모든 부동산까지 다 합하여다가 평균히 나누어 차지하게 하자 함이니, 이것을 가난한 사람은 물론 환영하겠지마는, 토지를 평균히 나누어 맡긴 후에 게으른 사람들이 농사를 아니하든지 일을 아니하든지 하야 토지를 다 버리게 되면 어찌 하겠느뇨. 부지런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야 게으른 가난장이를 먹이어야 될 것이오, 이 가난장이는 차차 수효가 늘어서 장차는 저마다 일 아니하고 얻어먹으려는 자가 國中에 가득 할 것이며...>

   필자의 해설: 李承晩은 공산주의가 私有재산을 부정하고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책이 결국은 萬人의 가난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경쟁과 차등이 없어지면 인간은 게을러진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이들을 부양해야 한다. 無爲徒食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나라는 가난해지고 생산물이 줄어들어 나눠 먹을 것도 없게 된다. 오늘의 북한을 90년 전에 예언한 글이다. 그것도 아주 쉬운 말로써. 이게 天才의 특징이다. 李 박사는 인간의 본성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로 건국한 다음 국민들에게 자율과 경쟁과 책임의식을 가르치려 하였다.

原文: <2. 자본가(資本家)를 없이하자 함이라.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하여다가 공동히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의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히려니와, 재정가(財政家)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되기 어려우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利用 厚生하는 모든 물건이 다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開明이 중지될지라. 자본을 철폐하기는 어려우리니, 새 법률로 제정하야 노동과 평등 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나을 터이며...>

   해설: 공산당식으로 자본가를 없애면 경쟁이 사라져 기업이 발달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商工業 발전의 길이 막히고, 사람의 지혜도 써 먹을 데가 없어지며, 기계와 도구와 상품을 제대로 만들 수 없어 물질적 풍요를 이룰 수가 없다. 자본가를 없애지 말고 노동세력에 자본가와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게 더 낫다.

原文: <3.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이니, 모든 인민의 보통 상식 정도를 높여서 지금에 학식으로 양반 노릇하는 사람들과 비등하게 되자 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은 불가능하며, 4.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이라 자고로 종교단체가 공고히 조직되어 그 안에 인류계급도 있고, 토지 소유권도 많으며, 이 속에서 인민압제의 학대를 많이 하였나니, 모든 舊敎 숭배하던 나라에서는 이 폐해를 다 알지라. 그러나 지금 새 교회의 제도는 이런 폐단도 없고 겸하야 평등 자유의 사상이 본래 열교[裂敎:改新敎] 확장되는 중에서 발전된 것이라. 교회 조직을 없이하는 날은 인류 덕의상 손해가 다대할 것이며...>

   해설: 지식계급을 없애면 無識者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일반 국민들을 교육하여 지배층 비슷한 수준으로 올려야지 지식계급을 없애서 계급차별을 해소하겠다는 생각은 下策이다. 천주교가 권력을 잡고 사람들을 착취한 과거에 너무 얽매어서 종교를 없애자는 주장도 短見이다. 改新敎는 평등과 자유 사상을 발전시킨다. 그런 교회를 없애는 것은 인류의 도덕 발전에 큰 손해를 끼친다.

原文: <5.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 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이라.
이에 대하야는 공산당 속에서도 이론이 많을 뿐더러 지금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아라사(러시아)로만 보아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라 더 설명을 요구치 않거니와,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하야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하고 총과 창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韓人은 일심 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야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敵國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 다 밀리어네어(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 우리 韓族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우리는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해설: 공산주의는 계급을 국가보다 우선시한다. 계급을 대표하는 黨이 국가 위에 군림한다. 공산주의의 이 국제주의를 이승만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다. 나라를 잃은 민족이 나라를 되찾아 자주독립국을 만들려 하는데 그런 국가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민족의 염원에 찬물을 끼얹는 민족반역질이란 지적이다. 국가주의를 버려서 백만장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독립, 즉 광복사업에 도움이 되면 공산당이라도 좋지만 방해가 되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공산주의자들의 계급우선은 국가를 부정하고 애국심을 말살하며 반드시 事大主義와 민족반역으로 흐른다는 것을 간파한 名言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깃발을 계급주의가 아니라 애국주의 위에 꽂은 분이다. 공산주의의 악마성과 사기성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 建國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자유의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오늘의 한국과 우리가 있다!
[ 2013-04-28, 20:13 ]

 李承晩, 공산당을 절대惡으로 보다!

 
趙甲濟    
 
공산당의 선동을 이긴 李承晩(이승만)의 선동: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 매국노, 사대주의자, 거짓선동가, 분열주의자, 소련 간첩단, 私利私慾(사리자욕)주의자, 文明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1945년 12월19일 저녁 7시30분 李承晩은 서울중앙방송국(KBS)을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때 李 박사는 모든 정당과 政派(정파)를 통합한 汎國民 조직으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李 박사는 이 일을 방해하는, 朴憲永이 이끄는 공산당을 지목, 결별 선언을 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대중 조직이 가장 강하였다. 30여년 만에 귀국한 李承晩은 카리스마는 있었으나 直系(직계) 조직은 없었다. 하지 사령관의 美軍政 당국도 공산당을 建國 과정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일종의 左右합작 노선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도 아직은 對蘇(대소) 봉쇄정책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이런 가운데 李承晩은 이 역사적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 매국노, 사대주의자, 거짓선동가, 분열주의자, 소련 간첩단, 私利私慾(사리자욕)주의자, 文明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므로 국가 건설과정에서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연설은 아마도 국가 지도자가 한, 공산당에 대한 2차 대전 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일 것이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은)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他國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爲主(위주)하는 자”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國權을 없이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私利와 영광을 위하여 부언낭설로 인민을 속이며, 徒黨(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器(군기)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名詞(명사)를 조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世人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더니,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奸計(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私慾(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李承晩은 선전 선동 부분에서 공산당에 결코 지지 않는 戰略과 기술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소련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形容(형용)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가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李 박사는 박헌영 김일성이 이끌던 남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이 자들이 스탈린의 졸개로서 소련을 위하여 봉사하는 賣國奴(매국노)들이란 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폭로한 정치인은 해방공간에서 오로지 李承晩 한 분뿐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한국 사람의 形容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 가” 소련에 갖다 바치려는 반역자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소련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들이란 지적이었다.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得勢(득세)하던 시절에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인데, 적중한 예언이기도 하다. 68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한 분석이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즉 從北(종북)세력은 민주투사나 한국인의 形容을 하고 있으나 賣國奴 김정일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세력인 것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먼저 그 사람들을 誨諭(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따라 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함께 나아갈 것이오…” 

   거짓선동엔 진실의 햇볕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변할 수 없는 공산주의 골수분자들이 아니라 附和雷同(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았다.

   李承晩(이승만)은 교정이 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은 ‘親父兄(친부형) 親子姪(친자질)이라도 원수로 대우해야 한다. 大義를 위해서는 愛憎(애증)과 親疎(친소)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고 못 박았다. 이른바 大義滅親(대의멸친)의 정신이다. 그는 이어서 공산주의자들을 파괴자, 민족주의자들을 건설자로 규정하였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된다.” 

   李 박사는 끝으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뉘어져서 동족상쟁의 禍(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우리가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 노릇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 

   이 연설은 70세 老鬪士(노투사)의 위대한 先制공격이었다. 급소를 얻어맞은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長文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선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李承晩이 공산당을 賣國세력으로 규정한 지 1주일이 지난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分局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反託, 좌익 주도의 贊託 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李承晩-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先制공격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李承晩의 공산주의자 배격 연설은 한반도 정세를 賣國者와 愛國者, 파괴자와 건설자, 敵과 동지, 善과 惡으로 가른 역사의 分水嶺(분수령)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그 연설의 결과물이다. 李 박사는 공산주의를 절대악으로 보았다. 그는 공산당을 콜레라에 비유, "인간은 콜레라와 동거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정은과 종북세력을 이기는 비결은 무덤 속의 이승만이 갖고 있다. "저들은 惡이요, 敵이요, 위협이니 없이 하라"는 충고가 그것이다. 李 박사는 박정희와 함께 대한민국의 守護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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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판 게티스버그 연설
 
해방후 最高의 연설은 1948년 8월15일 건국 선포일 연설

요약: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義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民權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政體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民權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정부에서 가장 전력(專力)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국제通商과 공업을 발전시킬 것입니다. 농장과 공장의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에게 없는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을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義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요 우리 친우들이 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들여다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추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삼십년 전부터 결정하고 실행하여 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人民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2) 民權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政體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하여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여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아서 다만 말과 행동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절대로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활동과 자유판단력을 위해서 쉬지 않고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自來로 저희 나라의 전제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속으로 민주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 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습관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가 삼십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3)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숭히 하며 한도 내에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든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계급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계단을 밟아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하여 위험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자유권리를 사용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러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 하며 남의 이론을 참고하는 원칙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是非와 善惡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不義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4)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에서는 공고하며 밖에서는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들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하는 것입니다. 이 정부의 法的 조직은 외국 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全國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시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와 參政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반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이 받아들여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에 불복하거나 (정부를)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나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도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民權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5) 정부에서 가장 전력(專力)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의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런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通商과 공업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를 따라 발전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생활정도를 상당히 향상시키려면 모든 공업의 발전을 꾀하며 우리 농장과 공장의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에게 없는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서로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悖·두가지 일을 한꺼번에 치러도 사리에 틀리거나 어그러짐이 없음)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들을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경영자들을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 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계급전쟁을 피하여 全민족의 和同을 도모하나니, 우리의 화동과 단체성은 우리 앞에 달린 國旗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상고적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의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를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본질과 확신, 자유의 신성함과 한계, 국가와 국민의 의무, 노동자와 농민 구제의 필요성, 공업과 수출진흥에 대한 비전 등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밝힌 위대한 연설이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연설이다. 경이로운 것은 대한민국이 대체로 그가 제시한 그 길을 갔다는 점이다. 예언적 연설이다. 이 연설 가운데서 최고의 名言은,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義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일 것이다. 미국에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 있다면 한국엔 李承晩의 建國연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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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장관에게 털어놓은 李承晩의 놀라운 술회
  "러시아는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다. 일본은 다르다. 일본이 장사를 가장하여 다시 몰려올 때 당신네 친일파들이 나서서 나라를 지켜야 해."
   
  1951년 초 李承晩 대통령은 日帝 총독부 관료 출신인 任文桓(임문환) 씨를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任씨는 차관엔 일본 고등문관 시험 同期인 李泰鎔씨를 임명하였다. 任씨는 국회에 인사차 갔다. 국회는 그가 親日派라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국회에서 돌아온 그를 李 대통령이 불렀다. 任씨는 회고록에서 가까이서 본 李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였다.
<老志士라기보다는 百獸(백수)를 호령하는 老獅子(노사자)의 인상이었다. 위엄이 몸에 붙은, 鐵의 의지를 가진 達人이었다. 가까이 가면 나보다 키가 작아 보였는데, 떨어져서 보면 뼈대가 굵어 백발의 몸이 나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악수를 해보니 굵은 손아귀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듯하였다.> 

   대통령이 물었다. 

   "君은 오늘 국회에 갔다가 인사를 거절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친일파라고 거절 당하였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차관까지 친일파를 임명, 世風을 거스르겠다는 건 신중하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세요. 李泰鎔은, 姓名을 보니 우리 집안인 듯한데, 그건 별개 문제요."

   그런 말을 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손자를 타이르는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任 장관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얼굴로 돌아온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정부는 하와이에 있는 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해. 그러나 그런 개인문제는 옛날에 잊었어요. 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그러나, 공산당이기 때문에 어떻든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알고 주의만 하면 되어요. 일본은 다릅니다.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본 일본은 산 꼭대기까지 저수지를 만들고, 비탈도 논이었습니다. 밤에 지날 때 내려다 보니 전등불이 끊어지지 않고 산과 평야에 이어졌어. 저렇게 좁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오래는 잘 살 수가 없어. 머지 않아 장사나 무엇이든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 親日派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일단 自重하시고, 시험대에 오른 君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데 전념하셔야 해요." 

   任 장관은 '놀라운 술회였다'고 썼다. 

   <그때 謹嚴(근엄)하기 짝이 없던 노인의 자세와, 저 멀리 바라보던 노인의 眼光은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일본인과의 대결에 親日派의 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日帝시절 그들이 맡았던 곡예사로서의 努苦를 알아준 부탁이 아닌가? 친일파를 일본의 개(犬)라고 보았다면 일본인이 다시 올 때 그들이 原주인에게 다시 꼬리를 흔들 것이 분명하므로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다.>

   滿軍 장교 출신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日帝 관료-군인 출신들을 요직에 등용, 경제개발과 국가 근대화 사업을 맡긴다. 이들이 일본을 줏대 있게 잘 다루고 일본도 이들을 믿고 한국을 도왔다. 李 대통령의 예언대로 知日派로 변신한 親日派 출신들이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지 않고 발전시키는 데 중심이 되었다. 앞으로 4년이면 한국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능가한다고 한다(IMF 예측). 식민지였던 나라가 宗主國을 따라 잡는 것이다.

   任文桓 씨처럼 식민지 관료 생활을 하면서 日帝와 동포 사이에서 곡예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고생을 기억함과 동시에 이들이 그때 익힌 기술을 국가 발전에 쓸 수 있도록 도와준 李承晩과 朴正熙의 위대한 안목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李 대통령이 소련은 공산주의를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의하여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무초 미국 대사는 李 대통령을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한 분"이라고 극찬하였는데, 이념적이고 신앙적인 확신이 세계사의 흐름을 장악하게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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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초 대사의 李承晩 격찬: "그는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李承晩이 독립운동과 建國期에 민족의 지도자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한국은 공산화되어 우리는 지금 김정은 治下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李 대통령은 독립운동기엔 좌익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했고(金九와 함께), 건국기엔 미국의 左右합작 움직임과 공산당 세력의 선동을 저지하고 反共자유민주 국가를 건설했다. 萬難을 무릅쓰고 이 일을 해내도록 그를 몰아붙인 힘은 이념적 확신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콜레라균 정도로 보고 자유민주주의를 민족의 희망, 미국과의 동맹을 국가의 생명줄이라고 믿었다. 당시는 東西 이념전쟁, 즉 냉전이 시작된 시기였다. 이념이 가장 큰 전략이라는 말이 李承晩에게 해당된다. 李 대통령의 뛰어난 세계정세觀은 이념적 自覺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당시 駐韓 미국대사 무초의 이승만 평이 재미 있다.

   "李 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한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되면 그는 독립투사 시절의 본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 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습니다. 그는 '제퍼슨식 민주주의자'임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 부인(注: 프란체스카 여사)이 그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초의 평 중에서 '그는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라는 말은 미국의 프로 외교관이 약소국의 지도자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李承晩은 韓民族史上 2大 외교관이다. 羅唐연합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金春秋와 韓美동맹으로 자유통일의 기반을 만든 李承晩. 이승만, 박정희, 트루먼, 레이건, 대처 같은 이념형 지도자는 국가 대전략을 구사할 줄 안다. 그들은 확고한 이념과 전략을 바탕으로 외교, 안보, 법치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여 그 속에서 경제가 잘 되도록 유도한다. 

   東西냉전의 핵심은 이념대결이었다. 마가렛 대처는 '서양이 냉전에서 이겼다는 의미는 진실, 정의, 자유를 지켜냈다는 뜻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냉전은 가치관의 싸뭉이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선 아직도 그 이념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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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확보한 결단: 평화선 선언

   6.25 남침을 당하여 死活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도 李承晩 대통령은 동해의 한 가운데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어업자원을 보호하고 獨島 영유권을 확보했다.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선박에 총격을 해가면서까지 나포했다. 평화선을 침범한 중공선박과 교전하기도 했다. 독도와 평화선은 피로써 지켜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1952년 2월4일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 선장이 사망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韓日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했다.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기도 했다. 

   1955년 12월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 한국 경찰관 네 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60년 1월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무력으로써만 평화선을 지켜낸 것이 아니었다. 그의 평화선 선포는 국제법적인 타당성을 띠고 있었다. 그의 프린스턴 대학 박사 논문이 戰時중립에 관한 것이었다. 국제법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미국도 겉으론 李 대통령을 비판했지만 군부는 李승만 대통령 편을 들어 평화선과 비슷한 군사목적의 해상경계선을 그어 일본의 평화선 침범을 사실상 봉쇄했던 것이다. 건국 대통령의 독도 수호는 그가 이룬 수많은 성과 중 하나일 뿐이다. 이 불굴의 건국 鬪士 동상을 독도에 세우는 건 어떨까? 그가 동쪽을 향하여 서 있는 모습은 砲臺(포대)보다 더 위력적일 것이다.

*李承晩과 평화선 해설

‘평화선 선언’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외교적인 기습이었다. 당시 한-일간의 예비회담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한일 회담에서만은 어디까지나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고, 반명 한국은 일제 통치에 대한 보상 심리와 경계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서로 간에 첨예하게 이해가 맞서고 있었던 셈이었다. 결국 예비회담은 별 진척을 보이지 못한 채 1951년말 일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측 협상 대표였던 金東祚씨(전 외무부 장관)는 일본측에 대응할 협상 카드로 어업자원 보호수역의 선포를 생각해 냈다. 처음에는 단순한 어업자원 보존의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상은 실무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 과정에서 안보-국방 차원까지 포함됨으로써 훨씬 ‘래디컬’한 성격을 띠게 된다. 수역 내의 어족 자원 보호는 물론, 대륙붕의 해상·해저 광물 자원의 보존과 개발, 국방상의 해양 방어, 독도를 둘러싼 영토 분규의 종식 선언까지 포함한 강력한 해양 주권 선언안을 마련한 것이다.

   ‘하나,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의 영토인 한반도 및 도서(島嶼)의 해안에 인접한 해책(海柵:해양경계선)의 상하에 기지(旣知: 이미 알려져 있고)되고 또는 장래에 발견될 모든 자연자원, 광물 및 수산물을 국가에 가장 이롭게 보호·보존 및 이용하기 위하여 그 심도(深度) 여하를 불문하고 인접 해책에 대한 국가 주권을 보존하며 또 행사한다…’

   총 4장으로 된 이 역사적인 선언문의 안건은 ‘인접 해양에 관한 주권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李承晩 대통령에게 상신됐다. 李대통령은 ‘가만(可晩)’이라고 재결했다. 그렇게 해서 1952년 1월18일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만천하에 공포됐던 것이다. 이 선언은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한다는 취지가 부각돼 ‘평화선’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이 선언은 公海상에 주권 선언을 한 만큼 이는 공해 자유 원칙에 위배되는 면이 있었다. 국제법상 공해 자유 원칙은 공해상의 자유로운 어업 활동의 보장도 포함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언문에 공해상의 자유 항해권은 방해치 않는다고 단서를 달기는 했다. 하지만 영토 귀속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던 독도를 포함해 우리의 해양주권을 설정하고 이를 침해할 경우 무력 행사로서 제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니, 일본으로서는 크게 한방을 먹은 격이었다. 

   일본의 반발은 엄청났다. 일본은 평화선이 선포된 지 1주일 만에 정부의 첫 공식 항의성명을 외교 경로를 통해 우리쪽에 전달해 왔다. 언론에서는 ‘공해 자유를 완전 무시’, ‘한국, 어업 교섭에 선수 치다’ 등의 점잖은(?) 반발에서부터 ‘오만무례하고 불손한 한민족’, ‘한국의 해양 주권 선언은 영토 침략’이라는 감정 실린 성토까지 쏟아져 나왔다. 또 일본 각지에서 연일 평화선 선포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金東祚씨의 회고에 따르면 이 평화선 선포가 있은 뒤로 한일 회담에 나온 일본대표들은 본건은 제쳐놓고 “한국측이 과연 한일회담을 계속하려는 성의가 있는지 묻고 싶다”는 등의 언사를 퍼부었다고 한다. 또 미국, 영국, 대만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이 평화선 선포에 대해 비판적인 성명을 내면서 일본의 입장을 거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평화선은 선포된 지 십수년 후,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소리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 평화선 선포는 일본측에 충격을 준만큼 한일회담 과정에서 성공적인 외교 전략으로 유효했던 셈이다.
한일회담에서는 무엇보다도 평화선이 현안과제가 됐고, 일본측에서는 이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서둘렀다. 한일회담이 타결되기까지 여러 차례의 결렬이 있었고 몇 차례의 파국이 있었지만 결국 타결의 종장까지 이르는 데는 이 평화선이 실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평화선’은 ‘李라인’으로 명칭이 변했다. 李承晩 대통령을 反日 초강경론자라는 점을 꼬집고 싶은 일본의 심사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당당함을 보여준 ‘위대한’ 선언으로 기억될 것이다. 

   (崔普植 月刊朝鮮 기자/月刊朝鮮 2005년 1월호 별책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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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내 책임하에 명령하였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군에 명령하여 유엔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의 문을 강제로 열고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북한군 反共포로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은 유엔군 초병들을 감금, 또는 무장해제시키고 反共포로 약3만 명을 풀어주었다.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은 판문점에서 휴전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큰 쟁점은 反共포로 처리 문제였다. 미국측은 자유의사 송환, 공산측은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면서 2년간 휴전협상을 끌었다. 그 사이 戰線에선 치열한 高地戰으로 엄청난 희생이 계속되었다. 

   李承晩이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미국이 포로 문제에서 양보하고 적당히 공산군측과 합의를 본 뒤 서둘러 한국을 떠나려 한다면 한국군이 단독으로 北進하여 휴전협상을 깨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李承晩의 이 도발적 조치에 경악한 것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였다. 이들은 한때 李 대통령을 감금하는 쿠데타 계획까지 구상하지만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그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韓美상호방위협정-한국군 20개 사단 현대화-경제원조 등의 약속을 하고 李 대통령을 달랜다. 李 대통령의 세계를 향한 도박은 韓美동맹이란 한국의 생명줄로 結實되었다. 한국군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침략자와의 싸움을 무승부로 끝낼 수 없다는 이승만의 고매한 理想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1953년 6월20일자 조선일보는 반공포로 석방을 보도하면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 

   <反共韓人捕虜釋放을 完了>
<내 責任下에 命令했다-李대통령, 重大談話를 發表>
한국군 헌병사령관도 '엄숙한 主權발동. 국민은 (반공포로들을) 愛護善導하라'는 발표를 하였다. 

   '내 책임하에 명령하였다'는 李 대통령의 선언이나 '主權발동'이란 헌병사령관의 소신은 미국의 도움으로 延命하던 국가 지휘부가 지녔던 생존에의 무서운 의지와 自主정신을 느끼게 한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國力을 갖춘 오늘날 한국의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核선제공격을 선언한 북한정권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李承晩 대통령이었다면 자위적 핵무장을 선언한 다음 세계를 향하여 '내 책임하에 자위적 조치를 명령하였다.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엄숙한 主權의 발동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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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戰略家 닉슨은 왜 李承晩에 감탄하였는가?

<나는 李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가을 닉슨 미국 부통령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親書(친서)를 갖고 있었다. 닉슨을 만난 駐韓(주한) 미국 대사 엘리스 브릭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비슷한 불안을 품고 있었다. 휴전에 반대해온 李承晩 대통령이 북한군을 독단으로 공격하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李 대통령은 자신이 그런 공격을 해놓으면 미국은 한국을 돕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誤判(오판)하고 있을지 모른다. 닉슨은 브릭스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사관에서 만났다. 특별 협상팀을 이끌고 있던 아서 딘은 닉슨이 이승만에게 전달할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것을 알고 말했다. 그는 李承晩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李 대통령의 이빨을 뽑고 그로부터 무기를 빼앗아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우리의 친구들이 거의가 상황이 좋을 때만 친구인 척하는 데 반해 李 대통령은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입니다.”

   다음날 닉슨은 경무대로 李承晩 대통령을 방문했다. 닉슨이 관찰한 李 대통령은 날씬한 몸매에 걸음이 활달하고 악수할 때의 힘도 세었다. 78세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곤색 양복에 곤색 넥타이를 맸다. 李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이 “개인적으로 논의할 사안이 있다”고 하니 배석자를 물렸다. 

   닉슨은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대표할 뿐 아니라 한국의 친구로서 활동한 오랜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고 말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는 닉슨을 凝視(응시)하였다.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李 대통령은 그 편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는 천천히, 계산된 행동을 하듯이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냈다. 그는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위엄 있고 정확한 발음이었다. 이 親書에서 아이젠하워는 한국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한 뒤 李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李 박사는 편지를 무릎 위에 놓고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아주 좋은 편지입니다”라고 했다. 

   李 대통령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서 내용과는 다른 話題(화제)로 옮겨갔다. 일본문제, 아시아-태평양 정세의 미래를 이야기하더니 미국정부가 對韓(대한)원조를 해주는 방식을 비판했다. 닉슨은 話題를 다시 親書쪽으로 돌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린다”고 했다. 

   “나도 귀하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에 대해서 나는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관계로 해서 나는 미국의 정책과 맞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나는 노예상태의 북한동포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그러나 필요하다면 武力(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한국인의 지도자로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반도를 분단된 채로 남겨놓은 상태의 평화는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 전쟁은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평화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李 대통령은 닉슨을 향하여 몸을 숙이더니 말했다.
“내가 일방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미리 알려드릴 것임을 약속합니다.”

   닉슨 부통령은 이 정도의 약속으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상호합의하지 않고선 어떤 (도발적) 행동도 한국이 단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헤어졌다. 미국 대사관에 돌아온 닉슨은 대화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닉슨은 자신의 침묵이나 무능으로 하여 李承晩 대통령이 오해를 하도록 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미국 정부가, 李 대통령이 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이해시켜야만 한다.

   李承晩 대통령은 닉슨을 만난 뒤 기자들에게 “닉슨 부통령을 통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설득하여 한반도의 이 문제를 끝장내게 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했다. 이것도 닉슨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에 닉슨 부통령 부처는 한국 무용과 음악 공연에 초대되었다. 어린이 합창단이 출연했다. 공연도중 무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어린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휘자는 貴賓(귀빈) 앞에서 이 무슨 창피냐는 듯이 퇴장해버렸다. 닉슨은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동양에서 손님 대접에 실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를 잘 아는 그는 이 난처한 처지를 수습하고 싶었다. 

   닉슨 부통령 부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씩 나중에는 관중들이 전부 다 일어나 함께 박수를 쳤다. 어린이 합창단도 웃기 시작했다. 지휘자도 무대로 돌아와 공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다음날 닉슨은 李承晩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李 대통령은 지난 밤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듯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대통령은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두 페이지짜리 종이를 꺼내서 펼쳤다. 그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내가 직접 타이프를 쳤다”고 말했다. 李 대통령이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은 이승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貴國(귀국)은 가장 중요한 협상력 하나를 잃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희망을 잃는 것이 됩니다.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솔직합시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평화를 갈망하므로 그 평화를 얻기 위하여는 어떤 양보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자들은, 나는 미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가진 그런 불안감을 없애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하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인 내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 편지를 읽어보고 파기해주셨으면 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메모한 두 페이지짜리 종이를 닉슨에게 건네면서 “보고용으로 이를 이용해도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 메모엔 이승만 대통령이 필기한 한 구절이 첨가되어 있었다.

   <너무 많은 신문들이 이승만이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한다.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은 우리의 선전방침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경무대에서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는데, 李 대통령은 이때 이렇게 말했다고 닉슨 회고록은 기록하고 있다.

   “내가 한국은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미국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닉슨은 퇴임 후에 쓴 회고록에서,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李承晩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李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닉슨은 冷戰(냉전)을 서방세계의 승리로 이끈 3大 전략가중 한 사람이다. 냉전 승리의 틀을 만든 트루먼, 소련을 압박하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만든 레이건, 그리고 중국과 화해하여 소련 진영의 힘을을 뺀 닉슨이 그들이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 후 물러난 뒤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함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강조했다. 이 깨달음은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배운 ‘불가측성의 중요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어쨌든 최고의 反共전략가인 닉슨이 李承晩 대통령을 극찬한 것은 요사이 조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된 이 위대한 先覺者(선각자)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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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을 향해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라고 소리친 이승만
    1954년 7월 李承晩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 의회 연설에서 미국의 어중간한 對공산권 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여 미국 행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7월30일 백악관에서 2차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묵고 있던 李 대통령에게 미 국무성 副의전장이 정상회담 후 발표할 공동성명서 초안을 들고 왔다. 이 초안에는 李 대통령이 싫어하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 운운'하는 대목이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國交를 수립하여 동아시아에서 미군 작전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여기에 李承晩 대통령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李 대통령은 미국이 일본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싫었고, 한국의 國力이 약한 입장이므로 일본과 수교하는 데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李 대통령은 즉각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백두진, 양유찬, 김정렬씨 등이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지."
제2차 韓美 장상회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인데 이승만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왜 안 오느냐'고 전화가 걸려왔다. 측근들이 '그래도 회담은 하셔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여 李 대통령은 10분쯤 늦게 백악관내 회담장에 도착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韓日 국교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을 꺼냈다. 화가 나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있는 한 일본 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해버렸다. 아이젠하워(愛稱이 아이크) 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李 대통령은 이때 아이크의 등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 

   물론 이 말은 통역되지 않았다. 아이크는 가까스로 화를 식히고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이승만 대통령이 일어났다. 

   "외신 기자 클럽에서 연설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먼저 갑니다."
李 대통령에 이어 아이크도 나가버렸다. 양유찬 駐美대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하여 실무자들끼리 회담을 계속했다. 그래도 미국은 군사원조 4억2000만 달러, 경제원조 2억8000만 달러, 도합 7억 달러의 對韓원조를 약속했다(한표욱 지음, '이승만과 한미외교' 참고. 중앙일보사 발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전선의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독특한 웃음이 그의 매력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와 큰 차로 당선되었다. 이때 선거구호는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였다. 아이크는 당선자 시절 한국전선을 방문했다. 그는 6.25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했었다. 이때부터 李承晩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1875년생인 이승만은 정상회담 당시 79세로서 아이크보다 15세가 더 많았다.


*스탈린 앞에서 시험 치고 지도자로 뽑힌 김일성, 미국 대통령을 호통 친 이승만 
  
   金學俊 전 동아일보 회장(전 서울대 교수)이 펴낸 '북한의 역사'(1,2권)는 두 권을 합쳐서 2000페이지나 되는 大作이다. 東西 냉전이 끝난 후 공개된 문서를 충분히 활용하여 쓴 이 책은 實錄처럼 흥미진진하다. 1946년 7월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일종의 면접시험을 친 뒤 김일성을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선택하는 장면은 李承晩 대통령이 왜 김일성을 무시하고 스탈린과 상대하려 하였고 북한을 항상 北傀라고 불렀는지를 깨닫게 한다. 

   金學俊 박사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스크바로 호출된 두 사람에게 조선반도의 정세, 남조선의 정세, 북조선의 정세를 자세히 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시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소련인) 레베제프는 이 경우에 대비해 이미 김을 “꼼꼼하게 준비시켰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를 예측한 뒤 예상되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미리 마련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김에게 특히 군사문제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특히 “군사 및 전략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가장 완벽하게 내보일 수 있었다”라고 레베제프는 회상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소련군에 호의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그는 스탈린의 배려, 그리고 소련군의 주둔 및 협조가 북한에서 여러 개혁들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을 되풀이 함으로써 스탈린의 환심을 사려 했다.
박헌영의 통역을 맡았던 샤브신의 부인 샤브시나의 회상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朴이 “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을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북한의 역사'는 이렇게 썼다.

   <스탈린은 자신의 별장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의 일행을 초청해 연회를 베푼 뒤 박을 모스크바에 며칠 머무르게 해 기업소들과 공장들을 견학시키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의 통역들의 회상에 따르면, 김은 “무서운 지도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중급의 黨(당)간부처럼 보였으며, “아첨하는 어조로”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내내 스탈린에게 동의하곤 했다. 다시 그들에 따르면, 김은 긴장해 있었고 언제라도 스탈린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으며 스탈린은 김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자신의 학생처럼 대하면서 강의하고 지시했다. 통역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군사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김을 감동시키면서 戰爭史(전쟁사)로부터 예들을 자주 인용했다. […] 김은 진심에서 우러난 감격과 환희를 나타내며 입을 벌린 채 그것을 들었다.” 레베제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김은 열광적인 단어를 그치지 않고 반복했다. […]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에 의해서 그가 차지한 ‘영웅’의 권위가 ‘커다란 지도자’의 작은 손짓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아부하였고, 박헌영은 깐깐한 자세였던 듯하다. 김일성은 생전에 黃長燁 비서에게 자신이 스탈린에게 불려가 시험을 잘 쳐서 박헌영을 누르고 지도자로 뽑혔다고 자랑하더라고 한다. 

   한편 李承晩 대통령은 1954년 미국을 방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미국측이 韓日수교를 압박하자 '내가 살아 있는 한 수교는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자 李 대통령은 그의 등을 향하여 '저런 고얀 X이 있나, 저런'이라고 호통을 쳤다. 미국 대통령에게 호통 친 한국 대통령과 소련 독재자에게 아부한 북한 지도자의 차이가 오늘의 남북한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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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力과 兵力은 반드시 正義를 이룬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에 보낸 연하장은 이런 漢文章(한문장)이었다.

   <筆力兵力必爲正義(필력병력필위정의)
用之卽無敵不畏(용지즉무적불외)>
<筆力(필력)과 兵力(병력)은 반드시 正義(정의)를 이룬다.
이를 쓰면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敵(적)을 없앨 수 있다>는 뜻이다. 김정일 세력과 대결하는 데 언론인과 軍人(군인)들이 참고로 할 만한 글이다. 정보화 사회에선 글을 아는 이들은 모두가 기자이다. 이념전쟁에선 筆力이 兵力이라는 建國 대통령의 지적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곳이 한국이다. 휴전선은 兵力으로 지키고 후방의 이념戰線은 筆力으로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글을 많이 써야 한다. 대포를 많이 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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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반대한 시위부상자들을 위문한 李承晩

<수술환자들의 회복실에 들어가 부상환자들의 상처를 일일이 돌보고 이마를 짚어 보면서 "하루속히 낫도록 하라"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李承晩 대통령은 (1960년) 4월23일 오후 5시35분 송요찬 계염사령관 박찬일 비서관 및 곽영주 경무관을 데리고 아무런 예고 없이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을 방문, 입원가료중인 4.19 사건 부상자들을 위문하였다. 이동식 의사와 간호과장의 안내를 받은 李 대통령은 먼저 수술환자들의 회복실에 들어가 부상환자들의 상처를 일일이 돌보고 이마를 짚어 보면서 "하루속히 낫도록 하라"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부상자들의 입원실을 돌아보는 李 대통령의 이날 모습은 몹시도 침통해 보였으며 '환자들이 무엇을 먹는가. 모든 것을 잘해 주어'라고 하면서 간호과장에게 당부하였다>

조선일보 1960년 4월24일자 사회면 기사이다. 같은 면엔 '基督聯서 認定호소, 4.19는 3.1과 같다'는 제목의 기사도 실렸다. 경찰이 고려대학생 시위대를 습격, 폭행한 깡패들을 수사하고 있다는 기사가 사회면 머리에 있었다.

이런 기사가 비상계엄령 아래서 실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당시 계엄사령부가 사실상 시위대 편을 들었다는 증거이다.

자신을 반대한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한 분, 스스로 下野한 분, 전쟁중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않고 선거를 중단시키지 않았던 분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4.19 主役들이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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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 60주년 기념 연설: 이승만은 韓民族의 축복이었다!

建國 대통령을 기리지 않는 建國 기념식은 예수를 말하지 않고 성경을 공부하라는 것과 같다.
  
  李承晩이 建國 대통령이 된 것은 한민족의 축복이었습니다. 광복당시 3000만 한국인중 가장 학력이 좋은 사람,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 가장 식견이 높은 사람, 가장 배짱이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 건국 60주년의 주인공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입니다. 건국대통령을 기리지 않는 건국기념식은 예수를 말하지 않고 성경을 공부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이 없는 껍데기 기념식에 불과합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분들은 고마움을 아는 분들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건국대통령을 알아줌으로써 그분과 닮은 사람이 되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2. 이승만은 한국인들에게 생명만큼 귀중한 것, 즉 자유를 선물한 분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자유를 피땀으로 지켜내고, 이 자유를 천금처럼 사용하여 오늘의 근사한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자유를 얻었기에 백성이 국민이 되고 노예근성을 버리고 주인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이승만 대통령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자유투사, 위대한 프리덤 파이터였습니다. 적화된 유라시아 대륙의 마지막 교두보인 대한민국을 홀로 지켜내고 이 땅을 자유의 기지, 번영의 쇼윈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20세기의 세 악당, 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을 1 대 3으로 상대하여 이겼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을 친 김일성의 비겁한 기습공격을 당했던 이승만 대통령이지만,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버티어내었고, 끝장에 가서 결국 망한 것은 저 세 악당이었습니다. 

   4. 김대중, 노무현이 아니라 이승만이 가장 위대한 민주투사이십니다. 그는 전쟁중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습니다. 戰時중인데도 한국의 신문들은 정부를 마음대로 비판했습니다. 전쟁중인데도 국회를 해산하지 않았고, 전쟁중인데도 최대규모의 지방선거를 실시했습니다. 학교에선 민주주의를 가르쳤고,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부상한 학생들을 위문한 李 대통령은 '불의를 보고도 저항하지 않는 젊은이는 희망이 없다'면서 이들을 격려하곤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이런 이승만 대통령을 누가 독재자라고 부릅니까?
5. 요사이 진보와 개혁을 자칭하는 얼치기들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위대한 진짜 진보주의자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0년 전에 이미 개방과 경쟁만이 우리의 살 길임을 천명했던 위대한 개혁가이십니다. 1904년에 쓴 독립정신이란 책에서 스물아홉의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서 개방해야 한다.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다>
6. 김일성이 아니라 이승만이 위대한 민족주의자이자 진정한 주체사상가였습니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 앞에 불려가 필기시험을 친 뒤 그들의 꼭두각시로 발탁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던중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화를 내면서 퇴장하자 그 등을 향해서 '저런 고얀 놈이 있나'라고 호통을 쳤던 자존 자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너그러운 나라 미국과 당당하게 친구가 되도록 했습니다. 김일성은 세계에서 가장 악질적인 소련과 중공과 한 패가 되었다가 망했습니다. 

   7. 노무현이 아니라 이승만이 독도를 지켜냈습니다. 노무현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지만 이승만은 6.25 전쟁중에 평화선을 그어 독도를 확보하였습니다.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배를 380척, 선원을 3900명이나 나포했던 이승만이었습니다. 이런 이승만을 고마워하지 않는 심보론 독도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8. 박정희의 산업화와 박태환 선수의 금메달도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산업화와 민주화와 복지사회의 레일을 깔았고, 박정희는 그 레일을 힘차게 달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박정희가 만들었고,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은 이승만이 만들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국, 농지개혁, 교육개혁, 인재양성, 강군 건설, 그리고 한미동맹의 구축이 있었기에 공장도 만들고 원자력 발전소도 돌리고, 민주주의와 법치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9.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 등등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성공한 나라 대한민국의 始祖이십니다. 그분이 선물한 자유를 공짜로 쓰면서 건국의 아버지를 저주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먹고사는 깽판세력이 있습니다. 선동, 난동, 친북, 거짓, 위선, 무능, 무식, 무법, 무례한 이 자들은 밤만 되면 기어나오는 어둠의 세력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이들이 누리는 깽판의 자유를 박탈하고 이들이 펼치는 저주의 굿판을 걷어 치워야 합니다. 이들이 든 거짓의 촛불을 제대로 끄지 못하는 정부가 들불, 산불을 어떻게 끄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쉽게 끌 수 있는 게 촛불 아닙니까?

   10. 이승만 대통령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던 모세와 같은 분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도 조국에서 잠들 수 없었던 분, 역사의 십자가를 진 어린 양과 같은 분이십니다. 이승만 박사는 말년에 하와이의 병상에 누워서도 양자 이인수씨한테 '지금 누가 통일을 추진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자유통일은 이승만 대통령이 후세에 남긴 유언이고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분이 선물한 자유의 힘으로써 북한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 자리에서 김정일 일당을 처단하고, 2300만 동포를 해방하고 일류국가를 건설하여 행복하고 멋지게, 당당하게 살아봅시다!

   11.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자유통일할 때까지는 남북한에 남아 있는 역사의 쓰레기들, 저 극악무도한 깽판세력, 건달세력과 대결하는 일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한반도의 삶의 조건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투쟁해야 하고, 세계시장에서 이기기 위하여 경쟁해야 합니다.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망치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는 것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우리의 숙명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 여러분, 이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살아갑시다!
12. 이승만 대통령이 생전에 자주 인용했던 성경귀절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1절: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인 모두를 노예나 백성이 아니라 국민, 그리고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승만을 증오하는 저 좌익 깽판세력, 건달세력은 국민들을 속여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다시 종의 멍에를 메도록 하려 합니다. 노예근성의 소유자들인 저들은 거짓, 트집, 억지, 위선, 남 탓하기가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런 저질 노예근성과 단절하고 모범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법을 잘 지키고, 세금을 꼬박 꼬박 내고, 내 권리가 침해되면 싸우고, 예절과 절도가 있는 강건하고 실질 있는 국민이 되는 것, 그런 국민들이 모여야 선진국, 일류국가, 강대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족의 링컨 같은 분이셨습니다. 한민족을 노예상태, 백성상태에서 해방시켜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신 분, 그런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알기에 우리는 복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 박사를 알기에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국 60주년을 맞는 오늘 이승만 대통령의 드높은 뜻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품고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을 향해서 손에 손 잡고 함께 달려갑시다. 그분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대한민국 만세, 이박사 만세, 자유통일 만세! 감사합니다.
[ 2013-04-28, 19:31 ]

 

 

공산당을 콜레라, 미친 개, 악당, 개새끼라고 욕한 네 偉人들

 

이승만, 트루먼, 레이건, 박정희.

趙甲濟    

“공산당은 호열자이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 (이승만)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박정희) " "그 개새끼들을 막아야 합니다"(트루먼)
  
   공산주의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最惡(최악)의 구조적 惡이다. 이런 惡의 강점과 약점에 대하여 많은 先覺者(선각자)들이 본질을 드러내는 名言(명언)을 남겼다. 惡을 이기는 말의 武器(무기)이다. 공산주의 중에서 최악의 變種(변종)인 김일성주의를 추종하는 한국의 從北(종북)세력은 최악 중의 최악인데, 아래 名言으로 無力化(무력화)시킬 수 있다.

*'惡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세익스피어 연구가 브레들리는 '惡은 스스로를 드러낸다'(Evil exhibits itself.)는 유명한 표현을 하였다. 惡은 善과 싸울 뿐 아니라 같은 惡끼리 싸운다. 우리가 흔히 '좌익은 자충수로 망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충수는 같은 편 안에서 서로 충돌, 자신들의 약점을 스스로 폭로한다는 뜻이다. 이게 惡의 속성이다. 악한 從北통진당 안에서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자는 동정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하다"(탈무드)
잔인한 김정은 일당을 동정하는 자들은 동정 받아야 할 탈북자들에게 잔인하다. 악당들이기 때문이다.

*"惡을 惡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善을 행하라"(성경 로마서)
공산당 수법으로 공산당을 이길 순 없다. 우리는 善意(선의)를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이긴다. 우리의 선함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악마는 조롱을 견디지 못한다"(마르틴 루터)
공산주의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다.

*"공산당은 호열자이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李承晩)
공산주의자와 공존하자는 자들은 공산당 편이거나 기회주의자들이다.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박정희)
공산주의자의 본성은 狂信이다. 미친 놈들에게 말이 통할 리 없다. 힘이 가장 좋은 설득력이다.
*"그 개새끼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트루먼. 김일성이 남침했다는 보고를 받고 한 이야기).
*"소련은 惡의 제국이다"(레이건)

*"無産者(무산자)는 無識者(무식자)이다. 無識者가 통치를 하려니 선동과 폭력을 쓴다"(黃長燁)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無知(무지)는 힘"(조지 오웰, '1984'에 나오는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의 구호)

*"이념은 공동체의 利害(이해)관계에 대한 自覺(자각)이다"(황장엽)
*"이념이 가장 큰 전략이다"(김정강)

*"거짓이 판 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혁명이다"(조지 오웰)
*"狂信徒(광신도)와 싸울 때는 우리도 광신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한다"(조지 오웰)
*"惡黨이 작당할 때 善人은 사교를 해야 한다"(에드먼드 버크)
*"공산주의는 증오의 과학이다"(여러 사람)

*"從北척결 자유통일, 부패척결 一流(일류)국가"(국민행동본부)
*"침묵하는 다수는 필요 없다. 행동하는 다수라야 나라를 지킨다"
*"애국은 손발과 지갑을 통하여 표현된다"
*"애국운동의 3大 원칙은 大同단결-백의從軍-分進合擊"(조갑제닷컴)

*"공산주의자들을 같은 핏줄이라고 생각하는 건 誤算(오산)이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朴正熙 대통령은 돌아온 남측 대표 李範錫(이범석) 씨 일행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북한 당국을 상대할 때의 지침을 내렸다.

<남북적십자 본회담時 지침

1.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하고 모두 보고해야 한다.

2.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때는 사전에 전략을 세워놓고 해야 한다.

3. 북한 위정자들과 우리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誤算이다.

4. 우리 적십자사는 인도적 사업이라고 보나 북한은 정치적 사업으로 본다.

5. 북한 요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정치적이다.

6.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7. 술을 마실 때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8. 북한 사람들과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마라.

9.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 자문위원들은 즉각 반박하라.

10. 대표단과 자문위원 사이는 긴밀한 협의를 하되 매일 저녁 결산토록 하라.
[ 2013-04-28, 18:40 ]

http://cafe.daum.net/nowool05